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중심에만 있으려 하면 안 된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22일)
한 사람의 '격(格)', 한 국가의 '격'은 어제 <인문 일지>에서 말했던 '타자 되기'와 '환대'가 일상에서 일어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선은 중용(中庸)이고, 악은 모자람과 과함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품격의 원칙은 중용을 지키는 것이라 했다. 그 반대가 중용이 부족하거나 과도한 상태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무절제'라고 했다. 예를 들어 용기는 무모(無謀)와 비겁(卑怯)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의 중간쯤 어디이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가운데이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문제는 중용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중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는 점이다. 왜 유혹에 빠지냐 하면, 자신의 보 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 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속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와 우 같은 명칭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무절제를 이탈리어로 '인콘티넨차(incontinenza)'라 불렀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요실금'이다. 인간이 자신의 정신을 다듬지 못하고 영혼을 돌보지 않으면 요실금처럼 품격을 망치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현대인들은 성적인 방종, 과도한 음식 섭취, 쇼핑중독, 과도한 분풀이 그리고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과 외모 지상주의라는 요실금에 걸려 있다. 길에서 만나는 예쁜 사람을 실제로 직접 만나 이야기 해보면, 다 예쁜 사람이 아니다. 예쁜 얼굴에 맞지 않는 못생긴 말솜씨,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생각, 예쁜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습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예쁜 것에는 예쁜 것이 어울려야 한다. 그걸 조화라고 한다. 조화를 이루어야 진짜 예쁜 것이다. 그러니 겉모습이 다는 아니다.
어제 내 담벼락에 올린 <인문 산책>이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었다. 프랑스인들은 칭찬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잘 한 일은 누군가의 인정 없이도 스스로 기분 좋아질 일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의 내면의 기쁨을 찾아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위대한 개인'이 되도록 교육 받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인'이 '위대한 사회'를 만든다.
목수정이 자신의 담벼락에서 말한 "국격" 이야기가 뜨끔하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이 드러낸, 우리 사회의 살인적 계급질서의 잔인한 현실과 돈에 목숨을 거는 일에 대해선 들여 다 볼 생각이 없고, 오직 해당 영상물의 성공과, 그것이 받은 '상'에 대해 우리는 열광할 뿐이라는 거다. 게다가 '실력 없는 기레기' 기자들이 쏟아내는 글들을 보면, 모두들 소위 '선진국'이러고 부르는 일부 나라들이 "니들 잘했어"하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칭찬했다는 말들만 전해준다. 그러면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갔다고 어께 으쓱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내 삶의 격이나 질은 별 관심 없고, 남이 내게 건넬 칭찬과 시선만이 한없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를 잘 들여 다 보자. 우리 사회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국격'이 떨어진다는 기사들이 난무하고, 더 기가 막힌 것은 기업이 피해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노동3권'이란 근본적 권리를 무시하는 나라이다. 나라가 부도났는데, 고위 관료들은 그 난리통에 서로 작당해서 국책은행을 외국에 헐 값에 팔아 넘기고, '콩고물'을 주워 먹는 사회이다. 그 뿐인가?
주변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살인적인 학원 시스템 속에 넣고 굴리며, 조국 내외와 한동훈 집안처럼, 할 수만 있다면, '애들을 위해' 이런 저런 스펙을 제조하는 데 서슴없이 동참한다. 사회에 내보일 그럴싸한 허울 스펙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목수정의 말처럼, "다만 김거니처럼 온 몸을 다 던지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고 김거니가 우리 사회에서 그닥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내 주변의 몇몇처럼, "그 나름으론, 밑바닥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갔기에, 그 모든 과정들이 세인의 입에 오를 뿐, 그 전에 멈췄다면, 여전히 잘 나가는 미술계의 CEO 소리 들으며 별탈 없이 살았을 거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 한다. 그를 부러워 하고 흉내를 낸다.
