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그것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21. 17:44

345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20일)

1
아침에 일어나 만난 문장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그것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였다. 이 말은  <<빈 화분>> (데미 지음, 서애경 옮김, 2006)이라는 책을 소개한 글에서 였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공손히 묻는다. 올바르지 않은 쪽이 더 이득이 될 때가 많고, 세상 사람들은 올바름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생기는 평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 냐고. 여기에 답하느라 소크라테스는 굽이굽이 대화의 길을 돌아 후대 인류에게 벽돌책을 선사한다. 내 뱃살보다 두꺼운 이 벽돌책이 부담스럽다면 중국 옛이야기에 아름다운 동양풍 그림을 더해 만든 은은한 그림책 <<빈 화분>>이 어떨까? 이 제안에 이 그림책이 궁금했다. 

내일 오후 도서관에서 빌려 볼 생각이다. 내용은 이런 것이라 했다. 임금님이 나라 안의 모든 어린이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고, 한해 동안 가장 잘 가꾼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꽃을 무척 사랑하는 핑은 씨앗을 화분에 심고 온갖 정성을 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싹이 돋아나지 않았다. 이듬해 봄이 되어 온 나라의 아이들이 예쁜 꽃 화분을 안고 궁궐로 갔지만 핑은 빈 화분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부끄러웠고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임금님은 뜻밖의 사실을 말한다. 나눠 준 씨앗은 모두 익힌 씨앗이라 싹이 날 리가 없다고. “빈 화분에 진실을 담아 내 앞에 나타난 핑의 용기는 높이 살 만하다. 이 아이를 왕으로 삼으리라.” 핑은 마음을 비우고 빈 화분을 가져갔던 것이다. 그 안에 정성과 진실, 그리고 용기를 담았다. 빈 화분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찬 화분이었던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욕심과 거짓을 담은 화려한 화분을 가져갔다. 실은 껍데기만 요란한 빈 화분이었다. 정직하게 살아왔지만 정작 남은 게 없어 빈 화분 같은 내 인생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당신의 화분은 빈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떳떳하고 당당한 삶보다 가치 있는 게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건,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혼이 노예 상태에 있지 않은 삶"이라 했다.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얻어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삶이라 해도, 가슴에 심은 거짓의 씨앗에서 평생 불안이 무럭무럭 자라고 수치가 꽃을 피우는 삶이 녹록할 리 없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빈 화분에 실망한 핑에게 아버지가 건네는 말이다. “정성을 다했으니 됐다.” 나만 호구 잡히는 것 같고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쁜 마음 먹지 않고 정성을 다했다면 됐다. 텅 빈 화분보다 더 실망스럽고 더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박완서 선생은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윤동주 시인을 강사로 모시는 상상을 해본다. 그게 가르쳐서 될 일이면 좋겠다. 

건강한 사회는 부끄러움(恥)을 아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진실되지 못한 일부 정치인, 종교인 그리고 언론이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아는, 즉 ‘염치'가 실종된 '후안 무치'의 시대다. 어떤 악행과 실행보다도 번연히 제가 저지른 일 앞에서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더욱 놀랍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랍다.​ 후안무치한 뻔뻔함으로 억지와 궤변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언론에 너무 많이 등장한다. 억지는 무식하게 '똥 고집'을 부리는 것이고, 궤변은 '제법 유식하게 말의 뜻을 바꾸거나, 사실의 의미를 바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며, 진실을 오도하거나 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속이 뻔히 다 보이는데도 거짓말을 하며, 잡아떼는 뻔뻔함으로 억지와 궤변을 늘어 놓는다. 그리고 뻔뻔한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고 그래서 늘 당당한 척 한다. 창피함을 모른다. 이것도 뻔뻔함의 또 다른 특징이다. 우리는 누가 그런지 다 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로 작정 한 사람들이다. 이건 수치심, 아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뻔뻔함이다. 거짓의 탈을 쓴 후안무치들이 판을 친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돈으로 매수한 듯'한 '기레기'들의 거짓 뉴스가, 그리고 자극적인 뉴스로 장사치처럼 자신의 기사를 팔아먹기에 혈안이 된 거지 같은 기사와 한 자리 혹시 얻을까 흑심을 품은 일부 어용 지식인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칼럼 등 역겹다. 

