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13. 17:25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9월 13일)

오늘 아침은 다음 문장과 함께 시작했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메리 올리버의 <<휘파람 부는 사람>>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어제 그녀의 시, <기러기>를 공유했었다. 그래서 위의 문장에 내 뇌가 소환했던 것 같다. 이 구절은 2015년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에 게시된 '광화문글판' 가을편이기도 했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요즈음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잔뜩 먹기만 하고, 발산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 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 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배철현의 <매일묵상>에서 읽은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인문 일지>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원심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 힘은 인문정신에서 나온다. 인문정신을 갖는다는 것,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내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나름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가 할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틈나는 대로 <인문 일지>를 쓰는 일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발산이 되고, 그 양만큼 수렴하는 시간이 요구된다, 그만큼 독서와 관찰이 시간이 필요하다. 또 그 양만큼 안목과 시선이 높아지고, 세상에 대한 문해력이 늘어난다. 이게 일상의 소소한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또 그만큼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고 마음도 평화로워진다. 더 나아가, 사소한 일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나 만의 임무를 깨닫게 되고, 초조함과 조급함이 사라졌다. 나는 이게 인문적 활동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게 삶의 성숙이 아닐까?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뀐다. 미래는 결정에 따라 바뀐다.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 바꾸지 않고 고집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목표를 잃는 것보다 기준을 잃는 것이 더 큰 위기이다. 인생의 방황은 목표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준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成熟)이다.

인문적 활동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수렴과 발산, 즉 '순환'을 늘 기억하는 일이다. 흐르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 아침에 '간 맞추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와인에서 간이란 신맛, 단맛, 떫은 맛의 삼각형이 균형을 이루는 거다. 이 세 가지의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성숙의 반대인 숙성이라 한다. 그러려면 수렴과 발산의 순환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이걸 김기석 목사는 "잡아당기기"와 "밀어내기"로 풀었다.

"초나라와 월나라가 장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강 상류에 있던 초나라는 물길을 따라 내려와 전쟁을 치렀다.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퇴각할 때는 사정이 달랐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월나라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묘수를 찾던 초나라는 유명한 기술자인 공수반을 모셨고, 공수반은 초나라를 위해 중요한 도구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잡아당기는 갈고리 구(鉤)였고, 다른 하나는 밀어내는 기구인 거(拒)였다. 적이 탄 병선이 후퇴하려고 하면 ‘구’로 잡아당기고, 전진해 오면 ‘거’로 밀어냈다. 초나라는 이 기구들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공수반은 자기의 발명품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때 마침 그의 동향 사람인 묵자가 초나라에 왔다. 공수반은 자기 업적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묵자는 자기가 만든 ‘구’와 ‘거’는 공수반이 만든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며 이렇게 말한다.

“형님, 모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만든 ‘구와 거’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만든 ‘구’이고 공손함으로 만든 ‘거’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의 갈고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친해질 수가 없고, 마침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되려면 서로 공손하게 대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위안커가 쓴 <<중국신화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라 했다.

묵자의 ‘구거’는 상생의 도구였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잡아당기는 갈고리 ‘구’와 밀어내는 ‘거’를 가지고 산다. 우리는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잡아당겨 해치거나 지향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며 산다. 나는 어떤 가? 나는 사랑으로 잡아당겨야 하는 이들은 밀어내고, 한사코 거부해야 할 특권과 이익은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지는 않은가? 질문해 본다. 인문적 활동의 시작과 끝은 계속 질문하는 거다.

새로운 세계를 여는 질문들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마무리한 유고시집, <<질문들의 책>>에 가득하다. 그 시집은 74편의 시들이 모두 질문들로 시작하고 질문들로 끝난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오늘 아침 공유하는 거다. 44번째 시이다.

  
질문의 책/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역)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쫓는 거지?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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