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17. 08:53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17일)

오늘은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 추석의 순 우리 말은 '한 가위'이다. 이 '한 가위'에서 '가위'는 '가운데'를 의미한다. 음력 8월의 한 가운데, 혹은 가을의 한가운데인 8월 15일을 나타낸다. '한'은 '크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 혹은 가을의 한 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다. 추석(秋夕)은 말 그대로 하면 '가을의 저녁'이다. 그래서 우리는 추석을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올해는 추석이 좀 이르고, 지구가 병들어 아직도 무덥다. 오늘 아침 사진은 작년 추석에 찍은 거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어두움이 이번 한가위 보름달을 계기로 걷히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택했다.

한가위날, 즉 음력 8월 15일에 뜨는 달이 가장 크고 밝다고 한다. 태양과 달리 달은 오래 전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태양은 항상 둥근 형태를 유지하지만, 달은 한 번 둥근 형태를 보여주고 전기나 촛불이 없었던 고대에는 둥근 달이 유일하게 빛이 되어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일년 중 가장 밝고 큰 음력 8월 15일은 고대부터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어 자연스럽게 명절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추석의 대표음식인 송편의 원래 이름은 '오려송편'이다. '오려'란 제철보다 일찍 여무는 올벼를 뜻한다. 송편이란 이름은 떡 사이에 솔잎을 깔고 찐다는 의미로 소나무 송(松)과 떡 병(餠)을 붙여 부르던 데서 나왔다. 송편이 반달인 이유는 점점 기울어지는 보름달보다 앞으로 가득 차오를 반달을 중시한 우리 조상들의 우주관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추석에는 달도 둥글고, 과일도 둥글고, 마음도 둥글어진다.

어릴 때엔 누가 먼저 랄 것 없이 추석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곤 했다. 한가위 명절에 달이 보름달인 이유는 더 이상 자신만만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살펴보고 소멸시키라는 시기이다. 보름달은 자신이 이제 초승달을 향해 자신을 변신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보름달의 충만한 원을 유지하려 하는 오만함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이다. 여기서 오만(傲慢)은 세상의 심판자인 시간을 거슬리겠다는 몸부림이며, 시간을 멈춰 영생하겠다는 망상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원리는 균형(均衡)이다. 올라간 것은 내려오고, 내려간 것은 퉁겨져 올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가위의 보름달은, 우리 인간에게 이제 덜어 낼 준비를 시키는 때가 아닐까? 덜어내는 행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덜어내야 다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걷어 내야 한다. 덜어내는 행위 없이, 새롭고 참신한 시작은 없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맨 처음에, 신이 우주를 창조하기 시작 했을 때"라는 종속절로 시작한다. 여기서 '창조하다'라는 단어는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잘 못 번역한 것이라 한다. '창조하다'는 전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가 되었지만, 히브리어로 '바라'라는 말은 '덜고 덜어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들다'란 의미라 한다. 그러니까 창조는 자신의 삶에서 쓸데 없는 것,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지혜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에 의존하는 부실한 것을 걷어내거나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이번 긴 연휴 기간에 <<주역>>을 읽으며 새로운 시작을 위해, 쓸데 없는 것,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일을 할  생각이다. 어제 만난 귀한 분으로부터 '청소력'이라는 말을 배웠다. 마쓰다 미스히로의 <<청소력>>이라는 책이 있다고 했다. 아침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부제가 마음에 들었다. "행복한 자장(磁場)을 만드는 힘"이다. 곧 주문하여 읽고 공유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 일상에 실천할 생각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비움과 멈춤의 실전 기술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추석/유한나

하늘엔 보름달 떠도
가슴엔 쪽박 뜨는
사람 왜 없겠습니까

밤송이 툭툭 터지고
가을에 쫓긴 감
처녀 가슴처럼
부풀어 올라도
푹푹 꺼져가는
사람 왜 없겠습니다

그래도 송편 빚듯
꼭꼭 눌러 여민
곱게 빚은 마음으로
보름달 맞아야지요
한가위 잘 지내야지요.

나는 순환에 주목한다. 노자의  철학이 강조하는 무위(無爲)와 허(虛)를 강조하는 핵심적 이유는 '허'가 있어야만 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도 피의 순환에 의하여 몸이 유지되는 생명의 체계이다. 냉장고의 속도 순환의 체계이다.  사실 냉장고는 비어 있을 때만이 냉장고이다. 냉장고는 비어 있을수록 좋다.

요즈음 나의 사유를 지배하는 말이 '순환(循環)'이다. 이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세상이 병들었다. 수렴과 발산의 순환, 욕망의 재배치 등이 답이 아닐까? 왜냐하면 존재는 소유하는 것으로 정체성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방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욕망을 가지고 욕망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인데, 우리는 욕망을 어떤 특수한 영역에 몰아넣고, 욕망을 우리 삶과 분리시킨다. 우리는 욕망과 삶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다. 장자는 자유를 위해 이분법을 초월하라고 한다. 그걸 알면서도, 일상에서는 그 이분법이 크게 작동한다. 고미숙은 말한다. 이 이분법을 타파해야, 우리가 욕망과 함께 욕망을 데리고 살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그러면서 고미숙은 욕망을 에로스로 표현하며, 욕망의 현장이 곧 생명과 삶의 현장, 일상의 토대라는 관점으로 문제를 풀어간다. 인간은 에로스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다 에로스의 총화인 것이다. 그 에로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힘이기도 하다.

