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램프 증후군’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8. 18:25

343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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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9월이다. 그러면 나는  <9월이 오면>이라는 시를 읽으며 아침을 맞이한다. 오늘 사진은 지인이 초대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귀숙 갤러리>에서 마신 홍차를 찍은 거다. 107호 누비장 이수자인 이귀숙 대표가 운영하는 멋진 밥집이자 찻집이다. 9월 첫날부터 호강을 했다.


9월이 오면/김향기

웃자라던 기세를 접는 나무며 곡식들, 
잎마다 두텁게 살이 찌기 시작하고 
맑아진 강물에 비친 그림자도 묵직하다. 

풀벌레 노래 소리 
낮고 낮게 신호 보내면 
목청 높던 매미들도 서둘러 떠나고 
들판의 열매들마다 속살 채우기 바쁘다. 

하늘이 높아질수록 
사람도 생각 깊어져 
한줄기 바람결에서 깨달음을 얻을 줄 알고, 
스스로 철들어가며 여물어 가는 9월.

2
소근거리는 내 마음을 다스리는 건, 오직 컴퓨터 앞에 앉아 <에버노트>를 열고, <인문 일지>를 쓸 때이다. 헝클어진 내 마음을 잘 다듬으면 고요해 진다. ‘램프 증후군’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알라딘이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듯이 현대인들이 근심과 걱정을 불러내 자신을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의 어른들이 주로 현재의 생존을 위해 걱정했다면, 우리의 걱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다. 24시간 연결된 '초연결 사회'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벽이 사라지고 모든 문이 열린다는 뜻이다. 불안은 알지 않아도 되는 걸 너무 많이 아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과도한 연결은 오히려 소외감을 증폭시킨다. 초연결은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 있다는 우리의 감각을 점차 훼손시킨다. 나만의 소박한 행복을 위해 적당한 울타리와 담이 필요하다.

현생 인류에게는 이제 스마트폰 안과 밖, 두 가지 삶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에서의 삶은 조명이 달린 투명한 어항 같아서 아주 작은 것까지 환하게 비춘다. 호텔 패키지, 유명한 맛집, 명품 선물 같은 일상은 그곳에서 사진 몇 장으로 압축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초라해 진다. 타인의 기쁨이 곧 나의 근심으로 바뀐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이 완벽해 보이는 건 힘든 ‘노동'을 치우고 ‘여유'를 확대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개한 꽃만 전시하고, 뒤편의 거름과 가지치기의 흔적을 치우는 정원사처럼 말이다.

비교는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남의 숫자가 더 작아 보이는 고장 난 체중계와 같다. 세계 둘째 부자조차 첫째의 무게에 짓눌린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선택적 무지의 지혜다. 그것이 불통과 차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비교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알라딘의 램프는 스마트폰이다. 잠들기 전 어두운 방에서, 저마다의 작은 화면이 램프처럼 빛난다. 문제는 우리가 램프에서 요정이 아니라 괴물을 불러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 희망의 요정인가? 불안의 괴물인가? 그 램프를 켜는 것도, 끄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다. 스마트 폰으로부터 좀 해방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스마트폰, 유튜브, 배달 음식처럼, ‘누르면 즉시 나오는’ 온갖 보상 물질에 휩싸여 있다. <<도파미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는 이런 도파민 중독에 빠져나오기 위해 쾌락의 반대인 ‘고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운동, 명상, 채식처럼 ‘느린 피드백’을 가진 것들이 빠른 자극에 중독된 몸을 복구하기 때문이다. 단식 후 밥알 한 톨의 맛을 알고, 과도한 동영상 시청을 끊은 후 집중력 향상으로 성적이 좋아진 사례는 수없이 많다. 여기서 핵심은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단 기간이라도 확실히 ‘끊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기다리고 견딜 수 있을 때다. 지름길은 없다. 자연도 계절을 건너뛰지 않는다. 씨를 뿌리고 비바람과 태양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 건강, 화해, 성장처럼 가치 있는 모든 것은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야 만난다." 백영옥 소설가의 글에서 얻은 생각들이다.

살려면 위기 상황이 닥쳐 서가 아니라 미리미리 산소마스크를 써야 한다. 여기서 산소마스크는 깊은 수면, 명상, 산책, 운동 등을 말한다. 우리는 마음이 하는 소리에 미리미리 귀를 기울여야 한다. 최근에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으려면 스마트폰을 끄고 우리를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시간에 우리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 마음을 따라 일상에서 실천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3
최근 유행하는 말이 '관심경제(attention economy)'이다.  이를 위한 알고리즘이 더 치밀해 졌다. 그러면서 우리는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 기기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중독 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패턴이 생기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스마트폰 사용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중독되어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패턴이 생기는 걸 방해하면 스마트폰 사용을 의식하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자신이 정말 스마트폰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단순히 지루함이나 습관 때문에 휴대폰을 손에 쥔 건 지를 판단할 수 있는 틈을 만드는 것이다.

