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청춘이 멋지다'고 하는 이유는 많은 가능성을 실험하고 모색할 수 있다는 데 있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24일)
어제 나는 <인문 일지>에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를 공유했다. "청춘이란/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만, 고미숙은 "청춘을 모방하지 마라"고 했다. 그건 내가 살아 온 시간들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봄은 아직 여름을 모른다. 봄과 여름을 지나온 사람만이 아는 그 시간을 부정하는 거다.
우리 주변에는 청춘을 부러워하면서 흉내 내는 사람이 많다. 에리히 프롬은 "욕심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을 소진 시키는 바닥 없는 구멍"이라 했다. 욕심은 만족을 모르는 채 헛것을 갈망하는 괴물이다. 행복한 노년을 즐기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한 가지를 찾았거나 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의 방해꾼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보았다.
▪ 부러움.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렴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남을 부러워 한다. 반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을 부러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기준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 양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이 고유한 것인 줄 알고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무식(無識)한 사람'이라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을 모르는 채 어영부영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삶, 남이 소유한 것을 나도 갖고자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 흉내. 흉내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부러움은 정신적인 활동이라면, 흉내는 육체적인 활동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때 독창적이며 매력적이다. 반면 흉내를 내는 사람은 진부(陳腐)하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고유한 선율을 연주해보지만 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협화음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고유함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진정성과 공명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름다운 선율로 변화한다.
우리가 '청춘이 멋지다'고 하는 이유는 많은 가능성을 실험하고 모색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시행착오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자유를 누리려면 81난을 겪어야 한다고 본다. <<서유기(西遊記)>>를 보면, 손오공과 저팔계가 108 요괴를 만나고 81난을 겪는 데 미션이다. 인간은 그래야 정신 차린다. 그렇지 않으면 탐욕,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에 노예가 될 수 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실패들이 이 "탐진치(貪瞋痴)"를 덜어준다.
불교에서는 깨달음, 지혜를 얻으려면, '탐진치(貪瞋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탐진치'는 우리를 삼키는 세 가지 독, 즉 '삼독(三毒)'이다. 탐진치는 '탐욕(貪欲)', '진에(瞋恚)', '우치(愚痴)'를 줄인 말이다. 요즈음 쓰는 말로 하면,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다.
▫ 탐욕은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을 말하며, 본능적 욕구의 경계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이다. 가장 강한 독이다. 왜냐면 뒤탈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진에는 분노, 아니 노여움, 또는 성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부딪쳐 미워하고, 화내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뜻에 맞지 않거나 자신보다 우월한 상대에게 나타내는 증오심과 노여움, 시기심, 질투심이기도 하다.
▫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무식 無識)'이다.
이 '삼독(三毒)'이 살아가는데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것을 '아집'과 '무지', 두 가지로도 말할 수 있다. 아집, 나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이 일으키는 번뇌를 알지 못하는 무지를 말한다. 공부로 지혜를 키워야, 이 삼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진치'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계정혜(戒定慧)'이다.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을 말한다. 계율을 지켜 실천하는 계, 마음을 집중하고 통일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정, 미혹을 끊고 진리를 주시하는 혜를 말한다.
