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것은 벼리는 것이다.

342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20일)
1
연꽃은 진흙 속에 살면서 그것에 물들지 않고 그 연못을 정화하며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연꽃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살다 간다. 우리도 그와 같이 살다 가기를 바란다.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작은 여유와 미소를 전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렇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연꽃이 살아가는 방식이 연꽃엔 가장 세속적이듯 우리네 삶이 밝고 따스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세속적인 일이 되기를 발원한다.
연꽃/손석철
생물의 주검 온갖 오물들
부패로 질펀하게 흔들리는 늪속일망정
인내의 뿌리 깊디깊게 박고
넌 얼마나
바보 같은 용서의 가슴 가졌길래
그토록 곱게 웃을 수 있느냐
진흙을 뚫고 올라와 연꽃이 핀다. 이를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한다.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더러움(진흙)과 깨끗함(연꽃)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세속은 이분법적으로 쪼개진 세계의 공기를 마신다. 선이 있어야 악이 있으니, 선하게 살 일도 아니다. 붓다가 말하는 해탈의 세계는 선과 악의 대립이 없다. 성경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느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 선악을 가르는 화살이 녹은 자리에 핀 꽃이 연꽃이란다.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은 '해탈'이기도 한다. 해탈의 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왜? 더 이상 진흙이 없기 때문이다.
2
내가 최근에 고민하는 깨달음은 모든 대상이 무상(變化), 무아(非實體), 공(空性)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통찰하는 상태가 되는 거다. 그리고 모든 대상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아차린 상태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했던 훈육은 내가 뿜어내는 기운과 우주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려고 애를 썼다. 그 조화 속에서 내가 좋아하고, 나로 살 수 있도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며,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그리고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렸다. 디테일이 없었다.
한 마디로 하면. '감인대(堪忍待)'였다. 세상은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곳이란 말이다. 힘든 일이 있으면 견뎌내야 하고, 화나는 일이 있는 참아야 하고, 절망 앞에서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살라는 말이다. 견디고, 참고, 기다린다. 인생 고해(苦海)를 건너는 게 우리의 삶이란 것을 받아들였다. 원효의 말, "일인(一忍)이 장락(長樂)"을 늘 기억했다. 한 번 꿀꺽 참는 게 오랜 즐거움이라는 거다. 그리고 조바심 낼 것 없다. 급하게 서두를 것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다 때가 있다. 이게 내 방식이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삶은 고통과 문제의 연속, 이게 현실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삶은 응당 편안한 것이라는 믿음을 깨고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는 진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위에서 말한 네 가지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려는 의지로 '사랑'을 말한다. 불교와 만난다.
불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집착이 일으키는 고통("일체개고, 一切皆苦")을 벗어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른다는 진리, 사성제(四聖諦)를 깨달으라 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를 두 자로 요약하면, 깨달음과 사랑, 다르게 말하면 깨달아 지혜를 얻고(사실 가치), 자비를 베푸는(판단 가치)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지혜와 사랑이다.
3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일들이 본래 그러하다고 무심하게 넘길 수 있으나 지나친 것은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또한 대승불교의 자비심이다. 옛 스승들이 "내 말은 문지방 넘어가면서 잊어버려라" 했듯이 가장 옳은 말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말이다. 집착했던 관념에서 벗어나면 남는 것이 없고,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났다면 역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 또한 집착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방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갈 땐 마음속에 그 무엇도 남기지 말고 평온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그때 우리는 고요를 만난다.
고요는 바깥의 소음과 별 상관이 없다. 세상이 시끄러워서 마음의 아전을 취할 수 없다. 살기에 바빠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세상 탓은 변명에 불과하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누에는 거친 뽕잎을 먹고도 비단실을 토해 내고, 연못의 연은 흙탕물 속에서 꽃대를 밀어 올린다. 깨끗한 물에서 핀 연꽃은 3-4cm 크기밖에 되지 않지만 진흙탕 물에서 자란 연꽃은 20cm나 된다고 한다. 물이 탁할수록 더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다.
