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10%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로 구성되며, 나머지 90%는 그 일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구성된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19일)
미국의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카 J. 파머(Parker J. Palmer)를 만난다. 그의 책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이다. 이 책은 파편화된 삶에 지친 우리를 온전한 삶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사는 거다. 온전한 자들은 자신의 기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권력을 틀어쥔 사람들은 외부의 권력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는 구성원들 간의 분리를 권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우리들의 삶을 파편화 시킨다. 사회구성원들끼리 서로 싸우게 한다.
이렇듯 우리는 분리된 삶을 살면서 터무니 없는 대가를 치른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확신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내가 나의 감정을 무시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이 그 출발은 '나 자신과의 관계'로 부터 이다. 내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결국 내가 남에게 하는 행동이다.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자세히 보면, 자연도 완벽하지 않다. 다만 변화하고 순환할 뿐이다. 완벽한 생태계가 있지 않다. 서로의 죽음으로 서로를 살리고, 어디선가 균형이 무너지면 어디선가 균형을 다시 세운다. 그저 '균형 찾기' 이다. 균형 자체가 되면, 그건 죽음이다. 하나의 상태에 이른 순간은 죽음일 뿐이다. 자연은 멈춤이 없다. 삶도 그렇다. 멈추지 않는다. 삶 안에는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고, 혼란과 질서도 함께한다.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삶이다. 삶의 반대말은 멈춤 이고, 죽음이자, 완벽함이다.
사회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세상을 조종할 능력을 주는 '객관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일에 소홀하다. 앞에서 말한 객관적 지식은 세상을 주무르고, 조종할 능력을 제공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오히려 우리들이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 이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한 가지에 집착한다는 뜻은 균형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분리되지 않는 삶으로 계속 나아가길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관계,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공동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기기만 능력이 아주 뛰어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사는 법"이 필요하다.
나는 그런 공동체에서 다음과 같이 살고 싶다. 아무리 사소한 고민도 자기 일처럼 잘 들어 주고 맞장구 쳐 주는 사람, 화가 나고 속상한 마음을 내려놓고 웃길 바라는 사람,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 해도 억울하다고 하면 무작정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의 10%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로 구성되며, 나머지 90%는 그 일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구성된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다. 다 사는 거 비슷비슷하다. 오늘 시처럼, 그리고 사진의 계룡산처럼, "배경이 되는 기쁨"으로 살고 싶다. 실력보다 긍정적인 태도와 활동으로 관계를 넓혀가고, 그 관계로 커뮤니티를 만들어, 그 태도와 활동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삶을 살고 싶다.
배경이 되는 기쁨/안도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구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별을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함께 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연어 떼처럼
생활의 편의를 위한 도구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지만, 가슴의 헛헛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무덤덤할 뿐 좀처럼 감탄할 줄 모르는 정신의 혼수상태에 빠진 이들이 의외로 많다. 도로테 쥘레는 이런 이들을 '고장난 존재'라 했다. 지향조차 분명치 않은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간다. 그런 내달림 속에서 공허함이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낯선 존재를 발견한다. 존재의 불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인들은 공적인 역할의 세계와 감춰진 영혼의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분리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분리된 일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일수록 영혼과가 접촉을 끊고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 속으로 숨어들기 일쑤다. 하지만 참된 삶은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열린다. 파커 파머는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못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며 그것을 일러 '신뢰의 서클'이라 했다.
그 모임은 값싼 위로를 제공하지도 않고, 바로잡으려 들지도 않는다. 조용하게 그리고 존중하는 태도로 서로의 영혼의 소리를 경청할 뿐이다. 옛 성인은 우리가 대지를 딛고 서기 위해서는 다만 몇 평의 땅만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실제로 쓰지 않는 땅을 모두 파 없애 버리면 서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주위가 온통 벌어진 틈이고 허공이라면 누 군들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인은 그 이야기를 통해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누구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별을 빛나게 하는/까만 하늘처럼."
세상은 내게 '충고'하지만, 우리는 조용히 내 가슴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들어야 한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그때마다 상대방은 더욱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바로잡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순간 상대방은 굴욕감을 느끼게 되고, 그가 심리적인 참호 속으로 퇴각하면, 모든 관계는 단절되고 만다. 그것은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혼은 날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신뢰의 서클> 안에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로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일상의 순례길을 걷는 것이다. 그 순례길을 걷는 사람은 구도자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정화 스님이 말했다는 '별별해탈"을 소개하였다. '집착과 욕망의 불꽃을 조금씩 끌 때마다 해탈이 된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탐진치'가 존재를 다 잠식해 버릴 정도로 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착의 불을 끄는 것이 열반이고 해탈이다. 그리고 그런 해탈을 이루는 것이 수행이다. 매일 수행을 하지 않으면 욕망과 능력의 간극, 그 사이에서 오는 '탐진치'의 불꽃을 제어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동양 철학은 종교하고 구별이 잘 안 된다. 동양은 철학이 곧 종교이다. 인격신 대신 천지를 준칙으로 잡는다. 서양은 인간과 자연을 뛰어넘는 초월자를 인격신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인간의 원초적 동력이다. 모든 존재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이고 구도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공무원 시험, 임용 고시 같은 어려운 일들은 기꺼이 한다.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의 확충이나 인식의 자유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하다. 가치에 대한 사유, 삶에 대한 탐구는 게을리 한다. 그러나 철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철학은 내 행동과 일상과 관계, 나아가 삶 전체를 규정하는 키이다. 왜냐하면 세계를 보는 눈을 바꿔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유행에 휩쓸려서 뭘 하게 되면 금방 식어 버린다.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이든 인생이든 뭔가를 바꾸려면 관점이나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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