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뜻대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은 오만에서 나온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9. 1. 10:02

341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17일)

1
‘뜻대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은 오만에서 나온다. 그리고 세상에 능동적으로 온 인간은 아무도 없다.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나 ‘산다는 게 무엇일 까'란 질문을 품게 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이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해답을 받아들이면 곧 헛헛함이 찾아온다는 거다. 이 문제가 오늘 아침의 화두이다.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주어진 삶의 자리'가 있다. '주어진 삶의 자리'란 '태생적 조건'을 말한다. 열악한 사람도, 풍족한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인생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거다. 어떤 상황이든, 나 자신을, 내 인생을 일으켜 세우는 건 나 자신 뿐이라는 거다.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한다.

2
김기석 목사는 성경 중 지혜서로 분류되는 <전도서>를 읽으라고 한다. “전도서는 ‘하느님이 때를 아름답게 모든 걸 지었다(전 3:11)”고 말한다. 어제는 한 달에 한번씩 가는 성당 등산 모임에서 무주 덕유산에 갔다. 물론 곤돌라를 타고 거의 대부분을 올라가고, 나머지는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행적봉(해발 1514M)까지 다녀왔다. 거기서 만난 하늘과 구름이 정말 아름다웠다. 그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이었다. 오늘 사진이 그 거다. 덕유산(德裕山)은 말 그대로 '덕이 많아 넉넉한 산'이라 한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목(朱木)이었다. 다음은 향적봉을 오르면서 어제 찍은 사진이다.


주목은 상록 침엽수이다. 침엽수이긴 하지만 전나무나 소나무에 비하면 비교적 넓은 잎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나무껍질이 붉은 빛을 띠고 속살도 붉어 주목(朱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목은 주로 해발 700m 이상의 고산지대 경사지에서 서식하는 아한대성 수종이나, 저지대에서도 잘 적응하며, 흔히 관상수로 기른다. 대한민국 전역에서 자라며, 러시아 동부, 일본, 중국 동북부 등에 분포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 살고, 죽어서도 썩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나무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나무는 주목이다. 그만큼 성장 속도도 느리다. 유럽에서도 오래 사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3
다시 <전도서> 이야기로 되돌아 온다. <전도서> “삶에는 심거나 거두는 때, 물러설 때가 있다. 삶 가운데 결핍 뿐 아니라 주어진 게 무엇인지도 깨닫고 이를 한껏 수용할 때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성경 중 지혜서로 분류되는 전도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본문 중 하나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전 1:2)이다. 전도서가 ‘허무주의의 교과서’로 알려진 이유다. 김 목사는 이에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전도서가 말하는 ‘헛됨’은 삶의 본질을 움켜줄 수 없음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아무리 수고해도 자신이 속한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는 의미다.

절대자의 존재를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현실 너머 영원을 사모할지라도 하느님이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순간의 행복을 위해 육체와 마음의 결핍을 채우려 애쓰는 일도 자신을 착취하는 결과만 낳기 쉽다. 전도서의 저자는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전 1:8)고 표현한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 게” 우리네 속성이라고도 한다. 김 목사는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전 1:9)는 말도 이와 관련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이 욕망을 따라 살다 보니, 선대가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통 없이 곤고하기만 한 삶을 살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삶을 기뻐할 수 있다. <전도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제법 괜찮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덮고 있는 어둠이 지극할 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족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쁨을 찾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족하는 마음을 기르는 법’을 익히려면, ‘가져야 행복 하다’는 논리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그게 없어도 행복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자유가 찾아온다. 이를 ‘정신 승리’나 ‘여우의 신포도’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소유 강박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가려는 자발적 의지를 기르고,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과 다른 ‘내 삶의 몫’이 있음을 믿고 욕망을 멈추는 훈련을 해보는 거다. 그리고 성과를 내기 위한 집착과 통제가 아닌 주어진 순간을 하느님 은총으로 인정하는 ‘여백 있는 삶의 태도'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전도서>는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과도 이어진다고 부연했다.

