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돈으로부터 좋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25. 17:42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9월 24일)

오늘도, 몇 일전부터 읽고 있던 조던 B.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오늘은 그 규칙 중에 두 번째인,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는 규칙을 이어간다.

나는 지난 번 <인문 일기>에서, 삶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은 혼돈과 질서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혼돈과 질서는 삶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이다. 혼돈과 질서라는 현실의 근본적인 조건은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대부분 익숙하고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살지만, 그 주변은 언제나 생명체를 위협하는 사물과 상황이 둘러싸고 있다.

그래 질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협적인 상황이 수시로 닥치기 때문에 안전과 평안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바뀌어 야만 한다. 그렇지만 한 발은 이미 잘 아는,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땅을 디디고, 다른 발은 잘 모르는, 탐험을 통해 알아 가야 할 땅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삶의 위협 요소들을 안전하게 통제하는 동시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깨어 있을 만한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 곳은 우리가 완벽히 익혀야 할 새로운 것과 더 나은 자신을 만나게 해 줄 새로운 기회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그게 경계에서 서는 일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돈으로부터 좋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이다. 이 주장은 <<성경>>의 <창세기>를 잘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창세기>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자유 선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우선은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스스로 타락한 피조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건 <창세기>를 꼼꼼하게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진실하게 살고 진실을 말한다면, 우리는 다시 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고, 우리 지신과 타인과 세상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야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을 대할 수 있다. 그래야 세상을 똑바로 세우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고, 세상을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곳이지만, 지옥은 우리 모두 영원히 원망과 증오가 가득한 형벌을 받는 곳이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 즉 황금률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은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남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내 가족이나 친구, 연인을 대할 때 그들을 챙기는 것만큼이나 최선을 다해 나 자신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 노예가 되고, 상대는 폭군이 될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나 양쪽 모두 강한 게 훨씬 낫다. 피터슨에 의하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의미는 서툴고 부족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도와주는 것처럼 나약한 나 자신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뜻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책임지고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한다는 것은,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다는 뜻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또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아이가 원할 때마다 사탕을 주면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렇다고 사탕이 아이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행복;은 결코 ;좋은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사탕을 줬으면 어떻게 든 아이가 이를 닦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또 항상 깨어 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남을 배려하고, 정정당당하게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야 한다.
(1) 나 자신을 제대로 보살핀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2) 어떤 일을 해야 과감하게 도전하고, 신나게 일하며, 세상에 도움을 주고, 기꺼이 책임을 지며,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3) 시간을 어떻게 써야 더 건강해지고 더 많이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삶에서 혼돈을 줄이고, 질서를 재정립하며,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안아갈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지산만의 원칙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 원칙을 세우고 있는 거다. 그 두 번째가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는 거다. 세상에 가장 민들을 만한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나를 존중하는 거다.

긴 글이다. 시를 한 편 공유하고, <<장자>> 이야기를 더 하고 오늘의 <인문 일기>를 마친다. 다음 규칙은 '자신에게 최고의 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난다'는 것이다. 오늘 고유하는 시는 고운기 시인의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일/고운기

어느 땐들 살라고 했지 죽으라고 했겠는가만
죽자 죽자 해도 버젓이 살아 있고
살자 살자 해도 홀연 죽는 일이 있었다

내 누이 한 분 여고를 졸업하던 해 대학 시험에 붙고도
갈 형편이 못 되어 종일 방구석에서 천정을 바라보다
초등학교 다니는 날 앉혀 놓고 죽는 방법을 읊어대곤 했는데

수면제를 먹되 한 군데선 죽을 만큼 살 수 없으니 읍내
약국을 차례차례 죄다 돌아 모아오면 그날 밤으로 한입에
털어 넣으란다고 그런데 실은 그 말이 내 귀에 전혀 와 닿
지 않았던 것은 수면제 값이 얼마나 하는지 몰라도 읍내
약국 죄다는커녕 한 군데 가서 살 돈도 그의 호주머니에
는 없었으므로

그보다도 대학 문 한번 밟아보지 않고서는 절대 죽을
것 같지 않던 가슴이 불덩이가 얼굴에 활활 타오르고 있
어서 죽기는 뭘 죽어 갓 스물 발갠 낯빛만 더 이쁘게 하는
것이었다

내 누이 끝내 대학에도 갔고
졸업하던 해 시집갔고

그런데 웬걸 다섯 해 만에 남편 앞세우더니
어린 자식이나 잘 키우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이 악물더니만
갓 마흔에 덜컥 병 걸려 애들 아빠 뒤를 따랐다

부질없기로는 사람의 일이라
죽겠네 죽겠네 그 한마디마저 입에서 나오면 선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나 나나 몰랐었다.

