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사는 시간은 짧다.

341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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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거니의 천박한 형태와 윤의 싸구려 행보를 타산지석으로 공부해야 한다. 그 부부의 죄는 4무(무능, 무도, 무례, 무법)와 부패와 불의를 넘어 우리 공동체의 도덕성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말살했다는 데 죄가 있다. 권력은 눈발 위에 새겨진 발자국 같은 것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늘 기억해야 한다. 권력을 탐하는 사람은 잘 보고 새겨야 한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이케보르크 바흐만) 날개를 갖지 않으려 한다. 그건 '집착즉고(執着卽苦, 집착하면 괴로움이 따른다)'이다. 그 욕망, 아니 탐욕의 날개가 추락하게 하는 거다.
꽃으로 사는 시간은 짧다. ‘꽃’이 진 후, ‘잎’으로 사는 시간이 진짜 인생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을 때 떠올리는 말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시절인연(時節因緣)'에다 덧붙여 '집착즉고(執着卽苦-놓지 못할 수록 더 아프다)'와 '인연즉연(因緣卽緣- 될 인연은 애쓰지 않아도 된다)이다. 이 말들은 불교에서 말하였던 것이다.
결국 인연은 때에 맡기고, 집착은 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진짜 인연은 붙잡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오고, 머물 자리에 조용히 머문다. 가짜 인연은 붙잡아도 멀어지고 애쓸수록 내 마음만 지친다. 사람 사이의 만남과 이별은 '시절인연'의 흐름 속에서 머물다 지나간다. 지금 관계가 버겁다면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애쓰지 말고, 흐르게 두어라. 삶의 중심이 내가 될 때, 진짜 인연은 자연스레 곁에 남는다. <<초역 부처의 말>>에서 말한다. "'시절인연'에 연연하지 마라. 먼저 너의 인생을 살라.'
2
김거니를 보며, 겉치레에 목 메이면 그런 파멸이 온다. 사람은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힘을 절제할 수 있으니까. 신분을 겉치레로 들어내려면 점점 더 거짓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탐욕의 끝은 없기 때문이다. 자꾸 자기 정체성, 신분을 세척하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의 모습은 과거에 했던 일과 행동에서 드러난다. 국회 본회의에서 차명으로 주식을 하던 한 의원을 봐라. 숨어서 못된 짓만 하고, 지역에서 카르텔를 형성하여 4선까지 했으면 그냥 그대로 살았으면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중요한 상임 위원장을 한다고 전면에 나섰다가 과거의 행적들이 들통난 것이다. 4선 하는 동안 입법 활동을 한 흔적이 없다 한다. 그런데, 어떻게 4선이 되었을까? 난 그 정치 시스템을 이번 사회 대개혁의 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번 김거니의 구속도 마찬가지이다. 신분 세탁- 졸업장 위조, 석사, 박사 논문 학력 위조, 그리고 이력 위조에 이젠 신분 위조까지 하다가 덜미가 잡힌 것이다.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
이건 훈육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스캇 팩(Scott Peck)은 자신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그 길을 가기 위한 자기 훈육의 도구로,
▪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 책임을 지는 것,
▪ 진리에 대한 헌신
▪ 그리고 균형 잡기를 제시했다.
