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23. 17:28

345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22일)

1
오늘 아침 처음 만난 문장은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거다. 지난 주말에 만난 거다. 나는 감정을 '마음의 감각'이라 정의한다. 감각은 몸이 느끼는 것이라면, 감정은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몸은 객관적이라면, 감정은 마음 속에 있는 주관적인 생각이 만들어 내는 감각이다.

감각은 우리의 생존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감각 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다쳐도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통증을 비롯한 감각 들은 우리 몸에 이상이 있을 경우 빨리 원인을 찾아 해결하라는 신호기 역할을 한다. 

마음의 감각인 감정이 하는 역할도 똑같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것이 보내는 신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할 때 우린 마음의 병을 앓을 수밖에 있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 남의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다. 
 
우리 뇌에서 공감 능력에 작용하는 세포를 작동 시키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다. 공감 능력을 높이려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잘 알고 대처해야 한다. 그러니까 마음도 몸과 똑같이 대우해줘야 한다. 마음을 안정 시키려면 감정 관리를 해야 한다. 감정을 무조건 억압만 하면 안 된다. 예컨대, 자신의 마음을 툭 털어놓고 누구와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치명적인 질식 상태로 몰아 넣는다. 흔히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을 쌓아 놓는다. 이런 경우 마음의 환기가 필요하다. 그 방법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수용하는 일부터 이다.

우리는 “내가 미쳤지, 걱정도 팔자, 배부른 소리!” 라며 자신의 마음을 쉽게 재단한다. 그러나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감정은 마음속에 찾아오는 손님 같아서 불쑥 왔다가, 할 말만 하고 떠난다. 감정은 몸과 마음이 보내는 중요한 신호다. 감정이 상할 때 쓰는 ‘속상하다'는 말은 우리 몸 안의 장기들이 실제로 상하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감정을 계속 참으면 결국 탈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자신의 감정에만 냉정한 판사가 된다. 분노하면 ‘성격 더러운 놈’, 슬퍼하면 ‘약한 놈’, 두려워하면 ‘비겁한 놈'이라고 판결한다. 감정을 느끼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게 전혀 다른 일인데 말이다. 중요한 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감정은 내면의 날씨와 비슷하다. 비가 온다고 해서 나쁜 날씨라고 하지 않듯, 분노나 두려움을 나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비가 씨앗을 키우듯, 분노는 부당함을 바꾸는 힘이 되고, 두려움은 조심성을 길러준다.

엄마도 아이가 미울 수 있고, 아이도 엄마가 싫어 질 때가 있다. 그런 감정을 품는다고 나쁜 엄마나 나쁜 자식이 되는 건 아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읽다가 각성한 순간이 있다. 소설 속 ‘안녕’이 굿바이(goodbye)가 아니라, 봉주르(bonjour)였다는 충격 때문이다. 결국 ‘안녕'은 슬픔을 떠나 보내겠다는 결별이 아니라 어서 오라는 환대의 인사였다. 나도 내 안의 모든 감정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잘 머물다가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2
"묶은 고민이나 버리고 싶은 감정을 종이에 담아 던져보세요." 감정 휴지통 주변에는 정리나 자존감에 관련된 책들이 놓여 있었다. 새삼 많은 사람들이 감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묵은 고민이나 버리고 싶은 감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는 상사에 대한 불만을 적어 휴지통에 넣었고 나는 평소 스트레스를 받던 일을 적어 넣었다.

이런 것을 한다고 해서 고민이 사라질까 싶었지만 조금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고민은 해소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았다. 서점에서 나와 카페에 들어갔는데 음료를 주문하려는 손님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앞쪽에 선 남자가 누군가와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했다. 통화 상대와 싸우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전화를 끊은 뒤 씩씩대며 주문을 했다. 음료가 나오자 남자는 직원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직원이 주문을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직원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한 뒤 다시 음료를 내왔지만 그는 마치 직원이 실수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더욱 심하게 화를 냈다. 그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음료를 내버려둔 채로 카페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직원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끝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낯선 남자의 감정 휴지통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는 내 감정도 한참 동안 오르락내리락했다. "사람의 감정에는 일방통행이 없다." 서로서로 기대어 사는 거다.


서로서로 기대고 산다는 것/송정림

거리에는
일방통행길이 있지만

사람의 감정에는
일방통행이 없다.

내가 좋아하면
당신도 나를 좋아하고

내가 미워하면
당신도 나를 미워한다.

그가 슬프면
내 마음에도 슬픔이 번지고

그가 웃으면
내 마음에도 기쁨이 퍼집니다.

서로서로 기대고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연이겠지요.