좀 어렵지만, '비우자'는 말이다. 아무 것도 갖지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에로스의 힘으로 욕망의 재배치를 하자는 거다. 수렴과 발산의 순환을 만들어 내자는 거다. 노자의 말 중에 "반자, 도지동(反者, 道之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되돌아 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반대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도의 움직임, 즉 순환이다.

우리의 에너지도 기(氣)와 혈(血)의 순환으로 공급되며, 우리의 모든 창조적 행위는 그 순환에너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항상 일정한 리듬을 타고 순환하는 것이지만, 동일한 사태가 반복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계절의 순환도 마찬가지이다. 노자의 언어는 대(大, 큼)에서 '반(反)으로 끝난다. 시작과 끝이 없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주역>>에서는 이 로고스(이치)를 천지의 뜻,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아들이는 상호작용을 통해 만물에 그 이치를 심어 놓은 것이라 했다. 만물의 하나인 인간은 이 이치를 알고 순응할 때 하늘의 이상을 땅이라는 구체적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바른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거다.

'건(乾, 하늘)'은 서양 철학에서 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놓을 수 있다. 우주, 도, 시간, 신의 섭리 등 다양한 개념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중지 건> 괘의 괘사가 "건(乾), 원형이정(元亨利貞)"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시간은 생장쇠멸(生長衰滅) 혹은 성주괴멸(成住壞滅)의 과정을 영원히 순환하도록 관장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은 하늘의 섭리 그 자체이다.  그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태어나 성장하고, 서서히 쇠퇴하여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연결된다. 다 순환한다. 노자 <<도덕경>> 제25장에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대왈서, 서왈원, 원왈반)"라는 말이 나온다. 말 그대로 하면 '큰 것은 가게 되고,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 온다'는 말이다. 노자는 '도'를 억지로 개념화하여 '크다'고 하는데, 이 '크다'는 말은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즉 전체 우주의 존재 원칙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전체는 가만히 있는 정지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부단한 운동 속에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 빠뜨리는 곳이 없는 부단한 운동의 방향은 먼 곳을 향하여 있는데, 이는 어떤 극한을 향하여 간다는 뜻으로 보았다. 사물의 발전은 극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그 극점에 이르러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전체 자연의 운행 모습이었다.

'대(大)→서(逝)→원(遠)→반(反)'은 전체 운행의, 즉 도의 운행을 나타내는 전략 아래 동원된 유기적 의미 연관 고리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도가 마치 하나의 물건과 같이, 비록 원형이나 리듬성, 귀환성을 갖는다 하더라도, 하나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도는 혼돈의 무엇이며, 독립 주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개념에 잡힐 수 없는 무형, 무명의 전체이다. 따라서 그 전체의 방향성은 원형이라 할지라도 단선으로 표시될 수는 없다. 순환을 반복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순환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반복이 아닌 창조의 리듬이다. 순환이 없는 창조는 없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는 사계절로 순환의 이치가 드러난다. 곧 "원형이정"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슬픔은 영원하지 않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은 반드시 시작된다. 모든 것은 머무르지 않고 변한다. 이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시간의 운동 력이니 우리가 시간의 영향 아래에서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만 과정과 과정을 거듭하며 성숙해 가는 것이다. 지난 잘못이나 실수를 반성하고 성찰하며 거듭 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익어가는 것이다. "모든 이의 삶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다." <<라이프 이즈 하드>>(민음사 펴냄)에서 키어런 세티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철학과 교수는 말한다. 인생에 찾아 드는 세차고 사나운 재난들은 우리를 고통과 고뇌에 빠뜨린다. 굴곡 없는 인생은 없고, 고난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처리하기 곤란하고 해결하기 어려우며 건너기 힘든 시련들을 계속해서 마주치는 일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질병과 노화, 소외와 외로움, 상실과 죽음, 패배와 실패 등을 피하지 못한다. 인생 행로 곳곳에는 웅덩이가 파여 있고, 우리 자신은 결함으로 가득하다. 세티야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억지 긍정이나 헛된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기보다 비바람 치는 현실, 즉 질병, 외로움, 상실, 실패, 불공정, 부조리 같은 고통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인생이란 폭우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비가 와도 그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La vie, ce n'est pas d'attendre que les orages passent, c'est d'apprendre comment danser sous la pluie). (세네카, Sénéque)

"원형이정"은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는, 반드시 디디며 걸어가게 마련인 단계와 같은 것이다. 봄에 씨를 뿌리고 단숨에 가을을 만나 수확한다는 것은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보면 이른 나이에 성취를 이루는 사람이 적지 않다. 겉으로는 여름을 건너뛴 것 같아도 기간이 짧았을 뿐 그들에게도 고된 노력의 과정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 성취는 형(亨)의 과정을 빠르게 넘어 이(利)의 단계로 건너왔으나 곧 정(貞)의 간계와의 거리도 그만큼 단축된 것과 같다. 성공에 취해 자기 자신을 잃고 쾌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이 없이 몰락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는 이유이다. 지루하고 힘들어도 담담히 밟아갈 때 외부의 잣대로 측정되는 크기에 상관 없이 자신의 성취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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