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냥(Just Because)의 날’은 '작은 일탈을 통해 평소 경험하기 힘든 기쁨을 맞이하는 날'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8. 18:10

343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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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무 이유 없이 뭔가를 해봐도 좋은 날이라는 "그냥(Just Because)의 날"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의 글이었다. 세런디피티(serendipity)의 날’이 '우연한 기쁨 혹은 뜻밖의 행운을 만나는 날'이라면, ‘그냥(Just Because)의 날’은 '작은 일탈을 통해 평소 경험하기 힘든 기쁨을 맞이하는 날'이다. 전자가 주체의 수동성을 전제하는 데 반해, 후자는 얼마간 자발적-적극적인 시도를 요구한다는 점이 다르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작은 일탈을 위해 제천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나가 만난 산인데, 솔방울을 잔뜩 달고 있는 소나무를 만났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대추나무에 대추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염소를 매어 놓는다고 한다. 묶여 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힌다. 그러면 대추나무가 잔뜩 긴장하면서 본능적으로 대추를 많이 열도록 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식물들도 위기를 느끼면 씨앗으로 번식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생명에 위기를 느낀 소나무가 솔방울을 많이 만드는 것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 몸도 그냥 편히 두면 급속히 쇠퇴하고, 질병(疾病)과 노화(老化)에 취약해진다. 평소에 좀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굽혔다 펴기도 하고, 흔들어 주고, 문질러 주고, 비틀어 주기도 하여야 생기가 더욱 발랄해 진다.

2
인간은 유년기를 벗어난 순간부터 숨이 멎을 때까지 보이지 않는 역할의 사슬에 묶여 있다. 공부해야 하고, 취직해야 하고, 누군가를 지키고 보살펴야 하고, 뭔 가를 미리 챙기고 대비해야 한다. 수많은 규칙과 상황이 요구하는 바와 함께 타인의 기대에도 얼마간은 부응해야 한다. 판단, 선택과 행동은, 옳든 그르든 또 바람직하든 않든, 논리적인 인과와 이해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다람쥐 쳇바퀴’의 비유가 거기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냥(이유 없이)의 날’은 그 쳇바퀴에서 잠깐 벗어나 보자는 날이다. 나는 원래 '그냥'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것을 영어로는 'Just Because'라 하는 것은 몰랐다. 조동화 시인의 다음 시를 좋아한다.

그냥 이라는 말/조동례
 
그냥 이라는 말
참 좋아요
 
별 변화 없이
그 모양 그대로 라는 뜻
 
마음 만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난처할 때
 
그냥 했어요 라고 하면
다 포함하는 말
 
사람으로 치면 변명하지 않고
허풍 떨지 않아도 그냥 통하는 사람
 
그냥이라는 말
참 좋아요
 
자유다 속박이다 경계를 지우는 말
그냥 살아요 그냥 좋아요
 
산에 그냥 오르듯이
물이 그냥 흐르듯이
 
그냥이라는 말 
그냥 좋아요


‘그냥(이유 없이)의 날’은 그 쳇바퀴에서 잠깐 벗어나 보자는 날이다. 예를 들면,
▪ 퇴근길 아무 역에서나 '그냥' 내려 낯선 길을 산책해보고, 
▪ 아무 준비도 계획도 없이 자녀가 있다면 그들과 함께 '그냥' 바닷가를 찾아 노을을 지켜보는 것도 좋다. 
▪ 동료의 책상 위에 ‘그냥’ 고마움을 전하는 메모를 남길 수도 있고, 
▪ 오래 연락하지 못한 친구나 친지에게 전화를 걸어볼 수도 있다. 