4
"버리고 떠나라" (법정) 버리는 것은 벼리는 것이다. 무딘 칼이 숫돌에 몸을 던져 제 몸을 덜어내야 비로소 날 빛으로 빛나는 칼 다운 칼이 된다. 잡고 있는 것이 오히려 삶을 무겁게 만들 때가 있다. 쓰지 않는 물건, 에너지만 소모시키는 관계, 의미 없는 일과를 내려놓으면 공간과 마음이 함께 가벼워진다. 비움은 잃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담을 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다시 읽어 본다. 삶의 방향이 흔들리면 늘 읽는 것이다.
▪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도 나누라.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풍부하게 소유하기 보다 풍요로운 존재를 꿈꾼다. 풍부하게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풍요롭게 존재하라.
▪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다.
▪ 저마다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 답게 살라.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 갈 뿐이다.
▪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 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 그 하나 마저도 잃게 된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 자주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하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 답게 사는 것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나라.
▪ 자신의 생각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기억하라.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밝은 삶과 어두운 삶은 자신의 마음이 밝은가 어두운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 오랜 세월을 앞두고 살아가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붙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안으로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아내고 마는 것이다.
▪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 삶의 장비를 초대한 간소하게 갖추라. 집, 식사, 옷차림을 단순하게 하라.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 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운명의 이기에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밤에 텔레비전도 끄고 촛불이라도 한 번 켜보라. 그러면 산중은 아니더라도 산 중의 그윽함을 간접적으로 누릴 수 있다.
▪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늘 물으라. 단 10분이든 30분이든 허리를 바짝 펴고 벽을 보고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보라. 이렇게 스스로 묻는 물음 속에서 근원적인 삶의 뿌리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다 가고 싶은가를 우선 질문하고, 삶의 '질서'를 정한다. 그 반대가 막 사는 사람이다.
5
다 읽지 못한 <산풍 고>괘 마지막 '상구'의 효사를 읽고 공유한다.

'상구'의 효사는 "上九(상구)는 不事王侯(불사왕후)하고 高尙其事(고상기사)로다" 이다. 번역하면, '상구는 왕과 제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높이 숭상하도다'가 된다. TMI: 事:섬길 사·일 사, 侯:제후 후, 尙:숭상할 상. 왕후를 섬기지 않으면 일이 고상하게 될 것이다. '바르게 일하면서 단출하고 소박한 삶을 살라'는 거다.
'상구'는 외괘 <간산(艮山), ☶>의 끝에 있고, <고괘(蠱卦)>의 맨 위에 있다. '고(蠱)의 시대가 마감한 것이다. 더는 부모나 전임자의 "고(蠱)"를 바로잡을 일이 없으며, 과거의 욕망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왕후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더는 공직에 몸을 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난세에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태평성대에 능력을 펼친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다. 난세를 지나온 '상구'는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누리고자 한다면 말로가 좋기 어렵다는 것은 많은 사례를 통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러한 상으로 보면, '상구'의 일은 세상사와 무관한 산 속의 일이다. 또한 음 자리에 양으로 있고 중도 얻지 못한 상태이니, 선대의 일을 맡아 처리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선대(先代)의 일은 물론 세속사의 왕후(王侯)도 섬기지 않는 상이다. 오로지 세상사와는 다른 그 어떤 일을 높이 숭상한다. 산 속의 일이기에 깨달음의 일(得道)일수도 있다. 외호괘 <진괘>, 우레에서 '왕후'의 뜻이 나온다. 외괘 <간괘>와 '상구'가 동할 때의 외괘인 <곤괘>에서 "불사(不事)"의 의미가 나온다. <진괘>, 우레를 그치게 하는 것이고, 땅 속에 가두는 것이니 섬기지 않는 것이다. "고(高)"는 내괘 <손괘>, 바람에서 나오고, "상(尙)"은 집과 창문의 상으로 외괘 <간괘>, 산에서 나온다.