'패턴을 방해 하라'는 말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좋은 습관은 패턴으로 만들고, 나쁜 습관은 패턴으로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  좋은 습관 하나가 '폰 배드(phone bed)'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가끔 실천한다. '폰 배드', 폰 침대를 만들어 침실 바깥의 책상 위에 놓아 두는 것이다.

신이 낮과 밤을 만든  이유가 있다. 낮에는 낮에 할 일이 있고, 밤에는 밤에 할 일이 있다. 그 경계를 잘 지킬 때 우리는 건강한 마음 안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이를 부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있다)"라 했다. 다 마음 먹기이다. 적어도 밤에는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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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저술가 스티브 존스가 주창한 ‘느린 예감’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에 따르면 영감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무르익고, 실현하려면 큰 노력을 요구한다. 피카소의 말과 어쩌면 일맥상통한다. 이 그림 하나를 그리기 위해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과 통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단련시킨 건 8할이 연습이다. 그 연습을 계속하다가 티핑 포인트를 넘으면 지속된다. 그래프는 바닥구간과 급성상 구간으로 나뉜다. 그리고 한계 돌파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라는 임계점이 급성장 구간에 존재한다. 이 그림을 보면, 티핑 포인트도 임계점 이후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될 수 있는 반면, 그 이전 구간에서는 에너지를 축적해야만 한다. 이 이론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당장 성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지금 나타나고 있는 성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온 노력의 결과물이다. 좀 뻔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는 가끔 '바닥 구간'을 잊는다.

변함없는 습관은 우리의 생활을 앞으로 이끌어주는 주요한 동력이 되어준다. 취향은 때로 좌절하고 무너져도 습관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은은하면서도 완강하게 삶에 배어 있는 까닭이다. 취향 이전에 습관이 필요하다. 그러면 취향을 ‘글을 쓴다’로, 습관을 ‘글로 산다’로 치환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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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는 '아이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냐'는 질문에 부모들의 가장 흔한 답은 뭔가 특별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함정이 있다. ‘특별하지 않아도 좋으니 평범하게’ 속에는 아이가 유별나지 않길 바라는 역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가야 할 학교, 받아야 할 연봉, 살아야 할 동네와 아파트가 있다. 입시, 취업, 결혼, 자가(자가) 마련처럼 단계별 과업도 존재한다.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정서 속에는 ‘남들 보기에'란 행간이 있고, 이것이 곧 '평범'의 기준이 된다.
 
작년에 '평범'에 대한 좋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Eloge des vertus miniscules)>>라는 책이었다. 선택인가? 필수인가? '평범하다'는 마음은 언제나 우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야망을 좇아야 할까? 멀리해야 할까?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떤 변화의 가능성도 없이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갖는 거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자체가 또 다른 특권은 아닐까? 아니면 자의적으로 '중용'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거나 최소한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더 이상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인류는 평범한 중간의 사람들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거다. 지은이는 "너무 높게도, 너무 낫게도 날지 말라"며,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중용의 '평범한 삶'을 가치 높게 평가했다.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을 찬양했다. 그건 판단을 유보하고 삶이 흘러가는 길을 관찰하며 결과 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두는 힘을 기르자는 거다.

베트남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높다는 말에 놀랐는데, 눈에 띈 항목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공무원 열풍, 의대 광풍, ‘의치한약수(의과대학, , 치과대학, 한의과대학, 약학대학 그리고 수의과대학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줄임말)’에 가기 위한 직장인의 사표 행렬을 보며 이 땅에서 직업 선택의 자유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평범함이 본래의 말값을 찾으려면 어떤 전환이 필요할까? 이때 안 들리면 보청기를 쓰고, 안 보이면 안경을 바꾸는 노년의 지혜가 유용하다.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다. ‘그럭저럭'의 정신으로 나에게 좀 너그러워지자는 뜻이다. 남들이 말하는 꽃 길만 답이 아니다. 비가 내리면 나무가 자라고, 어둠속에서 별이 보인다는 걸 깨달어야 남과 조금 다른 길, 느린 속도를 견딜 수 있다.

아이들의 정신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SNS의 과도한 사용과 1980년대생 부모들의 과보호를 원인으로 진단한 분석 기사였다. 자꾸 수학 문제를 틀리는 아이를 다그치는 카페 안 엄마가 안타까운 건 결국 엄마가 우는 걸 봤기 때문이다. 내가 본 희망은 그런 엄마를 위로하는 아이의 걱정 어린 얼굴이다. 진심으로 묻고 싶다. 평범과 보통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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