거짓이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작은 거짓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작은 거짓들이 보태 진다. 그 다음에는 그런 거짓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생각의 흐름을 왜곡한다. 그 왜곡된 생각의 결과를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거짓이 동원된다. 필요할 때마다 거짓을 행하면서 거짓은 이제 습관이 된다. 거짓이 '무의식적인' 믿음과 행동으로 굳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우리는 이를 '자기 기만'이라 한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이다. 양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무의식 중에 행하거나 의식하면서 강행하는 경우이다. 자기 기만을 피하는 길이 그저 잠시 앉아 살피는 일인데도, 우리는 떠밀려 살아온 관성을 제어할 용기를 못 낸다. 기만이라는 덫에 걸리는 사냥감은 대개 탐욕일 경우가 많다. 나의 탐욕과 집단의 탐욕을 바라보고, 해체하고, 인정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새우가 껍질을 벗고 성장하는 시간처럼 인간도 진정한 어른으로 탈피하는 시간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거짓이 성공을 거두면 그 후에는 교만과 우월 의식이 따라온다. 사실 거짓으로 이룬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 라서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모두 속임수에 넘어간 것처럼 보이면 '나를 제외하고 모두 멍청하다'라는 교만과 우월 의식에 빠지게 된다. '모두 어리석어서 나에게 속아 넘어간다. 따라서 나는 원하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나중에 닥친다. 거짓으로 개인과 현실, 혹은 사회와 현실 간의 관계가 무너질 때 지옥이 찾아온다. 그러니 진실을 보고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 진실은 삶의 깊고 깊은 원천에서 끊임없이 샘 솟는다. 그래서 우리가 삶의 필연적인 비극에 맞닥뜨리더라도 영혼이 위축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늘 기억하는 말이 '정비공'이라는 말이다. 세상에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앞 글자를 따서 '정·비·공'이다. 정답이 없고, 비밀이 없고, 공짜가 없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세상엔 공짜가 없다'인 것 같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다 값을 치룬 것이다. 그런데 김거니는 자기 돈으로 산 것이 없는 듯하다. 대가를 주고 받은 것들 같다. 그런데 그 대가가 우리들의 세금이었다는 데 울분이 생긴다.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정점에 달하면 스스로 드러난다. 정호승 시인의 <거미줄>을 소환한다.
거미줄/정호승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송이송이 소나기가 매달려 있을 때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3
역지사지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성격과 사고방식을 바꿔야 팔자가 바뀐다. 특히 자기를 되돌아보지 못하는 성격이 형성되면, 그 성격을 고치기 힘들다. 자기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기도 하다.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회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와 토론을 거의 하지 않는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대신 암기한다. 그것도 정답이라는 고정된 형태로 암기한다. 생각하는(=회의하는) 과정 없이 고정된 정답을 의식세계에 주입한 우리가 고집불통이 되는 만큼 확증편향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한국 사회는 설득이란 말은 있어도 설득이 되지 않는 사회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도 남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나 또한 아무 한테도 설득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간다. 이런 사회 구성원들에게 확증편향에 한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함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게다가 ‘나’로서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지혜도 갖기 어렵다. 나의 자리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겠는가? 한국인의 확증편향을 강고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그것은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가 되는 길 말고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전제 아래 어렵더라도 이웃을 설득하는 수밖에.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펼쳐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해서 "괴물 같은' 엘리트들이 더 무서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생각 없이 부패하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자 마이클 존스턴은 저서 <<부패의 증후군>>에서 국가 부패 유형을 4가지로 나누며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의 대표 국가로 한국을 지목했다고 한다. 각계 고위층 인사들이 밀접하게 연결돼 이익을 독점하는 형태의 합법적 부패를 가리킨다. 현재의 내란 사태는 한국 사회의 부패 증후군이 곪아 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내란 사태를 통해 뜻밖의 소득이 있었다. 그것은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권력 엘리트들의 민 낯이 낱낱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시는 '괴물 같은' 엘리트들에게 권력을 줘선 안 된다는 것, 괴물 엘리트들을 양산하는 시스템과 교육을 바꾸고자 하는 다짐이 필요하다. 부패가 곪아 터진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일신의 안전과 사리사욕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용감하게 증언한 김형기 특수전사령부 제1특전대대장,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 등에게서 희망을 본다. 경쟁 대신 공동체,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는 새로운 엘리트들의 부상을 꿈꾼다.
