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서는 일이 오늘의 화두이다.

342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18일)
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복음> 12:51) 어제 미사의 복음 내용이다. 예수는 분명 평화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음 건넨 인사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열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종종 도피처로 삼고자 하는 거짓 평화의 실체를 드러내시고 부수어 버리는 분열이다. 우리는 어떤 분열이나 어려움, 소란 등이 일어날까 두려워 잘못된 부분을 덮어두고 모르는 척하며 누리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염증처럼 피부 속에 있어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냥 두면 점점 곪아 언젠가는 터지고 만다. 예수는 숨어 있는 거짓 평화의 염증을 짜서 터뜨리시려고, 그 상처 위에 참된 평화의 새살이 돋아 나게 해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평화의 인사는 이러한 전통을 기꺼이 겪음으로써 얻는 참 평화를 뜻한다. 이처럼 참 평화를 얻고자 하려면 오랜 시간 내가 익숙해져 있는 '거짓된'평화의 틀을 깨고 나오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경계에 서는 일이기도 하다. 경계에 서는 일이 오늘의 화두이다. 우선 오늘의 시를 먼저 읽는다. 오늘 아침은 꽃은 가시들의 경계에서 핀다. 이름이 '꽃기린'이다.
자연이 들려주는 말/척 로퍼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 하라. 단순 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2
'스틱스(styx)'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강 이름으로, 우리가 죽으면 이 강에 다다른다. 뱃사공 샤론(charon)이 죽은 자를 태워 지하의 세계로 옮겨준다. 스틱스는 신화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룬다. 스틱스하면 아킬레우스가 떠오른다. 그의 아버지는 인간 펠레우스이고, 어머니가 여신 테티스이다. 아킬레우스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머니 여신이 그를 스틱스 강물에 담근다. 근데, 발목을 잡고 강물에 담갔다. 강물이 닿지 않아 불사의 능력에서 제외되었던 바로 그 곳이 아킬레스건이다. 스틱스 강물에 무생물이 닿으면 녹아 없어지지만, 생물은 강물에 닿은 부분이 불사의 능력을 갖게 된다. 왜 그럴까? 스틱스 강물이 생과 사의 경계에서 흐르고, 경계에 서 있는 자는 강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보통 경계에 서 있으면 불안하다. 반면, 어떤 한 진영에 있으면 우리는 편안하다. 그 불안이 우리를 고도로 예민하게 유지해 주고, 그 예민성이 경계가 연속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감지 능력을 우리는 '통찰(insight)'이라고 부른다. 통찰력이란 "탁! 하면 아는 것"인데, 세계의 흐름을 단순히 이성적인 계산 능력으로 만이 아니라, 감성이나 경험, 욕망이나 희망 등의 모든 인격적 동인들을 일순간에 발동시키는 능력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오는 고도의 불안을 감당하며 키워 낸 예민함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경계에서 떠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그 세계를 전부로 착각하고, 우리는 그 프레임에 갇혀 굳어버린다. 이 세계를 참과 거짓, 선과 악으로만 본다. 자신의 관점에서 맞는 것만 참이고 선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고 악이다. 이 관점이 바로 이념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세계는 변한다. 한 순간도 멈추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이 변화의 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변화는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흐름은 경계가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과정으로, 흐르는 것은 부드럽다. 변하는 것은 유연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한 것과 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며, 변화가 멈추고 화석화 되어 있는 일이 죽는 일이다. 산 자의 부드러움을 정지시켜 딱딱하게 굳도록 하는 것이 이념이나 신념 같은 것들이다. 세계가 변화라면, 경계의 중첩이라면, 그 흐름을 그 흐름 그대로 마주하여야 한다. 왜? 그래야 그 변화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생명이다. 생명은 경계의 중첩이 흐르고 또 흐르는 과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생명체에 불사의 능력을 주는 스틱스 강은 우리에게 말한다. "경계에 서라! 그래야 흐를 수 있다! 그래야 산 자이다! 그래야 강하다!" 그래 예수께서 일으키는 분열을 받아들이고, 경계에 서야 우리는 정말로 강해진다.
3
역설이다. '패러독스(paradox)'라고 한다. 패러독스는 '겉보기에는 상호 모순이나, 그렇다고 비논리적이거나 완전히 허구인 것은 아닌 문장'을 뜻한다. 대한민국은 SNS 공화국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제기되는 선정적인 의혹만이 사실이다. 그 의혹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외로움을 달래 주고 부러움을 경감해주면 굳건하게 진리가 된다. 이게 IT공화국의 역설이다. 그 사실의 진위와는 상관 없이,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의이고 진실이다. 그런 일에 휘말린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의혹에 비춰진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번거롭게'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좀처럼, 자신이 경험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들이 제기한 소문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판단보다는, 대중이 떠드는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우리는 좀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숙고하지도 않고, 숙고를 통해 자신만의 의견을 도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정신적인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 관한 소문을 말하지만, 베드로는 자신만의 확신을 말한다. 베드로만 예수라는 육체에 숨겨져 있는 신성을 발견했다.
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었다. 산전수전은 동물과 같은 인간을 비로소 신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스승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항상 오해와 질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순간 같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타인들에게 아름다움이 되게 하면서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오해의 대상이다.
이때 남들보다 앞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타인은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앞선 자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외롭다. 세상은 오해 받는 사람들이 진보 시킨다. 오해 받는 인간이 자신의 원대한 꿈과 열정을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면, 그것이 수용되던지 혹은 수용되지 않던지 상관 없다. 그것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다면, 그 진실은 통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곤경에 빠지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그때 누군가 호의로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 나도 누군가 도움을 원하면 호의로 도와 줄 테다. 감정적일 때,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4
<<맹자(孟子)>>의 <고자장구(告子章句)下 15장>>을 소환한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천장강대임어사인야):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맡기려 하면
必先勞其心志(필선노기심지):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苦其筋骨(고기근골): 근육과 뼈를 깍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餓其體膚(아기체부): 몸과 살을 굶주리게 하고
窮乏其身行(궁핍기신행): 생활을 빈곤에 빠뜨려
拂亂其所爲(불란기소위):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所以 動心 忍性(소이 동심 인성): 이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길러 주기 위함이며
增益 其所 不能(증익기소불능):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어떤 비바람과 폭풍은 당신의 인생을 깨끗이 씻겨주려고 온다. 고통 속에 숨겨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사람은 반드시 새로 태어난다. 그러나 불행한 순간에 야말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움직인다. 고난 속에서도 중심을 지킨 사람만이 '다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끝으로 경계에 서는 일은 숭고한 일이다. 숭고(崇高)란 "뜻이 높고, 고상하다"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영어로는 ‘서브라임(sublime)'이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 혹은 ‘넘어서(super)'라는 의미다. 새로우면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limen)'이다. 리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소인 ‘현관(玄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지방'과 같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경계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면, 불안하지만 반드시 거쳐야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런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이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너머 선 어떤 것, 흔히 ‘위대함'을 우리들에게 바라보게 한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다.
숭고한 상태인 서브라임이란 문지방 근처에서 머뭇거리다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숭고함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삶을 경험하면서, 세계를 이끌어 갈 인물로 상장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작은 디딤돌 아래, 아니 근처 경계에 서는 것이다. 서브라임, 경계에 있는 사람의 덕목은 공감 능력과 자비 능력이다.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자비 능력은 다른 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해석하는 능력이다. 이 자비가 연민이다. 연민은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당신의 슬픔'이다. 연민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이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가장 좋은 위로는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 못지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너의 어려운 처지가 나의 어려운 처지처럼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지만, 마음의 얼룩은 걷어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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