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343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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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노인' 되고 싶다 하니, 주변에선 "쉽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되고 싶지 않은 나',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면, '아집'과 '오만'에 찬 노인이 떠오른다. 고요 속에서 나를 대면하면, 나는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가끔은 내면의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서먹한 심경으로 마주하기도 한다. 결론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 또한 낯선 질문이 된다. 이때 '품위 있고 우아한 노인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정말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선 부자가 되라고 한다. 가난한 독거 노인은 우아할 겨를이 없다면서 말이다. 우아한 취향과 우아한 집 평 수에 대해 말한다. 나도 조금만 방심하면 그렇게 돈으로 연결한다.
"네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면 말이야, 일단은 수집한 책을 쌓아 둘 공간과 소파와 햇빛이 필요하잖아요? 침대 랑 책상이랑 냉장고, 화장실 들어가는 문까지 주먹밥처럼 뭉쳐진 곳에서 여유가 나올 것 같아요? 결국 부동산과 돈의 문제야." 품위는 그런 게 아니지 않을까? "일단 부자가 돼. 가진 게 아주 많아진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이렇게 말한다. 그럴 땐, 미래에 되고 싶은 것보다는 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자꾸 떠올려 보면 좋다.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고집불통의 노인, 오만하고 게으른 성격의, 쉽게 남을 질투하고 흉보는 노인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가진 것이 많아야 하는 걸까? 그러나 부자가 되려면 지금까지의 노력 만으로는 힘들 것 같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보면, 돈 많은 인간 치고 품위 있는 인간을 별로 보지 못한다. 돈 많은 사람이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조작한 일들로 채워지고 있다. 비싼 집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몰수당할 처지에 놓이자 어떤 거짓말과 추태를 일삼고 있는 지에 대해서도 쉼 없이 보도되고 있다.
그래 <인문 일지>를 꾸준히 쓰고 있다.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날부터, 나는 매일 오늘을 살아내기 바빴다. 미래라는 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반드시 오는 건 아니지 않다. 지금 내 생각은 잘 늙고 싶을 뿐. 미래를 애써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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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만트라가, "내일은 없다, 오늘이 좋습니다" 이다. 그냥 하루 충만하게 살려고 애쓰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이 만트라를 소환하면, 지치고 무기력하며 화가 나가도, 불현듯 내가 '오늘만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막 일어난 감정과 생각이 바뀌며 편안해 진다.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가? 내일이 없으니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때 나를 옭아매던 어떤 한계에 갇힐 이유가 없다는 생각과 감정을 다시 갖게 되고, 오히려 일상의 습관을 놓치지 않게 된다. 그냥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까지 각성하게 하게 한다. 그리고 또 재미난 것은 어떤 상대가 나를 괴롭히면 내일은 내가 없을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어도 된다고 감정을 바꾼다.
생각 있는 사람의 삶은 오늘만 산다. 그리고 지금-여기에서만 산다. 이 사실을 소환하는 수준에 따라 그 강렬함의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수동적으로 연기론에 따른 인연을 따르지만,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인연을 창조하는 힘을 쓰기도 한다. 이렇듯 한 생각을 바꾸면 이런 변화가 가능해진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다만 깨달은 사람은 습관이 생겨서 아무런 망설임이나 혼돈 없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애써 마음의 에너지를 짜서 사용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다음 세 가지이다. 즉 지혜, 아니 나란 누구인 가를 깨닫고, 이어서 절제, 용기를 갖는 것이다. 이게 삶을 '잘 살 줄 아는 방법인 것 같다. 내 마음 속에, '내가 만든' 이런 원칙들이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절제로 내가 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더 배워서,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즐기고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게 내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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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한 구절을 소개한다.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 사물도 지나치면 안 된다. 지나치면 반드시 쇠한다. 나는 <<주역>>이 주장하는 "극즉반(極即反)"이라는 말을 믿는다. '세상에 모든 것은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간다.' 그리고 <<주역>>의 <건(乾)괘>에는 "항용유희(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이나 후회가 있다"는 뜻이다. 가득 찬 것은 다시 비워져야 하고, 높은 곳에 오르면 내리막 뿐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끝을 모르고 치닫는 것은 위험하다. 극도에 이르기 전에 적당함을 유지하는 것, 즉 "중(中)"에서 머무르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산다는 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열흘 동안 붉게 피는 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번 성한 것은 얼마 가지 못해서 반드시 쇠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다. 잘 나간다고 거드름을 피워 봤 자, 얼마 아니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 얘기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는다. 자존심이 강하고 욕심 많은 사람일수록 화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유명세를 타거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삶에 대한 애착이 더 많다. 하지만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젠가는 죽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소용이 없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인은 "사는 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사는 것은/안중득
길 하나 만들어
바람에 띄워 놓고 가는 일
뒤돌아보면 구겨진 길
비바람에 찢기고
푸른 달빛에 씻겨온 길
바라보며 가노라면
밝은 내 별에
닿을 수 있겠지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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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공존하는 다성(多聲)적 공간이다. 사람들은 각기 고유한 삶의 서사와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다름 혹은 차이는 필연적이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다. 차이를 인위적으로 해소하려 할 때 소외가 일어난다. 산다는 것은 낯선 세계와의 만남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삶의 지평은 넓어진다. 정치는 그러한 차이 혹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각기 다른 이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진영의 목소리만이 용인되고 다른 목소리가 억압될 때 정치는 독백이나 불협화음으로 변질된다.