2
좀 따뜻한 소설을 한 권 소개한다. 김애란, <<달려라 아비>> 이다.

 

"사랑이란 어쩌면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 모른다" 문장에 눈이 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학을 너무 읽지 않는다. 따뜻한 마음과 마음의 휴식을 가지려면,  문학을 접해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이 우리들의 삶의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 하나가 우리들의 삶의 촉매가 되어 일상이 확장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개인적 경험이지만 타인과 온전히 한 순간을 공유하기도 한다. 문학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한다"(앙드레 지드). 그러나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추문을 퍼트림으로써 이 비정한 세계의 가혹한 현실을 폭로하고 선의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든다" (김병욱). 문학은 그 '쓸데 없음'이 마련해준 자유를 통해 실용주의에 매인 욕망에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그 실용성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김현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문학의 효율성은 그 쓸모를 거부하는 데서 얻는 자유와 해방의 귀중함에 있음을 말하였다.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의 소설을 읽어야 겠다. 그 소설에 내 눈에 꽂히는 문장을 찾아 사유해 볼 생각이다. 

오늘 읽은 소설의 첫 문장이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이다. 그 가로등은 이렇게 묘사된다. "길게 내민 모가지와 구부정한 어깨를 가지고. 아프리카 평원에 최초로 직립하게 된 유인원처럼-고독하게." 그 후, 나는 내 동네의 골목길들에 있는 가로등에 눈길이 갔다.

"그[가로등]은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해가 지는 시간과 달이 기우는 각도, 오랫동안 전해오는 사소함으로 불러보는 이름들과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하는 이야기,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샌드패블즈의 노래 [<나 어떡해>]에 대해서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사소함으로 불러보는 이름"은 바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가 소환된다. 


즐거운 편지/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물론 그[가로등]이 할 수 있는 일은 꺼졌다, 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그것이 가끔은 어떤 기적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나는 그가 꺼졌다 켜지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김애란의 소설을 생각하면 가로등이 생각난다. 깜빡거리며 조용히 거리를 내려다보는 가로등은 우리를 억압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오늘 저녁 그 겸손한 가로등에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올 것이다.


3
매일 쓰는 <인문 일지>가 책으로 만들면, 그 제목을 <<세계의 두께>>라고 할 생각이다. '두께'의 비슷한 말이 '두툼'이다.  반대 말은 '납작'이다.기계로 사는 게 편안해지자, 우리의 정신 세계는 더 납작해졌다. 오늘 아침 <<납작한 말들>>이란 책을 e-북으로 구입했다. 책 표지의 부제가 눈에 훅 들어온다. "차별에서 고통까지, '어쩌라고'가 삼킨 것들" 이다. "어쩌라고?" "어쩌자는 거니?" 예를 들어 불평등 이야기를 하면, "환경 탓이나 하는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 당한다. 더한 사람은 '그럼 북한 가서 살아라'고 말한다는 거다. 다음 통계를 보자.

아래 도표는 OECD회원국들의 상대적 빈곤율을 나타내는 도표다. 상대적 빈곤율이란 각국 평균 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정의 비율을 의미한다. 한국은 17.4%로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미국이다. 상대적 빈곤율은 따라서 불평등지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은 심각하게 불평등한 나라이건만, 우린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조차하지 않는 분위기다.  