그래도 우리는 다음의 <<장자>> 이야기를 읽고, 할 수 있는 한 수련을 해서 자유를 맛보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 난 주에 읽은 <<장자>> 이야기를 좀 한다. '득도(得道)의 일곱 단계', 서양식으로 말하면 '의식의 심화과정', 즉 질서와 혼돈의 경계에 서서 균형을 유지하는 길로 보았다. " 사흘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이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이레가 지나자 사물을 잊었습니다. 사물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아흐레가 지나가 삶을 잊게 되었습니다. 삶을 잊게 되지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朝徹, 조철)을 얻었습니다.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자 그는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를 보게 되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자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문을 공유한다. "參日而後能外天下(삼일이후능외천하) ; 已外天下矣(이외천하의),吾又守之(오우수지),七日而後能外物(칠일이후능외물);已外物矣(이외물의),吾又守之(오우수지),九日而後能外生(구일이후능외생);已外生矣(이외생의),而後能朝徹(이후능조철);朝徹(조철),而後能見獨(이후능견독);見獨(견독),而後能無古今(이후능무고금);
無古今(무고금),而後能入於不死不生(이후능입어불사불생)."

이 말은 여우(女偶)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여우는 남자인지 여지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름과는 달리 남자라고 주장하는 주석가도 있지만, 이름도 그렇고, 얼굴도 갓난아기처럼 예뻤다 고 한 점과 더불어, 나는 여자라고 본다. 아무튼 여자다운 섬세함과 예리함으로 여우가 말한 것은 '득도의 일곱 단계'이다. 오강남은 이를 '의식(意識)의 심화(深化) 과정'이라 말했다.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외천하(外天下)에서 시작하고,
(2) 외물(外物)
(3) 외생(外生)을 거쳐,
(4) 조철(朝徹) 단계와
(5) 견독(見獨) 단계에 이르고, 여기서
(6) 무고금(無古今), 무시간의 경지와
(7) 불사불생(不死不生), 곧 사생의 구별이 없어지는 경지를 맛보는 단계이다.

여기서 '외(外)'는 '망(忘)'과 같이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본다. 몇몇 주석 가는 '외생(外生)'은 곧 '망아(忘我)'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위의 '득도 일곱 단계'를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면, 일정한 수련을 통해 일상적 의식에서 비일상적 의식으로 들어가므로, 우선 외부 세계, 물질 세계를 잊어버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삶 자체 '나'라고 하는 것 자체를 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단계들은 전체적으로 잊음, 비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완전히 잊어버리면, 갑자기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형안(炯眼)이 열려 '밝음'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하나'를 보게 된다.

이 일곱 단계에서 '견독(見獨)'이 이해하기 제일 어려웠다. 아마도 여기서 나는 '독(獨)'을 '혼자'로 보았지만, 많은 주석 가들은 '하나'로 해석을 했다. 오감남도 '독'을 하나로 보았다. 그는 '하나를 본다'에서 궁극적으로 '하나와 하나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경지에 이르면 하나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 하나를 보는 주체와 그 봄의 대상이 되는 객체의 주객 분리(主客分離)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그 하나 안에 포함될 뿐이다.

이런 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어지는 무시간(atemporal)의 경지,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머물기에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득도(得道)'에 이른 경지이다.

그리고 여기서 3일, 7일, 9일 하는 시간은 단순히 달력 날수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특수한 사람들의 경우 짧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들의 겨우 오랜 기간, 혹은 일생이 걸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 생에서 어떤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마는 수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이런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고운기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12가지_인생의_법칙 #득도의_7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