어쨌든 젊은 시절의 실패는 자랑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실패들을 통해 '나만의 서사'가 있어야 한다. 즉 스스로 생성한 스토리가 있어야 성숙한 노년 문화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한병철 교수가 <<서사의 위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오늘 아침 그 책을 다시 책꽂이에서 꺼냈다. 그는 사라지는 뉴스라는 스토리를 좇느라 방향도, 의미도 잃은 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삶을 '서사의 위기'라 진단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스토리 중독에서 벗어나 내면의 서사를 회복하고 자신만의 온전한 삶을 회복이라는 거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사람은 이야기이다. (…)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대 서사의위기가 있다."(한병철)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사람'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올라오는 찰나의 장면들을 끊입없이 공유하고 공감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그 안에 의미는 없다. 사라져 버릴 정보에 불과하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 셀링(storyseliing)'이라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게다가 뉴스마저 사람들의 클릭 수에 따라 돈이 된다고 하여, 내용은 없거나 빈약한데 제목만 매우 선정적이다. 우리는 그 제목에 속는다. 그러면 지금은 정보 과잉 사회이다. 새롭고 자극적인 뉴스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이유에서 이유로 빠르게 이동하는 사람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정보로 전락시키는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 가운데서 부유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세상으로부터 충격 받고 저항하고 간극, 아니 틈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 올릴 기회를 빼앗고 그저 '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
지난 해 말, 김난도 교수의 한 인터뷰에서 ‘내러티브 자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네러티브'라는 말이 지금 화두가 된 이유는 "내일을 빙자한 거품을 걷어내고 지금, 이 순간의 진정성에 집중하겠다는 욕구"라 설명했다. 예전엔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이었지만, 이젠 서사의 진정성을 파고들어가는 '네러티브' 시대하는 거다. 예컨대, <ET>에 M&M 초콜릿이 나왔다면 이제 소비자는, 그 회사가 우주개발에 투자했나를 궁금해 하고, CEO가 양성 평등을 말하면 이사회에 여성 임원은 몇 명인가를 묻는다. 상품의 스토리나 CEO의 말보다 그 회사가 가진 제품과 경영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 진정성이 '내러티브'로 확인되면, 소비자는 제품을 사고 주식을 사는 거다. '내러티브'는 단순 스토리와는 다르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고 진정성의 문제라는 거다. 개인도 기업도 결국 자기 정체성의 내러티브가 중요한 자본이 되고 있는 거디. 나는 여기서 '네러티브'를 '서사'로 읽는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구처럼’ 되기 보다 ‘진정한 나 되기’가 단순한 정보의 스토리텔링이 아닌 '나만의 서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노년이 되어도 '네러티브(서사) 자본'이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절대갑으로만 살아온 이들의 무개념과 서민들보다는 화려한 자리에만 관심을 보이는 권위적 정신 세계의 단면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은 "진정한 자신(자기 서사, 아니 자신의 이야기)"라고는 없고, 남을 흉내만 내고 사치에 목매단다. 그러다가 의미가 채워지지 않는 사치스러운 삶은 어느 순간 지루하고 공허해지는 데, 그 대안은 다음과 같은 다른 삶의 방식으로 관심을 돌리는 거다.
-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길로 들어서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사치와 멀어진다.
- 또 어떤 사람은 환경과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몰두한다.
- 또 다른 방식은 '더 작은 것에 대한 예찬', 일종의 미니멀리즘이다. 최소한 것들만 의식적으로 선별하고, 그것에 더 중요하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실패가 자랑스러운 거다. '나는 이런 걸 경험 했어' 하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거기서 '나만의 서사'가 나오는 거다. 절은 시절의 실패 없이 중산층에 무사히 편입한 분들은 더 우울증을 앓는다. 바로 자기 스스로 생성한 스토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실수와 고생을 자랑스러워 해야 된다. 그건 시간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법륜 스님은 잘 늙음이 청춘보다 좋을 수 있는 이유를 단풍에 빗대어 말했다. "꽃은 떨어지면 지저분하게 변색되지만 단풍은 길을 융단같이 덮습니다. 책갈피에 넣어 쓸 수도 있고요." 단풍을 노년에 비유하면 생각이 더 풍성해진다. 가령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가 많아지는 건 경험이라는 빅데이터가 쌓여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잘될 것이고, 저렇게 하면 망할 것이라는 그 나름의 데이터 말이다. 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하는 좋은 말은 잔소리일 뿐이다. 이걸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끝까지 경청하는 것이 어렵고, 중간에 말을 자르거나 자주 노여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가을 단풍을 보고 싶다.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걸 기억하게 하는 좋은 공부다. 비우고 덜어내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라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으로 자신을 온건히 지키는 나무의 지혜를 배우고 싶은 계절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지난 주일부터 더위가 물러갔다.
나무학교/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 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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