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바라기 전에 행운을 바라자.

340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6일)
1
오늘의 <인문 일지> 화두는 '운(運)', 더 나아가 '행운(幸運)'이다. '행복을 바라기 전에 행운을 바라자'는 주장에 눈길이 간 것이다. 윈스턴 처칠이 건배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건강이나 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행운만을 빌 뿐입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호에 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했고 부유했지만, 그들 중 운이 좋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고위 임원은 9/11 테러에서 살아남았다. 그날 아들의 유치원 첫 등교일이라 데려다 주느라 회사에 늦었기 때문이다. 또 한 남성은 도넛을 사러 가는 차례였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어느 여성은 알람이 울리지 않아 늦잠을 자는 바람에 살아남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뉴저지 교통 체증에 걸려 회사에 늦었다. 어떤 사람은 버스를 놓쳤고, 다른 이는 커피를 쏟아 옷을 갈아 입느라 늦었다.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지 아 못 간 사람도 있었고, 집에 전화 받으러 되돌아갔던 사람도 있었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유난히 느리게 준비해서 지각했고, 어떤 남성은 택시를 잡지 못해 결국 회사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날 새 신발을 신고 출근하던 한 남성이 있었다. 신발이 불편해 발이 부었고, 그는 약국에 들러 밴드를 사기 위해 멈췄다. 그 잠깐의 정지가 바로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그 이야기들을 읽은 이후로,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차에 갇혀 길이 막힐 때, 엘리베이터를 놓쳤을 때, 뭔가를 깜빡하고 되돌아가야 할 때, 아침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서 믿어보려 한다. '이 지연이 결코 ‘실패'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의 시간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음에 우리가 아침이 엉망이 되어버릴 때, 아이들이 늦장을 부리고, 열쇠가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빨간 불마다 걸려서 짜증이 날 때, 화를 내지 말자. 스트레스 받지 말자. 그건 어쩌면 ‘변장의 행운’ 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힘든 일은 남 탓이 아닌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우산위의 눈도 무겁고, 내 몫이라고 생각하면 등짐으로 짊어진 무쇠도 가볍다."(김난도) 남 탓을 하면 당장은 위로가 된다. 그러나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될 뿐이다. 내 몫이라고 생각하면 당장은 힘겨울 수 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상황은 개선되고, 나는 더욱 더 강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어떤 길을 갈 것인지 내가 결정한다.
행운은 눈이 멀지 안 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을 찾아온다.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걷는 사람만이 나아갈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행운이 찾아온다. 원하는 것도 인생의 목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행운은 그들에게서 아무 의도도 발견할 수 없기에 그들 곁을 지나쳐 버린다.
2
가진 것에 감사하자. 나 스스로 행운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지금껏 내가 이룬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건강, 가정, 가족의 사랑,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 고마워한다면, 불행에 괴로워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운의 분명한 유형을 알게 되고 더 많은 행운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고 거기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면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배려를 종종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길까?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결실”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기대하지 않을 때 선물처럼 감사가 찾아오는 역설을 강조한다. 애타게 바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처럼. 감사함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할 때라야 찾아온다. “나는 신발이 없어 우울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길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의 시를 공유한다. "하늘은 나에게 사람들이 탐낼만한/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지만/그 모든 씨앗이 담긴 삶을 다 주셨으니/무력한 사랑 하나 내게 주신 / 삶에 대한 감사를 바칩니다."
삶에 대한 감사/박노해
하늘은 나에게 영웅의 면모를 주지 않으셨다
그만한 키와 그만한 외모처럼
그만한 겸손을 지니고 살으라고
하늘은 나에게 고귀한 집안을 주지 않으셨다
힘없고 가난한 자의 존엄으로
세계의 약자들을 빛내며 살아가라고
하늘은 나에게 신통력을 주지 않으셨다
상처 받고 쓰러지고 깨어지면서
스스로 깨쳐가며 길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위대한 스승도 주지 않으셨다
노동하는 민초들 속에서 지혜를 구하고
최후까지 정진하는 배움의 사람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내 작은 성취마저 허물어 버리셨다
낡은 것을 버리고 나날이 새로와지라고
하늘은 나에게 사람들이 탐낼만한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지만
그 모든 씨앗이 담긴 삶을 다 주셨으니
무력한 사랑 하나 내게 주신
내 삶에 대한 감사를 바칩니다
3
어제 읽지 못한 <산풍 고> 괘의 효사들을 앍고 공유한다.