2020년에 나온 이 도표에서 프랑스는 8.1%를 나타내고 있다. 이 수치는 1년 전에 비해 1.5% 상승했고, 최근엔 더 올라가 8.5%에 이르렀다.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고통스럽게 느낀다. 불평등이 심화된 상황, 즉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고, 평범한 사람들은 더 살기 힘들어진 이 상황에 맞서,  정부로 하여금 정책 방향을 수정하라 요구하는 것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프랑스 집회가 전한 메시지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2017년 집권 즉시, 부유세를 폐지했고, 금융 소득의 과세율을 단일화 시켜 고소득 금융소득자에게 특혜를 안겼다. 법인세도 대폭 인하했다. 노골적으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시행했고, 당연히 세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줄어든 세수를 복지를 축소하고, 공공 부문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채우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출혈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재정 적자는 언제나 있었지만, 그 폭이 크게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대한민국 언론들은 프랑스가 복지를 너무 많이 해서 힘든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도하며 프랑스처럼 되기 전에 퍼주기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얘기를 퍼뜨리고 있다.  어이가 없다.  대한민국이 프랑스 사례를 보면서 각성해야 할 대목은 공공 영역을 확대하고, 복지를 늘여 불평등을 줄여가는 것이다. 마크롱이 집권한 후 시행했던 모든 짓이 공공 부문의 축소, 긴축이었다. 부자에게만 특혜를 베풀며 불평등을 조장하는 정책이 문제를 야기했고 이제 한계에 달했다. 문제는 집회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더 가속화될 수 있을지 여부다. 늘 프랑스 소식을 전하는 목수정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얻어온 생각이다.

다시 <오찬호의 <<납작한 말들>>이란 책 이야기로 되돌아 온다. 이 책의 프롤로그 제목도 심상치 않다. "살아남기 위해 잃어버리는 것들". 사실 우리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 그래 아침마다 <인문 일지>를 쓴다. 그러다 이 책을 알게 되었다. 다음 주말(9월 27일 토요일, 지명훈 기자의 책방(<오래된 질문>, 공주시 대통 1길 56-6)에 갈 생각이다.

저자가 예를 드는 "살아남기 위해 잃어 버린" "소실"들이 다 내 이야기 같다. 
▪ 자기 계발 열심히 할수록, 타인에게 날카로워지는 모습은 인간성의 "소실": 학력 차별 비판에, 공부 못해서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면서 무섭게 반박하는 모습은 여기서 발현된다.
▪ 부자가 되고 싶은 강박에 빠질수록,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건 다 이유가 있다고 말하게 되는 건 사회 구조를 바라보는 눈의 "소실": 빈부 격차 지적에, 자본주의 사회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당당한 반론은 이런 공기에서 완성된다. 

더 큰 문제는 이 "소실"을 굳이 걱정해야 하냐는 분위기이다. 그저 "몰라, 나는 돈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양반이라 한다. 언젠가부터 "그거 한다고 돈 생겨?"라는 냉소가 태연해지 더니 이제는 "돈도 안 되는 걸 붙들고 있는 사람이 바보"라는 조롱이 만연해졌다는 거다. 

실제로 내가 <인문 일지> 정치나 사회 문제 등 불편한 주제를 쓰면 싫어하고 외면한다. 사실은 불편이 우리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고, 그 불편을 해소 하는 것이 삶인데 말이다. 그 때 우린 성장하는데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목표를 선명히 설정하고 그 것 만을 향해 되돌아보지 않고 달려야만 하는 사회에서, "답 너머 답"을 찾자는 말은 "판타지 소설"처럼 들릴 거다. 느린 호흡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색은 뒤처짐에 불과하다고 본다. 독서와 토론으로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발을 딛는 것은 "헛발질"이라고 여긴다. 이견을 경청하고 의견을 제시하기 위한 장시간의 고뇌는 "시간 낭비"로 본다.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따져 묻는 건 당연한 시민의 모습이다. 사회와 연결되지 않으면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 자영업 종사자들의 직업적 고충을 불평등과 연결시켜서 말하면, "[그런 일을 우가 하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는 빈정거리지 말아야 한다. 아파트 공화국의 민 낯을 비판하면, "너 집 없지?"라는 무례한 추임새는 사라져야 한다.