동일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꽃필 수 없다. 대위법(對位法)적 다양성이 억압될 때 세상은 빈곤해 진다. 요즈음 K-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은 지난 시절 우리 의식을 옥죄고 있던 억압들이 사라진 덕분이다. 이 억압은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분투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 자유의 공간은 다양한 주체 들이 자기 답게 살아도 되는 장소이다. 하지만 자기 다움이 타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 바흐 음악의 대위법(對位法)이 필요하다. 대위법(Counterpoint)은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서로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이다. 각 성부(part)가 각각의 멜로디 라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화성적인 결합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며, 이는 하나의 선율이 다른 선율에 대해 독립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바흐의 음악은 독립적인 다성부(polyphony)가 어울려 음악적 건축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경이롭다. 하나의 선율을 또 다른 선율이 따른다. 각기 독립적인 선율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때로는 대립하고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어울린다. 음들이 일으키는 긴장이 생동감을 자아내고 마침내 원만한 조화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뒤척이며 흐르던 지류들이 합류해 강을 이루고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스며드는 광경과 같다. 바흐의 대위법은 조화로운 대립의 메타포(metaphor) 이다.
대위법적인 정치는 다름을 용납하는 것을 넘어 존중하는 데 이르러야 하지만, 다름이 지향하는 더 큰 가치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 된다. 성찰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성찰적 자아는 자기 입장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조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치는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면서도 함께 지향해야 할 가치를 잃지 않는 정치다. 그 가치의 핵심은 지속 가능한 미래, 생명, 평화가 아닐까?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모든 정치 주체들이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바흐의 음악이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연주되는 까닭은 그 음악이 상기시키는 '높음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사회도 어서, 바흐의 음악처럼, 다양한 소리들이 서로 모방하고 충돌하고 엇갈리면서도 결국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대위법적 세계가 열리기를 고대한다. 잊힌 목소리들이 다시 경청되고,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는 세상의 꿈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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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비공개 대화에서 ‘장기 이식'이나 ‘불멸'을 언급하며 수명 연장을 기대하는 듯한 발언을 주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의 대화 내용은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을 참관하기 위해 베이징 천안문 망루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핫 마이크(hot mic)’에 포착됐다. '핫 마이크'란 마이크가 켜진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유력 인사의 사담이 의도치 않게 공개되는 것을 말한다. 푸틴 대통령의 중국어 통역사는 “생명공학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장기는 끊임없이 이식될 수 있다. 당신은 오래 살수록 젊어 지고 심지어 불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이 중국 관영 CCTV에 담겼다. 시 주석은 “이번 세기에 인간이 150세까지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한다"고 답했다. 뉴욕타임스는 “70대인 두 정상이 권좌에 더 머물고 싶어하는 상황에서 의학 발전이 지정학과 어떻게 교차하는지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무협소설에 ‘환로반동(還老返童)’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높은 무술과 무공을 지닌 나이 든 고수가 천하의 영약과 비술을 통해 젊은이의 몸으로 되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서양에는 ‘젊음의 샘'에 대한 전설이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마시거나 몸을 담그면 젊음을 되찾게 해준다는 회춘의 샘이다. 진시황이 탐한 ‘불로장생'까지는 아니어도 장수와 젊고 건강한 육체를 꿈꾸는 건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100년도 못사는 인간이…'는 흔히 사람들의 탐욕을 꾸짖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실제로 의료 환경, 영양 상태 등이 양호한 선진국들도 평균 수명은 80대 초반 정도다. 홍콩,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장수 국가인 한국이 84.4세다. 공식적인 세계 최장수 기록은 122세까지 산 프랑스 여성이다. 대다수 과학자가 130세 정도를 인간 수명의 한계라고 보고 있다. 최근에는 15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인공지능(AI)이 50-100년 걸릴 생물학이나 의학 연구를 5-10년으로 단축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이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인류 공통이겠지만, 권력이든 재산이든 손에 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욕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그것들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압 통치, 전쟁 등으로 국민의 수명을 단축시킨 독재자들의 ‘장수욕(欲)’만큼은 용납하기 어렵다. <한국경제> 김정태 논설위원의 칼럼에서 얻은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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