역지사지하며 생각하는 기술로 공자와 장자라는 대인(大人)을 만나본다. 공자는 <<논어>>에서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도록 하지 마라)"을 말했다. 이 말은 '상대방을 기준으로 하라'는 말이다. '좋고, 나쁨(好惡, 호오)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이 자체가 이미 이기심의 발로인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지락(至樂)> 편에 노나라의 바닷새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 다음 대목이 있다.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차이기양양저야, 비이조양양조야)". '이것은 자신을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길렀기 때문이고,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에 날아들었다. 노나라 왕은 이 바닷새를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왔다. 술을 권하고, 제례악 음악을 연주해주고, 제사 음식인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부양하는 방법으로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기른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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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위기 앞에서 새 길을 찾기보다 익숙한 길을 먼저 찾는다. 건물에 화재가 나면 자신이 들어온 문으로 나가려 한다. 더 빠르고 안전한 출구가 있어도 그렇다. 일이나 인간관계에 부딪칠 때도 그렇다. 잠을 줄여 성과를 냈거나, 사과보다 침묵으로 갈등을 피했던 사람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려 든다. 하버드대 수전 데이비드 교수(심리학)는 이것을 ‘감정의 경직성’이라 부른다.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안내해도 익숙한 길을 고집하는 운전자와 같다. 더 멀고, 교통 체증이 심한데도 본래 가던 길을 고집하는 것이다. 말 두 마리의 폭과 마차 바퀴 간격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유럽 도로 폭의 기준이 되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은 도로를 새로 설계하지 않고 기존 도로에 맞춰 살았다. 유럽에 유독 경차가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경로 의존성’ 이라고 한다.
사람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먼저 사과하면 지는 거야’ ‘사람은 변하지 않아’ 같은 감정의 경직성은 과거의 직관을 당연시하는 습관에서 생긴다. 닫힌 벽만 보며 열린 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고 말하며, 그 공간에서 우리는 행동을 선택할 힘을 갖는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소설가 백영옥의 말이다. "나는 마음이 유독 불안한 날, 일부러 왼손을 많이 쓴다. 왼손으로 문을 열고 밥을 먹고 양치질을 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낯선 동작을 하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던 감정적 습관을 깨뜨릴 수 있다. 왼손 설거지가 움직이는 명상이 될 수 있듯 왼손을 쓰는 것 역시 요가가 될 수 있다. 이 작은 변화가 우리의 고정된 반응 패턴을 깨고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만든다. 화가 날 때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던 사람이 산책을 나가거나, 슬플 때 침대에 누워만 있던 사람이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는 것도 방법이다. 몸도 마음도 세상도 끝없이 변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변화에 대한 반응 뿐이다. 그 첫걸음은 왼손을 쓰는 것처럼 작고 단순한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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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불관언(吾不關焉)'에 대해 생각해 본다. 좋은 관계를 이루는 규칙은 '서로 구제하려는 시도조차 하면 안 된다'이다. 그러나 문화적 인습이라는 중력이 끊임없이 우리를 그 반대쪽으로 끌어 당긴다. 즉 '서로를 구제하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인 것처럼 행동한다. 오지랖을 피지 않는 거다. '오지랍'은 잘못 쓴 거다. '오지랖'은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뜻한다. 옷자락이 다른 옷을 덮는 모양을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의 성격에 빗대어 '오지랖이 넓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라는 표현으로 '오지랖이 넓다'고 한다. 자기와 관련 없는 일에 나서서 이러니저러니 참견하고 훈수를 두거나, 여기저기 다니며 간섭하고 모든 일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사용한다.
오불관언(吾不關焉)'은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즉 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모른 채 한다는 말이다. 프랑스어는 '즈 멍 푸(Je m'en fous)'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네 알 봐 아니다', '그건 네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의미이다. 비슷한 말로 수수방관(袖手傍觀)이 있다. 그 뉘앙스는 다르다고 본다. 말 그대로 하면,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다'는 말로, '관여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프랑스어의 'Je m'en fous'는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주체적 결심에서 나온 말로 나는 이해했다. 살다 보면, 주변에 '오지랖 넓은' 사람 때문에 신경 쓰이는 일들이 있다. 괜히 남의 일에 간섭하는 일 말이다.
다른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한 사회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은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이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그동안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우칠 기회가 없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사는 사회는 일상이 영위되는 공간, 존재가 귀속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성숙한 사람들은 그래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을 낯설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민 낯을 그대로 비춰주고,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낯설게 보여주는, 그런 '불편한 거울'이 있으면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윤과 김거니는 '거울'이 없다.
'오불관언(吾不關焉)'은 내가 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옆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어떤 이는 나이 먹으면 아내의 말에 또박또박 대꾸하지 말며 세상사에 혹은 정치 뉴스에 추월하하고 살아가라는 의미로도 해석한다. 어떤 상황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판단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불관언은 때로는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세상사에 너무 무관심해도 살아가는 맛이 없으니 적절한 태도가 필요하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