행복한 사람들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현재를 음미한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25일)
오늘은 대구 노인 복지관에 인문학 강의를 하기 위해 새벽에 나간다. 그래 어제 <인문 일지>를 써 놓았다. 점심 시간에 공유할 생각이다. 지난 주일에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를 다시 읽었다. 나이를 먹었다 할지라도, 노년 시기에 특히 생존만이 아니라, '노인의 존재'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다. 인간은 두 가지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생존 본능, 또 다른 하나는 종족 보존을 위한 복제 본능이다.
생존을 위한 욕구는 의식주와 같은 몸을 위한 욕구와 심리적 안정을 위한 안전, 사랑, 지위, 소속감 그리고 자부심과 같은 정신적인 욕구를 다 포함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생존할 뿐만 아니라, 삶의 환희를 경험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전혀 다른 성격의 욕구를 찾아 나선다. 인간은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욕구를 넘어선 영적으로 만족스런 그 무엇을 추구하게 된다. 그 무엇이란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 되는 것이다. 탁월하려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현재를 음미한다. "아 지금 참 좋다!" 이 잦은 멈춤과 음미의 총합이 그날 하루 능동적으로 찾아낸 행복의 양이다. 그렇게 매일 하루치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국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를 음미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그 분야애서 탁월함이 있어야 한다.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어떤 성취가 중요하지는 않다. 성취 지향적일수록 행복지수는 낮다. 행복을 큰 성취애서 찾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이 크고 높게 설정되어 있으면, 평범한 일상은 초라함을 가져다 준다.
인간은 자신이 해야만 하는, 그 무엇에 매진할 때 행복하다.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잠재성을 일깨워, 그 잠재성과 어울려 춤을 출 때, 행복하다. 진정한 행복이란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영적인 자신을 만족시킬 때, 경험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욕구를 알고, 그것을 매일 갈고 닦는 수련을 지속하여 탁월함에 이르면, 자연히 남들이 모두 최고선이라고 추구하는 부나 명예보다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삶의 고유한 임무에 몰입하게 된다. 그럴 때만이. 잠자고 있던 잠재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우리는 "서사의 위기" 시대를 살면서, 이런 행복을 잊고 있다. 우리는 지식보다 정보에, 공동체보다 커뮤니티에, 공감보다 정보 교환에 빠져들며 파편적인 스토리를 무한히 재생산한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사람은 현재를 과거와 연결하여 맥락을 이어나가고 있지 못하다. 그건 삶이 아니다. 하나의 문제에서 또 다른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연약하고 적나라한 '생존'일 뿐이다. 이 시대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삶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 다시 꼼꼼하게 읽고, 그 내용을 공유한다.
오늘날 우리는 종이 신문을 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정보와 뉴스를 얻는다. 독자들의 관심은 코 앞에 놓인 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거리로 축소된다. 오늘의 독자들은 시선을 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 길고 느리게 머무는 시선은 독자들에게 없다.
어제도 이야기 했지만, 서사와 정보는 다르다. 서사,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전승적 지식은, 정보와는 완전히 달리 시공간적 구조, 즉 맥락이 있다. 일단 지식은 '멀리서' 온다. 정보는 모든 것을 가용범위에 두는 무간격성의 자연적 발현이다. 어렵게 표현했다. 정보는 인식의 순간 이후 더는 살아 있지 못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 있기 때문에 그 순간에 살아 있다. 반면 지식은 그 순간을 넘어서 앞으로 다가올 것들 과도 연결되는 시간적 폭이 있다. 그래서 지식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정보는 새로운 것을 찾아 세상을 샅샅이 쥐지는 리포터의 매체이다. 그 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이야기하는 사람, 즉 서술자(narrator)라 한다. 서술자는 정보를 전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이야기 하기의 예술은 정보를 내주지 않고, 그저 재현할 뿐이다. 정보는 단지 세상을 앞에 전시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손에 잡히도록 한다. 그와 달리 먼 곳을 가리키는 '기록'은 암시하는 바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이야기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야기 하려고 사는 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누구에게나,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 삶의 엄연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거나,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그래 우리는 서사의 힘을 길러야 한다. 최진석 교수는 "논증이나 논변에 빠지는 사람보다 이야기 하는 사람의 영혼이 한 뼘 더 높다. (…) 치밀하게 짜진 논변의 숲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잃는다"고 말했다. 논문 같은 논증적인 글에서는 영혼이 건조하고, 자신을 잃는다는 말이다.
'왕년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틈만 나면 누구나 옛일을 회고하면서 자기 삶을 그럴듯하게 빚는 데 열중한다. 자기 이야기가 없는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생각 있는 사람은 맥락을 살피면서 조리 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건네고, 눈치 없는 사람은 허세와 자기 자랑, 신세 한탄과 자기 비하가 뒤범벅된 이야기로 듣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지금은 유튜브가 대세이다. 그러니까 문자보다 영상이 대세이고, 이미지와 보기 그리고 듣기가 함께 이루어진다. 그래 보고 들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며 이해가 되지만, 문제는 바로 다 잊어 먹는다. 그게 문제이다. 머리에 기억은 안 되고, 이미지로 느낌만 남는다. 원래 우리의 뇌는 기억과 기억의 관계만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 다시 들은 내용을 이야기를 하려면, 잘 못한다.
자기 서사의 거장으로 불리는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마농지 펴냄)에 따르면,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건 힘든 일이다. 익숙한 것을 꿰뚫고 들어가 널리 공감할 만한 진실을 캐내는 일은 쉽지 않다. 나에겐 당연히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당연하지 않음을 깨닫는 건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자기 삶을 재료 삼아 인생 이야기를 해 나갈 때, 자신만 떠올리는 사람은 실패한다. '라떼는 말이야'가 흔히 사람들 마음에 싫증과 혐오를 일으키는 이유다. 자기 이야기를 잘하려면 오히려 자신이 겪은 사건, 자신이 해냈던 일 등과 거리를 둬야 한다. 사람들이 진짜 관심 있는 건 타인의 경험 자체가 아니라 타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경험은 내 삶에서 반복할 수 없지만, 자기 성찰을 거쳐 얻어낸 삶의 태도나 관점은 되살릴 수 있어서 이다.
따라서 좋은 에세이를 쓰거나 멋진 회고록을 쓰는 작가들은 모두 자신이 겪은 상황과 자신이 전할 이야기를 구분한다. 사적 경험 안에서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의미와 가치, 통찰과 지혜를 가려낼 줄 안다는 뜻이다. 가령 엘리자베스 비숍은 일곱 살 때 치과 대기실에 앉아 겁 많은 이모가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들었다. 그러나 '대기실에서'라는 자전적 시에서 그가 전하려 한 것은 난생처음 경험했던 고독이고, 시인 자신이 느꼈고 우리 모두도 느끼고 있는 그 고독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다.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생 이야기를 할 때 실제의 나와 이야기 속의 나를 구별하는 일이다.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 자신이 겪은 사건에서 멀찍이 물러나서 사건 전체를 통찰하는 이야기 자아, 즉 페르소나를 지어내야 내 삶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인생을 사는 가 만큼이나 인생을 어떻게 말하느냐 도 중요하다. 나를 넘어 모두의 가슴에 새길 만큼 좋은 이야기를 남길 수 있다면 인생은 위대하다.
내일 이야기/김근이
내일 이야기는
어제 내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
내일에서
어제로 돌아가는 이야기
내일 이야기는
내일로 다가가면
아직도 내일 속에 머물고
어제에서는
언제나 내일에 남아있는
이야기
내일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있는데
나는
내일도
내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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