오늘날의 기업으로 보면, 이른바 창업 동지들이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반석 위에 올린 후에는 의가 상해 서로 갈라서는 것과 비슷하다. 대표를 맡은 사람에게는 생존의 시대를 함께 할 사람과 번영의 시대를 함께할 사람이 구분될 수밖에 없다. 위상이 변모한 회사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인재 상 역시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가 상할 정도로 관계를 악화시키는 대신 새로운 시기에 맞는 기업 경영을 위해 각자의 역할에 맞게 물러나거나 혹은 또 다른 회사를 만들어 협업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사심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창업 공신이라는 부질없는 권위를 내세워 일도 하지 않으면서 특권을 누리려는 사람을 내버려둔다면 머지않아 회사에는 새로운 위기가 찾아 올 수 있다.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회사가 오래가기 어렵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자식이나 친척이 하나 둘 회사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할 때이다. 회사의 경영 유연성은 급감하고, 직원들 간의 소통이 약화되며, 직원들의 동기부여도 약하게 된다. <산풍 고> 괘의 표현을 빌리면, 대표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왕후를 섬기는 사람들이다. 끼리끼리 한마음이 되어 경영자의 편에 서게 된다. 사심이 개입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회사와 직원을 위한 거시 아니라 족벌 체제를 위한 것이 된다. 일의 성격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상구'는 리더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일에는 사심이 없고, 일의 내용은 훌륭하며, 일의 성과는 탁월한 것이다. 일에 전념하기 어려울 때는 미련 없이 조직에서 내려올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의 역할을 아는 것이고 진퇴의 때를 아는 것이다. 승진, 돈, 명예 등의 대가가 조직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것은 맞지만 그 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특히 공적 업무의 속성일수록 대가를 탐내는 마음에서 멀어져야 일의 가치와 개인의 명예가 높아질 것이다.
'상구'가 동하면, 지괘는 제46괘인 <지풍(地風) 승(升)> 괘가 된다. 승진을 말하되 바른 마음가짐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괘이다. <지풍 승> 괘의 '상육' 효사는 "上六(상육)은 冥升(명승)이니 利于不息之貞(이우불식지정)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상육은 오르는데 어두우니, 쉬지 않는 바름이 이롭다' 이다. 다시 말하면, '어두운데 오르니 "불식지정"을 추구해야 이로울 것'이라는 거다. "명승"은 어두운 데서 오르는 것, 오르면 어두워지는 것이고, 어리석게 자꾸 오르려 하는 것이다. 그렇 ㅍㄹ요 없다는 뜻이다. "불식지정"은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으려고 하는 바른 마음, 곧은 자세'를 의미한다. '상육'은 모두가 오르는 승괘(升卦)의 극에 처하여 오르다 보니 어두워져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육'까지 오르게 된 과정을 돌이켜보고 더욱 더 쉬지 않고 바르게 정진(精進)하라는 뜻이다. 맨 위에 거하면 항상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발현하지 못하면 어두워져 더 이상 오르지 못하니 뜻을 얻을 수 없고, 부함도 사라지게 된다는 거다.
가장 높이 오르는 길은 모두 버리고 내려오는 것이다. 소박한 삶의 향유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는 최고의 자리에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권력자들의 말년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고 권력자의 자리야 단 하나뿐이니 일반적인 삶에서는 너무 빠른 승진이나 성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속도가 빠르면 관성에 의해 멈추는 것도 늦어지는 법이다. 가속을 지속하면 반드시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자연스러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수단을 동원하게 되기도 한다. 한계 고도를 넘어 오른 풍선은 터져 버리고야 말듯이, 스스로 멈추고 그만두고 내려놓아야 할 때를 놓치면 강제로 물러나게 된다. 강제적인 것에는 항상 물리적인 억압과 부자유가 동반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사는 것만큼 멋진 삶은 없어 보인다.
'상육'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不事王侯(불사왕후)는 志可則也(지가측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왕후를 섬기지 않는 것은 뜻이 가히 법할 만하다'가 된다. '상구'가 세속의 왕과 제후를 섬기지 않는 것은, '상구'가 가진 뜻이 가히 지켜야 할 법칙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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