'구삼'의 효사는 "九三(구삼)은 幹父之蠱(간부지고)니 小有悔(소유회)나 无大咎(무대구)리라" 이다. 번역하면, '구삼은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니, 조금 후회가 있으나 크게 허물은 없을 것이다'가 된다. TMI: 悔:뉘우칠 회, 咎:허물 구. 아버지의 "고(고)"를 관장하는 것은 작은 후회가 있겠지만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 과거의 욕망을 정리하고 새 출발 하라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구삼'은 양 자리에 양으로 있고 중을 얻지 못하였다. 응하는 자리가 상구로 같은 양이니 아버지의 일을 맡아 주장하는 격이다. 그런데 중도를 얻지 못해 지나치게 일을 처리할 수도 있고, 내호괘가 <태괘 ☱> 연못이니 조금 후회스런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선대의 일을 맡아 주장하는 것이니 큰 허물을 짓는 것은 아니다.
'구삼'은 내괘의 끝에 위치하여 득위한 양으로 실중하여 중도를 갖추지 못했기에 외호괘 <진괘>로 더욱 강하게 움직이려고 한다. 이는 마치벌레 먹은 내과 <손괘> 음목(陰木)을 <진괘> 양목으로 보완하여 <초육>의 부친의 "고(蠱)"를 처리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진괘> 장남이 부친의 "고(蠱)"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구삼'이 동하면, 내괘가 <감괘>, 물로 뱐한다. 장남의 노력은 부친의 "고(고)"를 없애기는 커녕 오히려 "고(蠱)"를 더 키운 성향이 되었다. 여기에서 "小有悔(소유회)"의 의미가 나온다. 그리고 '구삼'이 동하면, 호괘가 제24괘인 <지로 복(地雷 復)> 괘로 변하게 된다. <중지 곤> 괘의 '육음' 상황에서 땅 맨 아래에 '일양(一陽)'이 피어나는 상이다. <지뢰 복> 괘의 ''일양은 새로운 출발이자 희망이다. 상서롭지 못한 "고(蠱)"의 음기들이 가득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첫 걸음이다. 비록 한꺼번에 바로잡지 못해 직은 후회가 남지만 끝애 <중천 건> 괘의 '육양' 시대를 맞이할 것이므로 하늘의 본성을 완전히 되찾는 세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无大咎(무대구)"의 읨가 나온다. 공자가 <소상전>에서 사용한 "종(종)"의 뜻 역시 <중천 건> 괘의 시대를 염두에 둔 것이다.
'구삼'이 동하면, 지괘는 제4괘인 <산수 몽(山水 蒙)> 괘가 된다. 이 괘의 '육삼 효사는 "六三(육삼)은 勿用取女(물용취녀)니 見金夫(견급부)하고 不有躬(불유궁)하니 无攸利(무유리)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육삼은 여자를 취하지 말아야 하니, 돈 있는 사내를 보고 몸을 두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다'가 된다. 여자를 취하지 말라. 돈 많은 남자를 보면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상풍 고> 괘의 '구삼' 및 <지뢰 복> 괘와 연결하면 "고(蠱)"를 바로잡는 과정이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고(蠱)"에 굴복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며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친 또는 전임자의 "고(蠱)"란 아들 또는 후임자가 겪어 보한 것이다. 실상을 완벽하게 알 수 없다. "몽(蒙)"의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일거(一擧)에 일소(一掃)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최종적인 결과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과거의 외적인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부친의 "고(蠱)"를 본다면, 과거에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외적 욕망을 바로잡는 과정은 아쉬움, 후회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올바른 인생의 목표를 향해 새 출발 하는 것이니 큰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삼'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幹父之蠱(간부지고)는 終无咎也(종무구야)니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함은 마침내 허물이 없다'가 된다. 아버지의 "고(蠱)"를 관장하는 것은 결국에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4.
<산풍 고> 괘의 '육사' 효사는 "六四(육사)는 裕父之蠱(유부지고)니 往(왕)하면 見吝(견린)하리라" 이다. 번역하면, '육사는 아버지의 일을 여유롭게 하니, 가면 인색함을 볼 것이다'가 된다. TMI: 裕:넉넉할 유·늘어질 유·관대할 유, 吝:인색할 린. '육사'는 음자리에 음으로 있어 지나치게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상황이다. 그러니 선대 아버지의 일을 제때에 해결하지 않아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또한 일처리도 정확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적당히 한다. 이렇게 해 나가면 인색하게 된다는 거다. 아버지의 "고(고)0"를 처리하는데 느긋하니 나아가면 인색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욕망을 끊어내는데 우유부단하지 마라는 거다.
