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중위연령이 높아지면 혁신과 유연성, 생산성의 하락이 따라온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20. 19:56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20일)

현재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5세이다. 따라서 정년 돼도 20년 더 살아야 한다.  우리의 기대수명은 1970년 62.3세에 불과하던 것이 2020년 83.5세가 됐다. 북아메리카(77.9세)나 유럽(77.7세)보다 각각 5.6세, 5.8세 높은 수준이다. 65세 고령인구에 들어가도 최소 20년 이상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부산일보>의 김효정 기자로 부터 '중위 연령'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한 나라의 전체 인구를 연령 순서로 줄을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연령을 말한다. 인구학에서 인구 전체의 평균연령보다 중위연령을 더 의미 있게 따지는 것은, 실제 연령의 대표 값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대한민국의 중위연령은 남자 43.6세, 여자 46.5세로 평균 45세이다. 다른 말로, 대한민국의 실제 평균 나이가 45세인 셈이다.

위 도표에는 나오지 않지만,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중위연령은 31.8세로 인구 구조학에서는 황금기로 불렸다. 노동 가능 인구가 71.7%로 높았고 그에 비해 부양인구 비율은 낮아 한 세기에 한 번 오기 힘든 성장기회라는 말도 들었다. 32세의 젊은 대한민국은 변화와 혁신에 빠르게 적응했고, 실제로 세계 최고 수준의 IT기술 발전을 만들어 냈다는 거다. 그러나 2030년이면 대한민국의 중위연령은 49.8세 즉 50세에 접어들 예정이라 한다. 태어나서 50년은 살아야 어느 정도 사회에서 중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미리부터 팍팍한 삶의 여정이 예약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중위연령이 높아지면 혁신과 유연성, 생산성의 하락이 따라온다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그리 밝지만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들이 늙어 가는 대한민국에 맞는 청사진과 전략을 서둘러 고민하고 제시해야 한다. 고령화 위기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다. 새로운 정부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은 이미 1992년 중위연령이 38.5세에 접어들었고, 현재 일본은 중위연령이 50세에 육박한다. 그런 이유로 일본은 아무래도 변화에 대한 적응과 탄력이 떨어졌다는 해석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초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2018년 14.4%로 ‘고령 사회'에 들어선 데 이어 2025년 20.6%로 ‘초 고령 사회'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100세 이상도 1990년 459명에서 2020년 5581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고 이 규모도 늘어날 전망이다.

노후에 따라오는 것은 병이다. 65세 이상 고령자는 주로 암, 심장질환, 폐렴, 뇌혈관질환, 알츠하이머 등으로 죽는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치매 환자 규모는 매년 증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증가한다. 2020년 65세 이상 노인 중 추정 치매 유병률은 10.3%(60세 이상 7.2%)로 60세 이상에서는 약 86만명, 65세 이상에서는 84만명일 것으로 전망된다. 2050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의 15.9%인 약 302만명으로 증가한다. 뇌졸중은 55세 이후로 발병률이 크게 높아진다.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 조사 고령층(55~79세) 부가 조사 결과를 보면, 올해 5월 기준 고령층 인구(1509만8000명)는 처음으로 1500만명을 넘어섰다. 이들 가운데 68.5%는 장래에도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들의 평균 근로 희망 연령은 73세다. 이미 70세를 넘긴 70~74세 고령층의 경우 79세, 75~79세는 82세까지 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고령층 인구가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둔 평균 연령은 49.3세였다. 고령층 인구는 평균적으로 73세까지 일하고 싶어하지만 49세에 주된 일자리를 그만두게 된다는 의미다.

대안으로 최근에 한국일보가 제안 하는  ‘하루만보 하루 천자’ 운동에, 하나들 더 보태 세 가지를 제안한다.

(1) 만보 걷기이다.
왜 ‘하루만보 하루 천자’인가? 걷기와 쓰기는 무수한 연구를 통해 검증된 효과다. 걷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돈이 들지 않는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누구에게나 효과적이다.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다. 출, 퇴근길에 한두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걷거나 지하철, 사무실 계단을 이용해도, 짬을 내 도심, 둘레 길, 등산, 트레킹 코스 등을 이용해도 된다.

걷기는 호흡의 능률이 좋아져 산소섭취량이 늘고 다리와 허리의 근력이 늘어난다. 비만,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병 등의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하루 만 보는 성인 평균 걸음으로 하면 7㎞ 내외, 일상생활에서 5000~6000보의 걸음과 짬을 내서 3000~4000보를 걸으면 달성할 수 있다. 만 보 걷기에만 집중한다면 2시간 내외, 소모 칼로리는 400~500㎉이다.

