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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 (3)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9. 14:21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9월 9일)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 (3)

다시 하느님이 인간에게 한 첫 질문, '아예카'는 '너는 어디에 있느냐?'란 뜻이다.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으니 시제가 없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세 개를 의미한다.
▪ 너는 지금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느냐?)
▪ 너는 어제 너에게 어울리는 장소에 있었느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 너는 내일 네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을 거냐?)

죄를 범하고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느님이 하셨던 위의 질문은 육체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현실에 대한 비탄의 음성으로 아담에게는 현재 주어진 현재 상태에 관한, 즉 현재 영적 상태를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는 지에 관한 내용의 질문이었다. 아담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지? 그 현실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삶을 살아가며 성과를 내야 하고, 결과를 만들며 성공을 꿈꾸는 우리들, 자기 계발과 같은 자기 발전을 생각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욱 나아지기를 계획하고 노력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에게 '출발 지가 어디인 가?'라는 현실 인식의 질문은 '자가 진단'의 관점에서도 너무 중요한 질문이다. 그 출발 지를 잘 알아야 우리는 올바른 방향 설정을 할 수 있다.

'어디'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깨닫고 도달해야 하는 완벽한 자기만의 장소, 신이 개인에게 할당한 장소를 의미한다. 그 사람이 자주 가고, 거주하는 장소는 그 사람을 의미한다. 나의 정신과 육체는 내가 자주 가는 곳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장소는 내가 사는 집을 수도 있고,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내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사이트일 수도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 그것이 곧 나의 수준이다.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확장하였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에 계십니까?,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겁니까?', '이대로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괜찮은 겁니까?'

마지막 질문,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마지막 날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이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 영성을 키우는 신앙의 길이 아닐까? 나의 '마아트', '도리(道理)를 잊지 않는 거다.

여기서 나는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 하시는 <마태 복음> 제25장 40절을 소환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 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이 말이 '마아트' 아닐까? 이 말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 처형을 받기 전, 제자들에게 당부한 유언이다. 이것이 복음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최후 심판을 말씀 하신다. 마지막 날에 예수의 자기 명칭인 ‘인자(人子)’가 천사들과 함께 땅에 내려와, 구원 받을 사람과 저주 받을 사람을 구별할 것이다. 착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양’은 오른 편에, 악한 사람을 의미하는 동물인 ‘염소’는 왼 편에 몰아넣을 것이다.

예수님은 왜 착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명료하게 설명하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의 교리 이야기는 없다. 평상시 종교 시설에 꼬박꼬박 다녔다 든가, 헌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들이 구원 받은 유일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배고팠을 때, 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 말랐을 때, 너는 나에게 마실 물을 주었다. 내가 낯선 자였을 때,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내가 입을 옷이 필요할 때, 내가 입을 옷을 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봐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나를 면회 와 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묻는다. “우리가 언제 굶주린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른 당신에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낯선 자 된 당신을 보고 집으로 초대하였고, 헐벗은 당신에게 옷을 입혀주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당신이 병들거나 감옥에 감금되어 있을 것을 보고, 당신을 방문했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구원은 은총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그 종교를 설명하려는 교리, 그리고 교리를 정기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서 배운 예수님의 모습만이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허상인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너희들이 내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우리 주위에서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그런 존재 들이다. 외국인 노동자, 고아들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한 것이다. 내가 일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동물들을, 그 미물은 그냥 지나치면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의 관심과 사랑을 쏟으면, 그 대상이 신적인 존재, 즉 거물이 된다.

‘낯선 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나 생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원수일 수도 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만나 밤새 씨름한 무명의 낯선 자는 신이었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 얌체’를 의미하는 ‘야곱’이 아니라 ‘신과 씨름 하여 이긴 자’인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았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님을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님이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님이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좀 길게 이야기를 했다. 어쨌든 질문(質問)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재화인 패(貝)를 만들기 위해 양손에 도끼 두 자루 '斤斤'를 들고 만들기 시작하는 수고이다. 이 수고로 나오는 해답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수고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그는 어리석고, 만일 찾았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비겁한 거다. 말 그대로 죄를 짓고 있는 거다. 영어의 '죄(sin)'라는 말이 '과 녘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인간이 자신이 간절하게 열망하는 그것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열망하는 그것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 때 만나는 고통은 소중한 그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이 좁아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고, 남들이 가는 넓은 길로만 가고 싶어 한다는 거다.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 존재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며, 육신을 지닌 존재가 신이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자신의 스승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고, 자신도 예수처럼 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베르로도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전파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 베드로처럼, 인간은 고통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외부에서 오는 고통보다도 자신이 택한 고통에 나는 주목한다. 인간은 다시 태어나기 전, 이기심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그럭저럭 연명한다. 이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발휘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 같지만, 사실은 쾌락과 편함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신적인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에 불을 지펴, 빛으로 살지 못할 때, 그는 죄인이 된다. 죄인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식이고, 알더라도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고통은 '내가 누구인가'를 가장 선명하게 알려주는 훈련사이다. 신이 욥에게 한 질문이다. "내가 세상의 기초를 세울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욥이 고백한다. "저는 이제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신을 눈으로 보기만 하겠습니다."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맛을 본다는 것, 감각할 수 있다는 것, 이 당연한 모든 것은 사실 기적들이다. 질문이 답이다.

그리고 "네 이웃이 누구인가?" 이 질문도 중요하다. 신은 언제나 낯선 자이다. 왜냐하면 낯선 자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본모습이 신이다. 나의 사람이,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킨다. 내가 자비를 베풀 때 그 가운데 신이 등장한다. 그 이웃이 내 친구이다. 몇 일전부터 성경에서 하느님이 하신 첫 질문이 "아이에카(ayyeka)"에 대한 사유를 했다. 이 말은 '너 어디 있느냐?'이다.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마아트'라는 이야기를 마친다. '마아트'는 우주의 균형이자 원칙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조화이다. 또 그것은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최선의 삶이기 도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처해진 삶의 상황에 지혜롭게 대응하여 삶의 중심을 찾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질문에 답하는 인간의 숭고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는 길위에서 내 삶은 어디에 있는가 묻는다. 잘 살다 가는 것도 실력이다. 그 실력을 위해 오늘도 <인문 일지>를 계속 쓴다. 그곳이 내가 있는 곳이다.

길 위의 거울/고찬규

길을 걷다가
길인 줄도 모르다가
걷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헐떡이며 쉬다가
쉬다가 나는 저만치 있는
나를 보아버렸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길을 벗어난 자 감옥에 갇히고
감옥을 벗어난 자 길에 갇힌다
기도해보지 않은 자 있는가
바람의 채찍에 생채기
나지 않은 자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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