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의 슬픈 이야기 (2)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9월 21일)
어제는 문제의 그 섯알오름을 방문하고, 동생 가족을 만나, 가져간 와인 3병을 정원에서 다 마셨다. 그리고 오늘 아침 비행기로 대전에 왔다. 집에 도착하자, 수녀 누님이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셨다. 추석의 순수한 우리 말은 '한가위'이다. '한가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우리의 큰 명절로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내는 날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속담 중에 "일년 열 두 달 삼백육시오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추석의 순 우리 말, '한가위'에서 '가위'는 '가운데'를 의미한다. 음력 8월의 한 가운데, 혹은 가을의 한가운데인 8월 15일을 나타낸다. '한'은 '크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 혹은 가을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다. 추석(秋夕)은 말 그대로 하면 '가을의 저녁'이다. 추석을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이라고도 한다. 한가위날, 즉 음력 8월 15일에 뜨는 달이 가장 크고 밝다고 한다. 태양과 달리 달은 오래 전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태양은 항상 둥근 형태를 유지하지만, 달은 한 번 둥근 형태를 보여주고 전기나 촛불이 없었던 고대에는 둥근 달이 유일하게 빛이 되어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일년 중 가장 밝고 큰 음력 8월 15일은 고대부터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어 자연스럽게 명절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오늘 공유하는 사진이 동네 초등학교 운동자에서 찍은 보름달이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한가위 명절에 달이 보름달인 이유는 더 이상 자신만만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살펴보고 소멸시키라는 시기이다. 보름달은 자신이 이제 초승달을 향해 자신을 변신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 보름달의 충만한 원을 유지하려 하는 오만함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만은 세상의 심판자인 시간을 거슬리겠다는 몸부림이며, 시간을 멈춰 영생하겠다는 망상이기 때문이다.
한가위의 보름달은, 우리 인간에게 이제 덜어 낼 준비를 시키는 때이다. 덜어내는 행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덜어내야 다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걷어 내야 한다. 덜어내는 행위 없이, 새롭고 참신한 시작은 없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맨 처음에,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라는 종속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창조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잘 못 번역한 것이다. '창조하다'는 전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가 되었지만, 히브리어로 '바라'라는 말은 '덜고 덜어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들다'란 의미라 한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창조는 자신의 삶에서 쓸데 없는 것,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지혜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에 의존하는 부실한 것을 걷어내거나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의미는 "처음에, 신이 혼돈으로 가득한 하늘과 땅에서 쓸데없는 것을 걷어 내기 시작했을 때"란 의미이다.
꿈같던 2박 3일의 제주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바다 구경 실컷 했다. 그 그리움을 달래려고, 오늘도 이생진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2/이생진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날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 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 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 버린다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서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 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을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내 버리고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 가듯
넓은 바다도 물 속으로 밤을 피해 간다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 가운데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수는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서
서로가 떨어질 수 없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 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 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꽃이여, 동백꽃이여
지금 꽃으로 살아 있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슴이 산을 떠나면 무섭고
꽃이 나무를 떠나면 서글픈데
물이여, 너 물을 떠나면 또 무엇을 하느냐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하지 않지만
어제 못다한 제주 4,3 사건의 슬픈 이야기 좀 더 이어간다. 사건의 도화선이었던 3.1절 발포사건 갈등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표출됐다. 소위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오후 2시 45분께 제주읍 관덕정(觀德亭) 앞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이날 기념행사를 구경하고 있던 주민들을 향한 미군정 경찰의 총성이었다. 경찰의 총탄에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기를 업은 여성과 학생들이 등 뒤에서 날아 온 총탄에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죽어갔다.
경찰은 왜 무고한 이들의 등을 향해 발포했을까? 해방 후 두 번째 맞는 3.1절 기념행사를 서울은 좌익과 우익이 서로 나눠 진행했다.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은 남산공원에서 ‘3.1절 기념 시민 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했고, 우익진영은 ‘기미선언 전국 대회’라는 이름으로 서울운동장에서 열었다. 제주에서는 서울처럼 두 개로 나누지 않고 좌익진영의 제주 민전이 주최하는 하나의 행사로 치러졌다. 진정한 자주독립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주민 3만 여명이 제주 북국민학교에 모였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두 개로 쪼개질 위기와 그것으로 인한 전쟁 발발을 걱정하는 3만 여명은 “3.1정신으로 통일 독립을 전취(戰取)하자”고 외쳤다.
제주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제주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다.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안무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 개씩 짜 놓았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남사록』에 의해 밝혀졌으며, 지붕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처마 부분을 많이 잘라냈다. 제주 관덕정은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건물 안쪽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 관덕정 뒤편에 위치한 북국민학교에 모인 군중들은 오후 2시 행사가 끝나자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때 행사 구경에 나온 어린아이가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어 다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는 기마대에 화가 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날의 죽음은 항의에 대한 과도한 대가였다. 경찰은 발포로 끝내지 않았다. 3.1절 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민심이 들끓었다.
이어 3월 10일부터 22일까지 제주도청을 시발로 민·관 총파업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시장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3.1절 발포에 항의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당시 미군정 경무부장인 조병옥을 앞세워 강경대응에 나섰다.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민전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해 이듬해 4.3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을 검속했다. 특히 미군정이 끌어들인 ‘서북청년회(서청)’와 응원경찰대의 횡포와 만행으로 민심은 더 흉흉해 졌다. 서청과 경찰은 좌익척결이라는 명분으로 무수히 많은 학생들과 농민들을 혹독한 고문으로 죽게 했고,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폭력은 법 위에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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