(2) 천자 쓰기이다.
일기부터 필사, 왼손쓰기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는  뇌 감각에 자극을 준다. '만 보 걷기'가 몸이 하는 것이라면, '천 자 쓰기'는 머리와 손이 하는 일이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뇌의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훨씬 더 건강하고 원활한 뇌를 유지할 수 있다. 일기, 에세이, 소설, 필사, 왼손 쓰기(오른손잡이 기준) 등 다양한 방법을 가미하면 창의력과 기억력 등에서 효과를 볼 수 있다. 디지털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10년, 20년 안에 65세가 되는 현재의 4050에게 노후자산은 곧 건강자산이다.

웰에이징(well-aging)은 100세 시대를 맞아 ‘사람 답게 잘 늙어 가자’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저 오래 살기를 원하는 ‘장수의 시대’가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하게, 각자 나름대로 의미 있고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하자는 ‘웰에이징 시대’다. 베이비부머들이 경제성장의 주축, 원동력이 됐다면 앞으로는 웰에이징의 선두에 서서 건강한 100세 시대를 이끌어가야 한다.

(3) 하루에 시 하나를 필사 해본다. 예를 들면,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같은 시도 좋다.

두 번은 없다/비스와봐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 하며
우리 함께 일치 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이런 생각 속에서, 연휴 기간 동안, 책꽂이에서 <<나이듦 수업>>이라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중년 이후, 존엄함 인생 2막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했던 강의 내용을 모은 책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100세(호모 헌드레드) 시대에서 꼰대에서 꽃대로 살아가는 노인 문화가 필요하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노년에 대한 담론이 없거나 부족하다. 노인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오롯한 노년 '존재'로 관점을 전환하지 않으면 노년의 삶과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문화 다양성 확산이다. '다양성'이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우리가 말하는 관용(寬容)과 프랑스어의 '똘레랑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네이버의 국어사전은에 의하면, '관용'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라고 정의한다. 프랑스어로는 '똘레랑스(tolérance)'라고 한다. 그것은  ‘너그러움을 의미하는 관용’이 서로 간의 차이를 덮어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화합(和合)’을 강조하는 태도라면, 프랑스에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더 도드라지게 강조하되 서로를 인정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나는 똘레랑스의 개념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 나는 늘 이 문장을 외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단지 차이일 뿐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다르다고 '욱'할 필요 없다.

독재정권하에서 고도의 압축성장을 이룩하며 효율성과 획일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다 보니 ‘다름’이 곧 ‘틀림’으로 간주되던 당시 한국사회에서, 홍세화가 한국에 소개한 프랑스 '똘레랑스' 개념은 사람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인들이 신봉하는 가치는 ‘톨레랑스’보다는 다양성, 프랑스 말로 ‘디베르시테(diversite)’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뗄 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똘레랑스’는 어디까지나 ‘디베르시테(다양성)’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톨레랑스’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 같다. 다양한 배경과 사상과 아이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는(디베시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톨레랑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 사회를 위해서는 똘레랑스가 전제되어야 한다. 아니면 획일성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톨레랑스’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특정 사안들, 가령 나치 추종과 인종차별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앵톨레랑스(intolerance)’, 즉 불관용을 단호하게 견지한다. 즉 상위의 목표인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에는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가 촘촘해, 잘 이해를 해야 한다. '불관용(엥똘레랑스)도 단호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불관용 해야 할 것들이 여럿 있다.

다시 "나이듦 수업"으로 되 돌아 온다. 이젠 노인을 '존재'의 관점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새로운 '노년의 양식'이 마련되어야 한다. '양식'이란 말이 흥미롭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쓰인다. 사용되는 한문이 다르다.
- 양식(樣式): 일정한 모양이나 형식 또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정하여진 방식
- 양식(糧食):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사람의 먹을 거리
- 양식(良識): 뛰어난 식견이나 건전한 판단
이에 따라 노인의 존재 양식도 서로 다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 일종의 문화적 스타일(style)을 의미하는 문화적 문법으로서의 양식(樣式)
- 먹고 사는 문제로서의 양식(糧食)
- 품위 있는 삶과 사회를 위한 양식(良識)

노년의 문법이 필요하다. 노년은 수렴하고 비우는 시기이다. 그런 문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 문법을 아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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