3
인문 운동가는 '관점 디자이너'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내 쪽에서 바라보는 시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그때 자기 모멸의 감정이 일어난다. 이는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자신만의 좁은 선입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 인문 운동가는 사건에 대해 나의 반응을 대응으로 바꾸는 관점 디자이너이다. 생각을 바꿔 주고, 생각을 디자인해준다. 디자인은 개념과 실행 혹은 실천의 틈에서 자란다. 난 틈, 영어로 갭(gap)을 좋아한다. 거기서 소통이 시작되며, 그 틈을 채우려는 노력이 멋진 삶일 게다. 의지와 행동 사이에 ‘생각의 틈’이 있고, 개념과 제작 사이에 ‘디자인의 틈’이 있고, 꿈과 현실 사이에  ‘플랜의 틈 ’이 있다.  하늘에선 뚝 떨어진 현실이란 없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자에겐 ‘우연'이란 위안이 존재할 뿐이다. 틈은 헐거움이고, 낡음의 편안함, 헌 것의 소중함, 헐거워 짐의 평화가 된다.

자신을 관점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박용후라는 분의 글을 읽었다. 요즈음 내가 하는 고민과 같다. "인공지능(AI)이 우리 삶을 압도적인 속도로 바꾸고 있다. 숫자를 계산하고 정보를 분석하며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은 이미 인간의 범위를 넘어섰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고유한 힘은 무엇일까. 기계가 흉내 내기 어려운, 인간이 놓치지 말아야 할 영역은 어디일까. 그 답은 마음과 감성,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감각의 자본 화에 있다"

최근에 우리 사회의 공공 기관 직원들에게서 느낀다. 정성껏 질문을 들어주고 불편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등 말투와 태도에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남은 건 단순한 ‘문제 해결'의 만족감이 아니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존중해줬다는 따뜻한 기억이다. 이는 AI가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학습해도 완벽히 구현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친절한 말투'를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진심 어린 감정의 온기를 불어넣는 건 인간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식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식사의 즐거움은 혀 끝의 자극만이 아니다. 불 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 고소한 냄새, 친구들과 함께하는 분위기 같은 총체적 감각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인간은 단순한 ‘기능적 대체’에 만족하지 않는다. 감각의 결핍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 나는 늘 "식탁은 사랑을 타고 온다"는 말을 기억한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기능이라면 동네 식당도 충분하다. 하지만 파인 다이닝이 주는 가치는 음식의 맛을 넘어 조명, 음악, 서비스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감각적 경험이다. 고객이 지불하는 돈은 단순한 식사 비용이 아니라 ‘감각의 가치’ 이다. 패션, 음악, 디자인, 서비스 산업이 모두 이 원리를 따른다. AI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감각적이고 정서적 경험을 설계하는 분야는 더 큰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앞으로 기업과 개인이 마주해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사람들의 감각과 감성을 어떻게 자본 화할 것인가.” 기능적 효율성만 추구한다면 결국 AI가 대체한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과 감성적 울림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빛나는 가치다. 더 나아가 '감각 자본'은 개인을 넘어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 경험으로 확장할 수 있다. 디지털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고 고립을 심화 시킬 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함께하는 경험’을 갈망한다. 결국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 사이의 감정적 유대와 배려의 가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단순히 기능에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느끼고 감동하는 존재다. AI 시대에 살아남는 힘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에 달려 있다. 이제 인간 다움은 곧 가장 귀하고 값비싼 자산이다. 기능의 시대를 넘어 감각의 시대가 온다. 이것이 우리가 맞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일상적 사색을 콘텐츠로 풀어내는 서비스 ‘롱블랙(LongBlack)’을 만든 임미진 대표는 “감각을 자본으로 본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산업화 시대의 자본이 땅과 노동, 자본금 같은 물질적 요소였다면 정보화 시대에는 데이터와 네트워크가 새로운 자본이 됐다. 이제 AI 시대에 들어서면 감각과 감성이야 말로 가장 희소한 자산이 된다. 기술은 무한히 진화할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각적 경험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감각 자본'은 예술이나 럭셔리 산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의료 현장에서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약물만이 아니라 의료진의 따뜻한 말 한마디다. 교육에서도 지식 전달은 AI가 대신할 수 있지만 학생의 불안을 달래고 자신감을 북돋는 일은 교사의 몫이다. 금융 서비스 역시 단순한 문제 해결을 넘어 인간적 배려를 통해 고객 충성도를 높인다. 결국 감성의 차별화가 곧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4
매일 문학 작품을 조금이라도 읽기로 다짐했다. 어제도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라는 단편 소설을 읽었다. 거기서 만난 문장이다. "그때 윗도리만 입은 채 방안에서 버둥거렸던 어머니는 잡을 손이 없어 가위를 쥐었다. 창밖으로는 어디론 가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는 가위로 방바닥을 내리 찍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주었다."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나는 외로워졌다. 세상은 조용했고 햇빛은 헤어진 애인이 보내온 예의 바른 편지처럼 여전히 저쪽 방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예의 바름, 그것은 태어나 내가 세상에 대해 느낀 최초의 불쾌(불쾌) 였다. 나는 주머니가 없어 주먹을 쥐었다." 내 마음은 속상한데, 햇빛이 아무렇지 않게 비출 때 우리는 불쾌하다. 그리고 우리가 주먹을 쥐는 것은 손을 주머니에 감추지 않으려는 마음인가?