일상의 타성-관성에서 벗어나 보는 ‘스펀터네이어티(spontaneity, 즉흥성·자발성)’을 시도해 보는 거다. 1950년대 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직장인(Joseph J, Goodwin)이 아내에게 ‘그냥, 이유 없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선물하면서 뜻밖의 기쁨을 얻게 된 사연이 파문을 만들면서 8월 27일 ‘그냥의 날’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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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길은 언제나 법을 넘어 인간 본성의 선함과 양심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의 어린 시절에 형, 누나들이 들려주었던,  휴일 없는 장시간 노동, 끝없는 야근과 잔업, 그리고 무엇보다 작업 중 크게 다친 동료들의 이야기는 늘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누구든 사고 당한다"는 말은 인사처럼 오갔다. 세월이 흐른 뒤에 야 우리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사고들이 단순한 개인의 부주의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이 끝없이 이윤만을 좇던 구조적 문제였음을 깨달었다. 대통령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산업 현장의 인명 피해를 지적하며 근본 대책을 강도 높게 주문하고 있다. 강력한 법 집행과 지속적 감독을 강조하는 모습은 국민의 생명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정치의 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남는다. 과연 법과 처벌만으로 충분할까? 제도적 장치와 불이익이 유일한 해법일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법조문과 감독관의 처벌만을 두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내 안의 양심과 상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답은 명확하다. 생명을 존중하는 길은 언제나 법을 넘어 인간 본성의 선함과 양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법과 제도 또한 더 큰 힘과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

가장 먼저, 이 질문에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 떠오른다. 우리는 흔히 그를 <<국부론>>의 저자,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한 사람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국부론>>보다 17년 앞서 <<도덕감정론>>을 저술했고, 죽기 전까지 6차례 개정할 만큼 애정을 기울였다. 경제학자들조차 <<국부론>>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도덕감정론>>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덕감정론>>의 핵심은 이렇다. 잘 읽어야 한다. “인간은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본성 깊은 곳에는 선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타인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에게 아무 이익이 없어도 다른 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 

스미스는 인간이 본래 선한 본성과 타인에 대한 관심, 공감과 배려를 지닌 존재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이기심’ 역시 단순한 자기 욕망이 아니라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아마도 그는 경제의 가치를 단순히 돈의 축적에만 두지 않고, 기업 그리고 시장과 인간이 함께 선순환 하는 건강한 생태계를 지향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사상 속에는 이윤과 인간의 삶이 나란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스미스는 또 ‘공정한 관찰자’를 말한다. 그것은 내 안에 존재하며, 나의 행위가 도덕적이고 공정한지를 끊임없이 살펴보는 양심의 목소리다.

맹자가 말한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아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곧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의 불행이나 어려움을 함께 안타까워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본래 깃들어 있다고 그는 보았다. 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물에 빠질 위기에 놓인 어린아이를 본다면 누구나 즉각 구하려 들 것이다. 그것은 그 아이의 부모에게서 어떤 보상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이웃이나 친구들의 칭찬을 바라서도 아니며,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본능적으로 솟아나는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 역시 같은 뜻을 전한다. '너와 내가 본래 하나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연민과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연민은 추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제도와 환경, 책임 있는 감독이라는 구체적 ‘방편’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사회는 안전해 진다. 안전한 근로 환경이야 말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연민이 제도화된 결과다.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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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4일에 했던 "절반의 철학" 이야기를 오늘 더 이어간다. "절반의 철학"은 '거품을 버리고 기품 있게 살자'는 거다. 이제까지 남의 인생을 쫓아 열심히 벤치마킹 했다면, 이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걸어가면 길이 되는 "패스 브레이킹(path breaking)을 하자는 거다. 지금까지는 남보다 빠르게 살아가려고 했다면 지금부터는 전보다 이르게 살아가자는 거다. '빠르게'는 속도전이지만, '이르게'는 의미 전쟁이라는 거다. 빠른 사람은 효율을 추구하지만, 이른 사람은 효과를 추구한다. 효율은 정해진 길을 적은 입력을 투입, 더 많은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지만, 효과는 정해지지 않은 길을 걸어가더라도 보다 의미 있는 성취를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성과와 성취는 다르다. 성과는 결과 중심 사고의 산물이지만, 성취는 과정 중심의 부산물이다. 

남의 욕망을 쫓아 선망하는 삶은 다 망한다. 선망(羨望, 영어: Envy, 라틴어: Invidia)은 일반적으로 자신에게는 없는 뛰어난 특질이나 업적, 재산 등을 다른 사람이 가질 때 일어나는, 그들에게의 갈망, 혹은 대상이 그것들을 잃게 되기를 바라는 감정이다. 질투(嫉妬, Jealousy)와 선망(羨望, Envy)은 일반적으로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으나, 심리학적으로는 2개의 개별적인 감정으로 분류된다. 질투는 주로 현실, 상상에 지나지 않고, 자신 이외의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보인다. 선망은 가장 원시적인 욕망이며, 부러운 대상을 파괴해버리지만, 질투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은 존재하고, 선망처럼 부러운 대상이 파괴되어 버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질투 속에 선망이 포함되는 경우는 있다. 선망을 넘어서 발달하는, 동시에 대립되는 정서로는 감사를 들 수 있다.