외호괘가 <진괘>로 <진괘>에는 결단하여 나아가는 성질이 있다("震爲決躁, 진위결조"). '육사'가 동하면 외호괘가 <태괘> 연못이 되어 외호괘 <진괘>를 '금극목(金剋木)'하니 느긋하다("裕, 유")는 뜻이 나오게 된다. <태괘>에는 부딪쳐서 꺾인다는 의미(澤爲毁折, 택위훼절)가 있으니 부친의 "고(蠱)"를 바로잡는 일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추진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또한 외괘가 <간괘>로 일을 그치는 상이 된다.
'육사'는 득위한 음으로 지나치게 나약한데다 위와 같이 느긋하니 일을 하겠다고 나아가봤 자 결과가 그리 좋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이를 "見吝(견린)"이라고 했다. "인(吝)"은 '아낀다'는 뜻으로 자기 반성에 인색하고 변화를 주저하는 태도라고 했다. '뉘우침(회)'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얻을 것도 없다. <소상전>에서 공자가 "未得(미득)"이라고 하여 "견린"의 의미를 분명히 했다.
'육사'가 동하면, 지괘는 제50괘인 <화풍 정(火風 鼎)> 괘가 된다. 이 괘의 '구사'는 "九四(구사)는 鼎(정)이 折足(절족)하야 覆公餗(복공속)하니 其形(기형)이 渥(악)이라 凶(흉)토다" 이다. 번역하면, '구사는 솥이 발이 부러져서 공의 밥을 엎으니, 그 얼굴이 젖는다. 흉하도다'가 된다. '솥발이 부러져서 공의 음식물이 엎어져 사방이 젖으니 흉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솥의 발이 왜 부러졌을까? 음식물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단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산풍 고> 괘의 '육사'와 연결하여 이해하면 유약한 '육사'는 부친의 "고(蠱)"를 바로잡을 역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부친의 "고(고)"를 과거에 외적으로 추진했던 '나'의 욕망 관점에서 읽으면, 과거의 욕망을 현재에도 그대로 용납하고 나아가면 궁색하게 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욕망을 바로잡는데 느긋한 것은 곧 그 욕망을 끊어낼 의지가 부족한 것이고, 그 욕망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용납하는 것이다.
'구사'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裕父之蠱(유부지고)는 往(왕)엔 未得也(미득야)라"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여유롭게 하는 것은 가면 얻지 못한다'가 된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는데 지지부진하게 적당히 해 가면, 결국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한다는 거다.
5
<산풍 고> 괘의 '육오'는 "六五(육오)는 幹父之蠱(간부지고)니 用譽(용예)리라" 이다. 번역하면, '육오는 아버지의 일을 주장하니, 명예로울 것이다'가 된다. TMI: 用:써 용(以), 譽:명예 예·기릴 예. '육오'는 외괘 <간산(艮山) ☶>에서 중을 지키고 있다. 그야말로 선대 아버지의 일을 중도로 덕이 있게 해결하니, 명예로울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고(蠱)"를 관장하면 명예롭게 될 것이다. 타인의 공과를 덕으로 살피라는 거다. '육오'는 비록 양 자리에 음으로 있지만 득중하여 유순한 덕을 갖춘 리더이다. 그래서 공자는 덕으로 계승한다고 했다("承以德, 승이덕)". <소상전>은 "象曰(상왈) 幹父用譽(간부용예)는 承以德也(승이덕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해서 명예로운 것은 덕으로 잇기 때문이다'가 된다. 여기서 <소상전>의 표현이 달라진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초육'부터 '육사'따지 공자는 효사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풀이했다. 즉 효사에 표기된 "幹父之蠱(간부지고)", "幹母之蠱(간모지고)", "裕父之蠱(유부지고)"를 <소상정>에도 그대로 썼지만, '육오'에 와서는 "지고(之蠱)"를 생략하였다. 이것은 공자의 의도로 봐야 한다. "고(蠱)"만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부친의 공과(功過)를 두루 계승한다는 것이다. '공(功)'은 그 뜻을 기려 더욱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계승해야 하는 것이다. '과(過)'는 부친의 오류와 허물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따지고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부친을 전임자로 보면 공자의 의도는 더욱 뚜렷해 진다. 