4
"권리 밖 노동자"가 없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오요안나 죽음 1주기라는데, 난 그녀를 몰랐다. 이게 세상이다. 그래 오늘 알아보았다.
“저 어차피 살아도 그만이고,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입니다. 안나 때문에 살았고, 안나 때문에 죽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제 인생의 목표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에….” 눈물이 흥건하게 번진 얼굴로 오요안나 어머니 장연미씨가 말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MBC) 사옥 앞, 오요안나 1주기 추모문화제 자리였다. 장씨의 딸 요안나씨는 꿈꾸던 방송사의 기상캐스터 공채에 뽑혔으나 프리랜서 계약을 해야 했고, 취약한 처지에서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고용노동부는 괴롭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프리랜서라 근로기준법을 적용 받지 않기 때문에’ 법적 조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법률지원단체들에 따르면 문화방송은 요안나씨의 출퇴근과 업무 등을 엄격히 관리했으면서도, 여전히 ‘사실상 근로자였음’을 부인한다. ‘동료 기상캐스터들이라도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는 장씨의 요구도 외면했다. 장씨는 추모제에서 “정의를 부르짖고 정의를 말하는, 이 훌륭한 문화방송 엠비시에서 … 한 사람마다 다 소중한 우주들인데, 그 우주들을 함부로 버리고, 죽어도 신경 안 쓰고,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 울부짖었다.

‘살아도 그만이고 안 살아도 그만인’ 어머니는 또 있다.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2018년 사고로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였다. 그는 단식농성 중인 장씨를 위로하러 추모제에 나왔다. 하청업체 노동자였던 용균씨는 2인1조로 하게 돼 있는 석탄 컨베이어벨트 점검을 혼자 하다 기계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위험의 외주화’를 위해 하청을 주고, 비용을 아끼려 두명 쓸 자리에 한명만 쓴 기업이 초래한 죽음이었다. 애지중지 키운 외동아들을 잃은 김씨는 투사가 됐다.

실제로는 회사의 통제를 받으며 정규직과 다름없이 일하지만, 법적으론 프리랜서, 특수고용, 업무위탁 사업자가 되는 일이 많다. 노동법이 적용되면 돈도 많이 들고, 이것저것 지켜야 되는 것들이 많아지니까, 회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일을 시키는 상대방이 노동법에 적용이 안 되게끔 만들려 한다. 이렇게 취약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은 임금 등 처우에서 차별받고, 언제 일이 끊길지 몰라 불안에 시달리고, 가장 위험한 업무에 내몰려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고용주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민간 기업은 물론 공기업, 언론사, 대학도 사실상 ‘상시적 일자리’까지 비정규직, 프리랜서 등의 값싼 노동으로 메우는 일이 많다. 진실과 정의를 말하는 언론사, 진리와 인권을 가르치는 대학까지 불안정 노동자의 한숨과 고통을 연료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직원을 부품처럼 갈아 끼우면 경험과 지식도 축적되지 않는다. 다 같이 신명 나게 일해 생산성이 쑥쑥 오르도록, ‘모든 노동자를 합당하게 대우하는 일터’를 만드는 게 옳지 않은가?

5
오늘 말씀은 <루카 복음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다.  그때에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이 되어갑니다/상지종 신부님

나를
사랑하시는
님께서
정성스럽게
뿌려주신
내 품의
작고 여린
사랑의 씨앗

잿빛 미움이
앗아가지 못하게

홀로 살 길이
버리지 못하게

헛된 탐욕이
짓밟지 못하게

내가
사랑이
되어갑니다

더디더라도
쉼 없이

오롯이
사랑일 때까지

말씀은 씨앗이다. 그래 매일 오늘의 복음 말씀을 잘 듣는다. 그 말씀들이 내 안에서 잘 컸으면 한다.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주님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도록 내가 "좋은 땅"이 되는 거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건 주님이 보여 주신 사랑이 늘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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