그러니까 선망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남을 향하면서 그들의 성과와 비교하면서 발생하는 잘못된 욕망이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멈추고 안으로 향하면 선망 대신에 감사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선망은 경쟁심을 부추기지만, 희망과 감사는 경쟁력을 부채질한다. 님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의 근육을 키우고 다지면서 나를 중심에 두고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스케일(크기)보다는 디테일, 총론보다는 각론, 추상명사를 보통명사가 살아가는 동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고생 끝에 달콤한 미래가 온다는 '고진감래'는 고생 끝에 통증밖에 오지 않는다는 '고진통래'로 바꿔야 한다. 몸은 '여기' 있으면서 마음은 아직 오지 않은 '저기'로 향하는 삶을 멈추어야 한다. 노자적 사고이다. 노자는 "거피취차(去皮取此, 저 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자)"라 말한다.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 “나”(己)의 일상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우리'보다는 '나'에게 있게 된다. 보편적 이념의 지배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성에 의존하자는 것이다. 나이 들어서 통념을 먹고 푸념하면서 체념하기보다 다른 경이로운 세계를 심장 뛰는 마음으로 살자는 거다. 그 길은 다른 이들이 정해 놓은 규칙과 법에 맞춰 살아온 누추한 삶을 우선 버려야 한다. 내 삶의 주인 '나'이어야 한다. 그리고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이질적인 2가지를 엮어내는 유추를 통해 경탄에 마지 않는 경이로운 기적이 일상이 되는 그런 삶을 살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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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장의 제목은 "나 답게 살게 해주는 오성급 성공 모델"이다. 다음 그림과 같다.


이 "성공모델"에서 각각 다섯 개의 '성' 자의 라임(운)을 맞춘 것이 흥미롭다. 나이 들수록 이 다섯 가지 '성'을 잃지 않고, 계속 잘 유지하고 싶다. 저자는 "내 인생의 의미를 찾아 물건을 사기 위해 1억을 저축하는 사람이 아니라, 추억을 만들기 위해 경험을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5 가지 조건"이라 했다.
▪ 체력으로 단련 하는 야성(physical)-상쾌
▪ 지능을 능가하는 지성(mentale)-명쾌
▪ 감동과 감탄의  원천인 감성(emotional)-유쾌
▪ 심장 뛰는 비전의 언어를 만드는 탄성(sprituel)-통쾌
▪ 믿을 만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정성(relation)-흔쾌

다섯 가지의 '쾌'도 흥미롭다. 실제로 나는 이 '쾌' 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몸이 건강해야 기분이 상쾌해 진다. 상쾌하지 않으면 머리도 명쾌하지 않고 마음 역시 유쾌하지 하지 않으며, 꿈을 쫓아 가는 여정이 통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의미를 제공해주는 그 어떤 제안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을 부사로 바꾸면, '상쾌하게-명쾌히-유쾌히-통쾌하게=흔쾌히' 살아가는 거다. 꿈은 끊임없이 꾸는 것이다. 꾼다고 하는 것은 동사이고 형용사이고 부사이다. 나의 꿈에 아름답고 지혜로운 형용사와 부사를 달아주는 나머지 날들을 나는 살고 싶다. 꿈이 수식어가 생략된 명사가 되면 삶이 건조하다. 꿈을 직업의 이름에 묶어 두고 싶지 않다. 꿈에 형용사와 부사의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예컨대, 비겁한 작가보다 양심적인 작가를 꿈꾸고 싶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떠한 사람이 되는 가가 더 중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 이 다섯 분야로 나누어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분야에 필요한 것을 이렇게 주문한다.
▪ 건강: 야성으로 체력과 건강을 지킨다.
▪ 공부: 지성으로 지력과 배움을 이어간다.
▪ 말: 감성으로 매력과 말을 장착한다.
▪ 인간관계 : 정성으로 협력과 관계를 잘 이어간다.
▪ 행복: 탄성으로 탄력과 행복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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