문학 작품을 읽으면 어휘도 는다. 표현 능력도 좋아진다. "갈 곳도 없고 며칠만 있을 요량이었다." 요즈음은 구글에 물어보면, AI가 잘 정리해준다. 이런 식이다. "요량(料量)'은 앞일을 잘 헤아려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령껏 하다'는 '생각한 대로 하다' 또는 '헤아린 대로 하다'와 같이 사용되며, '요량이 있다'는 '생각이 있다' 또는 '계산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어머니는 나를 농담으로 키웠다. 어머니는 우울에 빠진 내 뒷덜미를 재치의 두 손가락을 이용해 가뿐히 잡아 올리곤 했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의 삶을 과격하게 두 갈래로 보자면 "웃고 싶어서 울던 시절", 그리고 "울고 싶어서 웃던 시절"(송지현)로 나눠볼 수 있다. 농담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있다. 눈물이 흐르더라도 동시에 웃을 수도 있다. 슬픔을 지우지 않고 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5
오늘의 말씀은 <루카 복음> 8,16-18: 등불의 비유 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서로/상지종 신부님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믿음이
믿으니
믿음이요

믿음을
믿으니
믿음이니

믿음이
믿음에게

믿음을
믿음에게

믿음이
믿음입니다

희망이
희망하니
희망이요

희망을
희망하니
희망이니

희망이
희망에게

희망을
희망에게

희망이
희망입니다

사랑이
사랑하니
사랑이요

사랑을
사랑하니
사랑이니

사랑이
사랑에게

사랑을
사랑에게

사랑이
사랑입니다

기쁨이
기뻐하니
기쁨이요

기쁨을
기뻐하니
기쁨이니

기쁨이
기쁨에게

기쁨을
기쁨에게

기쁨이
기쁨입니다

살림이
살리니
살림이요

살림을
살리니
살림이니

살림이
살림에게

살림을
살림에게

살림이
살림입니다

나를 숨기지 말자는 거다. 인문학 적 용어로 '자기 기만'을 하지 말라는 거다. 그러면 허영(허영) 또는 허세에 복종한다. 거짓이 문제이다. 거짓이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작은 거짓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작은 거짓들이 보태 진다. 그 다음에는 그런 거짓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생각의 흐름을 왜곡한다. 그 왜곡된 생각의 결과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이 동원된다. 필요할 때마다 거짓을 행하면서 거짓은 이제 습관이 된다. 거짓이 '무의식적인' 믿음과 행동으로 굳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우리는 이를 '자기 기만'이라 한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이다. 양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무의식 중에 행하거나 의식하면서 강행하는 경우이다. 자기 기만을 피하는 길이 그저 잠시 앉아 살피는 일인데도, 우리는 떠밀려 살아온 관성을 제어할 용기를 못 낸다. 

기만이라는 덫에 걸리는 사냥감은 대개 탐욕일 경우가 많다. 나의 탐욕과 집단의 탐욕을 바라보고, 해체하고, 인정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새우가 껍질을 벗고 성장하는 시간처럼 인간도 진정한 어른으로 탈피하는 시간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거짓이 성공을 거두면 그 후에는 교만과 우월 의식이 따라온다. 사실 거짓으로 이룬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 서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모두 속임수에 넘어간 것처럼 보이면 '나를 제외하고 모두 멍청하다'라는 교만과 우월 의식에 빠지게 된다. '모두 어리석어서 나에게 속아 넘어간다. 따라서 나는 원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나중에 닥친다. 거짓으로 개인과 현실, 혹은 사회와 현실 간의 관계가 무너질 때 지옥이 찾아온다. 그러니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진실은 삶의 깊고 깊은 원천에서 끊임없이 샘 솟는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필연적인 비극에 맞닥뜨리더라도 영혼이 위축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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