배철현 교수는 언젠가 자신의 <묵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란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한 가지를 찾았거나 찾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성공의 방해꾼을 그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보았다.
첫 번째가 부러움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렴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을 우주 안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남을 부러워 한다. 반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남을 부러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기준을 스스로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인 양 착각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이 고유한 것인 줄 알고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런 사람을 배 교수는 "무식(無識)한 사람"이라 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위한 최선을 모르는 채 어영부영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남을 부러워하는 삶, 남이 소유한 것을 나도 갖고자 하는 삶, 남이 말하는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두 번째가 흉내이다. 흉내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김거니의 흉내는 국보급이다. 부러움은 정신적인 활동이라면, 흉내는 육체적인 활동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때 독창적이며 매력적이다. 반면 흉내를 내는 사람은 진부(陳腐)하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흉내를 내며 살아간다.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고유한 선율을 연주해보지만 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협화음으로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고유함에는 진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있는 진정성과 공명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름다운 선율로 변화한다. 배 교수는 "흉내가 자신의 고유함을 포기하려는 자살행위"라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국격'은 각 개인이 간절히 지니고자 하는 간판, 허울 등의 집단적 욕망이 국가라는 단위에 투영된 것이다. 대접 받고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이다.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가 내가 실제로 어떠한 지 보다 중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이기도 하다. 그래 정말 지금 우리 사회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인문학의 결과물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문제 의식을 보편의 높이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삶을 철학(지혜를 사랑하는 것)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너무 많이 소유하여 편안해 지면 방심(放心)하게 된다. 방심하면 안주하고 방탕 해진다. 반면 시련이나 위기는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더욱 옹골찬 인간으로 빚어진다. 가을 들판 열매들이 옹골차다. 도자기도 마찬가지이다. 도자기도 수천도의 온도를 견디고 나서야 좋은 것이 된다. 꽃도 마찬가지이다. 온실 속 화초보다 온갖 위험 속에 자란 야생초가 더 강인하고 생명력이 질기다.
그리고 너무 중심에만 있으려 하면 안 된다. 중앙은 퇴행하게 마련이며, 변방에 있던 세력이 다시 중심부를 장악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토인비는 말했다. 신영복 교수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변방인, 주변인을 강조했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 창조,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중심부에 있는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면, 변방에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중심으로 가려고 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방에 있다면 오히려 기회이다.
인문학은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밥을 주지 못해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힘을 지니고 있다. 구체적인 기능에 갇히면, '신뢰'를 좋은 말이라고 여기기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직은 아닌 것 혹은 귀찮은 것 또는 현실적인 효율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사유의 시선이 높으면, 효용(效用)이 없어 보이는 것의 효용을 안다. 이것을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한다. 탁월한 시선을 가진 사람은 '쓸모 없음의 쓸모'를 본다.
이 시를 소개한 <매일경제> 허연 기자의 덧붙임도 함께 공유한다. "사람도 식물처럼 정해진 장소에 갇혀 살아간다. 식물이 화분을 닮듯이, 사람도 살아온 배경의 지배를 받는다. 가끔 분 갈이하기 위해 식물을 꺼내 보면 화분 모양으로 뭉쳐진 뿌리들을 만나게 된다. 식물의 숙명이 느껴진다. (…)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평생 화분에 갇혀 사는 게 숙명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화분을 벗어나 바람부는 대로 어디든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이루지 못할 꿈일지라도 말이다." 오늘 사진처럼 말이다. 우리 동네 현대 아울렛에서 찍은 거다.
분 갈이/김애리사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가지들
자꾸만 작아져 가던
당신의 팔과 다리를 닮았다
분 갈이 하기 위해 나무를 뽑았다
둥근 화분 모양으로 가늘게
갇혀 있던 뿌리들
어떤 화분으로도 옮겨 심지 못했다
당신을 풍장하고 돌아오는 날처럼 기도했다
바람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라고
갇혀 지내지 말라고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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