4
‘내가 얻은 깨달음을 타인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한다면 그건 '섣불리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려는 건 과욕'이다. 내가 맑아지면 주변도 맑아진다. 예컨대, 우물을 깊게 파면 누가 뭐 래도 사람이 찾아오듯 먼저 자신이 깊어지면 그 깨달음을 얻고자 주변에서 스스로 찾아온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저마다 ‘내 믿음만 옳다'고 주장하는 작금의 세태가 위험하다. 종교가 인간을 커지게 해야 하는데, 이를 믿는 종교인이 오히려 더 협소해지고 벽을 쌓는 경우를 자주 본다. 나와 다른 세상과 접촉하며 내가 가진 확신을 넓히지 못하는 이들이 울타리를 쌓게 되고 이것이 광신과 근본주의 세계관을 빚어낸다. 오늘날 지구촌에 이런 세계관이 득세하면서 종교가 평화가 아닌 불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거다. 이런 현상이 신앙적 기대를 저버릴 근거는 되지 않는다. 교회가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고 하지만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희망이 돼야 한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남에게 희망을 시작하라고 하지 말고,. 세상이 어떻든 나는 희망을 품고 간다는 마음이 중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안정된 삶과 질병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모두의 소망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할 것이 바로 “햇빛, 공기, 물, 영양, 파장(파동)" 다섯가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계속적인 코로나의 확산으로 인해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 한 가지를 추가해야 할 것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본다.

이것이 희망 입니다.
 
내 입에 따뜻한 말 한마디 담겨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말로 남을 위로 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고
기쁘게 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겨져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발로 집으로 갈 수 있고
일터로 갈 수 있고
여행도 떠날 수 있으니까요.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눈물로 가난과 슬픔으로 지친 이들의
아픔을 씻어 낼 수 있으니까요.  

내 귀에 작은 소리 들려온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말과
아름다운 음악과
자연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가 향기를 맡는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은은한 꽃 향기와
군침도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좋은 친구 한 사람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친구에게 내 마음 털어 놓을 수 있고
지칠 때는 기댈 수 있고
따뜻한 위로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내 가슴에 사랑 하나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마음 가득 사랑이 있다면
기쁨과 행복한 세상 일테니까요.

내 앞에 컴퓨터가 한 대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것으로 글을 쓸 수 있고
일기를 쓸 수 있고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보내는 우리의 일상은 매우 반복적이다. 그래서 사는 게 허무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막연히 좋은 날을 기다리기보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려고 조금이라도 애써본다면 살아가는 게 마냥 허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다. 거기서 얻는 인문 정신은 우리를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는 방편일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세월이지만 비애에 침윤되지 않고 듬쑥하게(사람 됨이 가볍지 아니하고 속이 깊다) 자기 삶을 살아내도록 힘을 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희망을 키워준다. 이때 희망은 스스로 빚는 것이다.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음울한 목소리로 묻는 이들이 있다. 욕망의 문법에 따라 도태되지 않으려고 질주하다 보니 숨은 가빠지고, 어느 순간 외로움과 상실감에 확고히 사로잡혔지만, 그렇다고 하여 멈추어 설 수도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일종의 비명이 희망이다. 희망을 자기 외부 어딘 가에서 찾으려는 이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스스로 빚는 것이다. 

5
오늘의 화두로 되돌아온다. ‘일상에서 영원에 닿는 경험'을 우리는 경외(敬畏)라 한다. 사람들은 종교를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예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 다니던 유대인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종교가 폭력의 진앙이 된 것은 근본주의 탓이다. 자기가 믿는 것만 옳다고 믿는 건 오만이자 무식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신의 가르침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해듯이 삶에 대한 경외가 신이다. 신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경외하는 것이다. 경외는 '공경하면서 두려워 하는 것'이다. 종교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자기 삶을 깊이 보려는 의지이다. 나를 변혁시키려는 하나의 활력소이다. 그래서 종교의 가치는 유효하다. 

경외감 속에서 일상이 영원에 닿는 순간이 오면, 우리는 나와 타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나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서 지평이 열릴 때 경외감의 세계가 찾아온다. 자연의 가없음만 봐도 인간은 말을 잊는다. 예수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한 없는 품을 보고 경외심을 품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품에 깊이 들어갈수록 주어진 삶은 무한한 신비란 걸 알게 되고 타자의 세상도 깊이 수용하게 된다. 그러면서 공부도 깊어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선물로 여기자. 광막한 우주 속 지구란 행성에 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모른다. 이 신비의 세계에 초대받은 우리의 삶 자체를 하느님께 받은 무한히 값진 선물로 여기고 이를 기뻐하며 사는 것. 이것이 진정 잘 사는 거 아닐까? 오늘 아침 사진처럼, 덕유산 향적봉에서 하늘과 구름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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