공과를 함께 논할 때 우리는 '타산지석'과 '반면교사'의 교훈을 동시에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객관적인 평가의 대상으로 삼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일을 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공'만을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겠지만, 인간은 결코 100%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오히려 의도적으로 '과'는 축소하고 '공''을 부풀리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풀려나면 결국 '공'보다 훨씬 많은 '과'에 대한 비판과 비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인간사이다. '공(공)'이란 다만 일관되게 공사(공사)를 구분하는 데서 쌓인다는 것을 알면 쓸데 없는 짓을 할 시간에 꼭 해야 할 일들을 하는데 집중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육오'는 특히 '구이'와 정응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효' 리더가 유순한 경우 정응하는 '구이' 신하, 부하 직원이 있을 때 리더는 그의 보좌를 잘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앞에서 자주 보아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다. '육오' 리더가 '구아'의 지위, 나이, 평판에 연연하지 않을 때 '구이'는 아랫사람이지만 마치 스승과도 같이 리더를 보필하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점을 쳐서 <산풍 고> 개의 '육오'를 얻었을 때는 그런 사람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전임자의 사람이라고 무조건 배척하고 외면하는 것은 "幹父用譽(간부용예)"의 길과 아주 멀어지는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는 전임자의 공과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며, 과거를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학습하여 새로운 미래로 빠르게 이동하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이다. 너그러운 '용인(用人)' 철학이야 말로 리더 스스로를 명예롭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중도(中道)로 선대의 일을 잘 마무리하니, 새롭게 상황을 고쳐 나갈 수 있다.
'육오'가 동하면, 지괘는 제57괘인 <중풍 손(重風 巽)> 괘가 된다. 이 괘의 '구오' 효사는 '九五(구오)는 貞(정)이면 吉(길)하야 悔亡(회망)하야 无不利(무불리)니 无初有終(무초유종)이라. 先庚三日(선경삼일)하며 後庚三日(후경삼일)이면 吉(길)하리라" 이다. 번역하면, '구오는 바르게 하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어져서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처음은 없고 마침은 있다. 경(庚)으로 먼저 삼일(三日)하며 경(庚)으로 뒤에 삼일(三日) 하면 길할 것이다'가 된다. '바르게 하면 길하여 후회가 없어질 것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시작은 없으나 유종의 미가 있을 것이니 "선경삼일"하면 "후경삼일"하여 잘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선경삼일 후경삼일"은 <산풍 고> 괘 괘사에 등장했던 "선갑삼일 후갑삼일"과 동일한 패턴임을 알 수 있다. "선경삼일 후갑삼일"은 '"申壬癸甲乙丙丁(신임계갑을병정)'의 순서로서 甲을 중심으로 甲 이전의 삼 단계와 甲 이루의 삼 단계가 연결되어 계(癸)로 마감(終)되고 갑(甲)으로 다시 시작하는 하늘의 이치에 따를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선경삼일 후경삼일"은 "정무기경신임계(丁戊己庚申壬癸)'의 순서로서 여기에는 '갑경충(甲庚沖)'의 이치가 담겨 있다. 고 신영복 교수의 말을 공유한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부친, 전인자의 일 그리고 외적으로 추진했던 과거의 욕망을 지혜롭게 계승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르게 세울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굳이 추구하지 않더라도 명예를 부산물로서 얻을 수 있다. 물론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 과정의 핵심이 바로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인 것이다. '갑경충'의 자세이다. 고집스러운 자기자신에 대한 면면한 혁신이다.
'육오'가 동하여 만들어지는 지괘인 <중풍 손> 괘 괘사가 "巽(손)은 小亨(소형)하니 利有攸往(이유유왕)하며 利見大人(이견대인)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손(巽)은 조금 형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며 대인을 봄이 이롭다'가 된다. 조금 형통하니 나아가면 이롭고 대인을 만나면 이로울 것이라는 거다. 공손하고 겸손하게 작 안으로 들어가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고 큰 사람으로부터 배울 때 '시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시작을 위한 "선갑삼일 후갑삼일'은 자기 자신에세 적용해야 할 이치라는 거다. 만일 이를 타인에게 잣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육오'의 <소상정>은 "象曰(상왈) 幹父用譽(간부용예)는 承以德也(승이덕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아버지의 일을 주장해서 명예로운 것은 덕으로 잇기 때문이다'가 된다. 아버지를 관장하여 명예롭게 되는 것은 덕으로 계승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한 개 남은 '상구의 효사는 내일로 넘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