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 원리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이 만들어진다. 그 원리를 찾으면 그게 지혜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12일)
어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공유한 후, 천안 강의를 가야 한다. 바쁘다. 어제 이야기는 인문학의 목표는 지혜의 개발이고, 그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거였다. 그러면 그 지혜는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우선 처 강의는 만물의 구성과 만물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알아보려 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구성되는 원리를 알아보고 싶은 것이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근본적 원리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이 만들어진다. 그 원리를 찾으면 그게 지혜이다. 만물, 즉 자연에 깃들어 있는 기본 원리를 찾아야 한다. 그 것이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지는 사유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로 보았다.
오늘 공유하는 <아테나 학당>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영어권에서는 헤라클리투스)는 '눈물의 철학자'로 불린다. 앞 줄에 이마에 손을 대고 혼자 세상의 원인을 고민하느라 늘 '인상을 쓰며' 혼자였고, 그는 자연 법칙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 내 방식대로 말하면, 자연은 말이 없다. 즉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연은 discovery(발견)의 대상이다.
▪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자연은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립, 노자가 말하는 무와 유의 대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한다.
▪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 모든 것은 원리(logos)가 있다. 자연 현상은 원인에 의해 나타난다. 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자연은 점프하지 않는다. 자연의 작용은 연속적이다. 영어로는 이렇게 말한다. Nature makes no leap.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 "에토스 안스로포 다이몬(ethos anthropo daimon)"이 말은 '개성이 인간의 천재성(또는 운명)'이기도 하다'란 뜻이다. 여기서 '에토스'라는 말은 흔히 '습관 혹은 윤리'로 번역한다. 개인의 사소한 생각이나 무심코 던진 말과 행동은 무작위로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 습관을 그 사람의 '윤리 혹은 도덕'이라고 부른다. 그 윤리와 도덕은 그 사람의 일관성과 꾸준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게 그 사람의 근거이고 바탕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토스 안스로포 다이몬'을 다시 번역하자면 "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이 인생을 통해 수련한 결과로 도달한 신성 혹은 카리스마다"다. 인격이란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그 사람만의 신성성을 발현하는 수련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이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수사학(修辭學)이라고 여겼다. 수사 능력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타인을 설득하는 능력으로 다음 세 가지로 구성돼 있다. 로고스(논리), 에토스(화자의 성품), 파토스(감정)을 제시했다. 설득의 성패는 논리가 결정적일 것 같지만, 이외로 누가 말하는 지와 감정적인 호소도 크게 작용한다. 이는 사람을 평가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그리고 파토스(pathos). 이 세 가지 수사학적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이 일상의 습관에서 나오는 언행이며, 로고스는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이성적인 판단과 대화다. 파토스는 그 사람에 대한 평판에서 나오는 아우라다. 파토스는 흔히 '감동'이라고 번역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 중 '에토스'를 가장 중요한 수사 능력일 뿐만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에토스는 로고스와 파토스를 구현하기 위한 기반이다. 에토스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아서 로고스와 파토스가 자라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말하는 물과 불은 물질 자체라기 보다, 성질을 이야기 하는 거다. 물은 부드럽고 어두우며 혼돈스럽다.는 성질로 무질서를 상징한다. 반면, 불은 밝은 것이고, 이는 곧 질서를 상징한다. 이런 차원에서 우주가 혼돈에서 점점 질서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서양에서 카오스와 코스모스라 한다. 혼돈과 질서라고 번역된다.
이 때 이런 혼돈과 질서라는 표현은 하나의 범주이다. 범주란 하나의 틀, 창문을 말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가지고 하나의 범주, 즉 창문을 설명해 본다.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동굴 밖에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온다.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 인간은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깊은 곳에서 동굴 안에 위치한 벽에 투영된 그림자만 보도록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수인과 같다. 자의든 타의든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를 수인으로 묶어두면 편하다.
▪ 그러나 그들 중 한 혁신가가 '결연히' 자신을 얽매고 있는 편안하면서도 속박하는 사슬을 끊는다.
▪ 그리고 자신들이 본 것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 그리고 동굴 밖에 있는 태양을 향해 거룩한 여정을 시작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묶인 채로 진실이 아닌 허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진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속박했던 족쇄를 부순다. '한순간에(suddenly, 불현듯이-불을 켜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갑자기 어떠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모양, 느닷없이)' 낯선 현실을 만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것은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시작을 여는 '갑자기/한순간에', '결정적 순간'에 일어난다. 이 순간이 우리의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우며 한 곳에 의미 없이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래야 그림자의 허상이 아닌 빛이 일깨우는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카이로스적 시간이다.
고백(告白)하는 시간 결단의 순간이다. 고백(告白)이란 한자가 "고백하는 자는 소를 제물로 바쳐 놓고 '하얀 하늘' 백을 향해 자신의 잘못을 외치는 자기 다짐"이라고 한다.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백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를 끊고 자신들의 과오를 고백하고 동굴을 탈출하는 수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나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내 안의 '괴물 리스트'를 다시 곱씹어보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고백의 시간이다.
이런 자기 변화는 모멘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소중한 순간순간을 의미 없이 흘려 보내고 있다면, 고통이 따르더라도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아야 한다. 나를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 그리고 ‘결연히’ 자신을 얽매고 있는 편안하면서도 속박하는 사슬을 끊고 자신들이 본 것들 허상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동굴 밖에 있는 태양을 향해 거룩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오지만, 태양을 보지 못한다. 눈부신 태양을 볼 용기가 없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이게 보통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한 채 반짝이는 것을 그냥 금이라고 믿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을까? 쇠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야 한다. 그 용기는 어떻게 생길까? 갈망을 통해서이다. 진정으로 원하고 갈망하면,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게 고대 그리스 인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그 갈망은 '에로스'를 통해 발현된다. 여기서 에로스라는 말을 번역하면, '숭고한 사랑'이다. 에로스라는 말을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좀 다르다. 타자에 대한 숭고한 사랑이다. 숭고(崇高)란 "뜻이 높고, 고상하다"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영어로는 ‘서브라임’sublime이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이 혹은 ‘넘어서(super)'라는 의미다. 새로우면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limen)'이다. 리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소인 ‘현관(玄關)’과 같다. 불안하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런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이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너머 선 어떤 것, 흔히 ‘위대함’을 우리들에게 바라보게 한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다.
플라톤 동굴의 비유는 이데아를 향한 갈망을 통해서 동굴 밖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만약 여기서 그치면 플라톤의 사상은 단순한 용기에 대한 덕목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데아를 한 번 본 사람에게 '에로스'가 깃들어 숭고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면, 동굴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환영을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게 이데아의 힘이다. 자기만 이데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갈망과 에로스(숭고한 사랑)가 생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숭고한 사랑의 감정으로 동굴 안의 쇠사슬에 묶인 채 그림자를 진리라고 믿는 동료들을 생각하는 것이 이데아의 힘이고, 이 힘으로 욕을 먹더라도 그들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힘이 에로스(사랑)인 것이다. 에로스 힘의 작동은 내가 이데아를 보려는 용기를 심어주고, 다시 동굴 안의 사람에게도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하는 힘이다. 이게 플라톤의 에로스론이다.
길 잃은 날의 지혜/박노해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은 작은 옮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시십시오
작은 것 속에서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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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