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16일)
한 달 만에 노자의 <<도덕경>>을 다시 꺼냈다. 오늘 '노자 함께 읽기"를 다시 시작한다. 더운 여름과 추석 연휴 등을 이유로 미루었던 거다. 최근에 혼자 생각했다. 좋은 관계는 '지성(知性)'이 뒷받침되는 관계여야 오래간다는 거다. 어제도 했던 말이지만,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 때 그걸 연결해 주는 건 지성밖에 없다.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가와 친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치가 생성된다.
최진석 교수는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철학 수준"이라 주장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로 인간의 동선(動線)이다. 인문적 활동이란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창의는 인문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인문적 시야를 가지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건 전략적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하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는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자주 말한다.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땅 위의 아웅다웅하는 삶이 쪼잔해 보이고, 큰 틀에서 오히려 쪼잔한 싸움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생기고, 혹여 나 자신이 싸움의 당사가 된다면 통 크게 한발 물러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땅 위의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규칙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땅 위의 삶을 하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옳다고 여겨 온 신념, 나를 가둬온 고정관념을 바로 시선의 높이로 깨어 버릴 수 있다.
몇 일전에 산 박재희 교수의 책에서, 시선의 높이를 올려주는 '멎진' 통찰을 만났다. "욕망의 억제는 소박함(樸)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 소박함을 일깨우는 검소한 차실(茶室)이나, 기도하는 작은 골방 같은 구별된 공간을 갖는 일이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몸 안에 영혼이 있고, 영혼이 우리를 이끌고 간다. 영혼이 메마르면, 몸도 마음도 메말라 버린다. 영혼이 메마르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물을 주어야 한다. 묵상이 우리의 영혼에 물을 주는 시간이다. 물을 주는 묵상은 골방에서 홀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품위는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품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것을 갖춰 보려고 애쓰는 것은 못 생긴 여자가 아름다워지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헛된 짓일 것이다. '위대한 개인'은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는다. 그것이 자기만의 골방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이다.
또 글이 길어지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오늘 우리가 읽을 부분이 노자 <<도덕경>>은 제37장이기 때문이다. 소위 <<도덕경>>을 <도경>과 <덕경>으로 나누는데, 제37장이 <도경>의 마지막 장이다. 사람들은 왕필이 그렇게 편집했다고 본다. 어쨌든 제37장은 노자 철학의 주요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 무위(無爲), 무불위(無不爲), 자화(自化), 무명(無名), 박(樸), 무욕(無欲), 정(靜), 자정(自定), 이렇게 8 개의 단어가 나온다. 박재희 교수는 이 8개의 단어를 가지고, 노자 철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었다. 자주 기억해야 할 통찰로 간주한다.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無爲),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無名), 욕망을 조절하고(無欲), 소박함(樸)과 고요함(靜)으로 다가가면, 세상은 저절로 안정(自定)되고 변화되어 저절로 돌아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적 지침을 나열해 본다.
- 내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 내 이름을 남기기 위해 위대한 업적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 내 욕망을 채우기 이해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는다.
-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지 않는다.
- 내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다.
정교한 종교가 필요하다. 단테의 <<신곡>>같은 의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검소함과 소박함이다. 그것 만이 우리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초심을 잃지 않게 한다. 동시에 그러면 세상은 저절로 안정되고, 내 삶도 잘 굴러간다. 사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벌거벗은 사람으로 태어나 지금은 비록 여러 가지를 소유했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의 평정(정)을 찾는 것이 지금의 상태를 지속하기 위한 실천이 되는 거다. 그것이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원리이다. 강요하지 않고, 저절로 되게 하는 길이다.
도는 결코 억지로 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다고 세상에 안 된 일이 하나도 없다. 사실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런 억지로 하는 행위가 없기 '때문에'에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풀이하여야 한다. '무위이불무위(無爲而不無爲)'를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부족하다는 말이다. 최진석 교수는 무위(無爲)를 '정교한 인위(人爲)'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차원에서,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점검과 자기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일 수도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 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 그 의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다시 말한다면,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거다.
시인처럼, 오늘도 별을 보며, 나는 오늘 만난 문장 되풀이 할 것이다.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無爲),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無名), 욕망을 조절하고(無欲), 소박함(樸)과 고요함(靜)으로 다가가면, 세상은 저절로 안정(自定)되고 변화되어 저절로 돌아간다."
별/류시화
별은 어디서 반짝임을 얻는 걸까
별은 어떻게 진흙을 목숨으로 바꾸는 걸까
별은 왜 존재하는 걸까
과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원자들의 핵융합 때문이라고
목사가 말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점성학자가 말했다. 그것은 수레바퀴 같은 내 운명의 계시라고
시인은 말했다. 별은 내 눈물이라고
마지막으로 나는 신비주의자에게 가서 물었다
신비주의자는 별 따위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차라리
네 안에 있는 별에나 관심을 가지라고
그 설명들을 듣는 동안에
어느새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나는 더욱 알 수 없는 눈으로
별들을 바라본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인도의 어느 노인처럼
명상할 때의 고요함과 빵 한 조각만으로
만족하는 것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 노인처럼
밤에 먼 하늘을 향해 앉아서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는 일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류시화 #도덕경_37장 #훈련된_지성 #무위이불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