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한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8. 11. 14:27

4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일기
(2021년 8월 10일)

마을 활동이 점점 확장된다. 그럴수록 지난 4년 전에 먹었던 마음을 다시 소환한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하라."(신영복) 이상은 마음 속에 지니고, 실천은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으로 하라는 말로 나는 이해 한다. 생각은 비판적으로 하되, 실천은 현실주의자처럼 하라는 말로 나는 이해한다. 생각은 좌파처럼 하고, 행동은 우파처럼 하라는 말로 바꾸어 본다. 이 말은 전통과 주어진 현실의 조건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속으로는 좌파적인 생각을 하더라도, 현실에서 말과 행동은 우파적으로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실천을 해 그 뜻을 이루려면, 함께 일하거나 함께 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이해관계를 충분히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 정서이다. 이론이나 생각은 좌파적으로 하라는 말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 피함, 또는 하지 않음으로 순화)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나가려는 것이다. 모든 실천도 그러한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실천과 이론은 함께 간다는 점이다. 실천의 경험을 정리하면 이론이 되는 것이다. 체 게바라의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문제는 우리 나라 우파라는 하는 이들은 '진짜' 우파(右派)'가 아니다. '진정한' 보수가 아니다. 사적 이익'과 권력에 '찌든' 집단으로 나는 간주한다.

좌파(左派)는 무엇이냐? 공부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좌(左)를 보면 '공(工)' 자가 들어가 있는 게 보인다. 공부한다는 뜻 아닌가. 공부하기 위해서는 일단 책을 좋아해야 한다. 우파는 뭐냐? 우(右)를 보면 입 '구(口)' 자가 들어가 있다. 입(口)은 먹으려고 있는 것이다. 우파는 먹는 것을 중시하는 노선이 되는 셈이다. 옛날 어른들이 밥상머리에서 아이들이 밥숟가락을 잡을 때 왼손으로 잡으면 혼을 내고 꼭 오른손으로 잡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먹다 보면 돈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우파는 돈과 먹을 것을 중시하는 성향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사실 좌파 또는 좌익(左翼, left spectrum)이니 우파 또는 우익(右翼 right spectrum)이니 하는 말은 정치 성향을 좌우로 분류한 체계이다. 대체로 사회적 평등을 옹호하는 입장을 좌익, 기존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을 우익이라 한다. 이 말들은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 의회에서 혁명파는 좌측, 왕당파는 우측에 나뉘어 앉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념이 다양한 사회에서는 좌파, 우파의 구분이 대개 추구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좌익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평등을 위한 정부의 개입과 사회의 진보를 주장하고, 우익은 경제적 자유와 사회질서의 유지를 옹호한다. 나는 가치 추구면에서 좌파이다. 왜냐하면 나는 현상을 유지하자는 보수보다, 길 위에 나아가자는 진보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마드적인 삶을 추구한다. 안주, 정주(定住)보다는 유목적인 삶을 더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보도 엑셀과 브레이크가 공존할 때 가능하다. 그냥 나아가기만 한다고 진보가 아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사회가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과두 지배하는 사회이다. 유럽의 다양한 정치 지형에 비해, 우리는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수구'와 '보수'가 손을 잡고 권력을 분점 해오고 있는 구도라는 말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것을 '수구(守舊)-보수(保守) 과두지배(oligarchy)라 불렀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 대 진보'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보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체이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한다. 반대로 개인을 공동체보다 더 중시하는 쪽이 자유주의이다. 보수가 공동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바로 가장 근원적인 공동체로서 민족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래 보수주의자는 대부분 민족주의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보수라는 자들은 민족을 경시하고 외세에 붙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일 뿐이다.

한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 까지만 살다 간다. 우리들의 문명은 다음과 같이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 가장 아래 층은 구체적인 물건들로 채워진다.
- 둘째 층은 구체와 추상 사이에 있는 제도들로 채워진다.
- 가장 높은 층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철학이나 윤리나 문화같은 것으로 채워진다.

제도는 인간이 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물건들이 생산되고 삶이 영위된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제도는 철학이나 문화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제도는 길이다. 길을 한문으로 도(道)라면, 이 세상 최고 도는 우주, 아니 자연의 도이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의 길을 내고,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식의 길을 낸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진다. 자연에 가까운 길로 살고 싶은 것이 '낙도(樂道)'이다. 그 길을 즐기는 것을 나는 권한다. 제도도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제도 안에 머물러 있다. 그래 오늘 아침시로 김승희 시인의 <제도>를 공유한다.

제도/김승희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깔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길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 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개 뭉개 꽃 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 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유교적 가치관에 놓고 보면 우파보다는 좌파가 위에 있다. 유교는 책과 공부를 중시하는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의 방위 개념으로 볼 때도 좌파는 동쪽에 해당하고 우파는 서쪽에 해당한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인 동쪽은 양의 방향이다. 해가 지는 서쪽은 음의 방향인 것이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는 약간 더 높은 위계이다. 섹스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밀교 노선도 '좌도밀교(左道密敎)'이다. '우도밀교(右道密敎)'는 금욕과 명상, 절제로 가는 노선이다. 화끈하고 매력적이기는 우도보다는 '좌도밀교'이다. 하지만 아무나 쉽게 좌도에 접근했다가는 거의 실패로 끝난다.

다시 좌파로 돌아가 공부란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공자는 "옛날 학자는 자신을 위해 공부했고, 요즘 학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를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라 말했다. 유교의 선비들이 생각했던 공부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인(人)은 타인을 가리키고, 기(己)는 자기 자신에 해당 한다. '위인지학'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공부이다.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스펙'을 쌓는다는 것은 모두 다 '위인지학'이다. 스펙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아닌가?

그러니까 '위기지학'은 자신을 충실히 쌓아가는 공부이고, '위인지학'은 남에게 보이고 과시하기 위한 공부이다. '위기지학'을 하는 사람은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즉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기뻐한다. 당연히 그 한계는 없다. 하지만 '위인지학'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수시로 비교하며 남보다 앞서기 위한 공부를 한다. 남보다 빠른 출세,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 되면 공부를 멈춘다. 왜냐하면 애초에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올바른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지학' 하는 사람들은 실력을 쌓고 자신을 가다듬어 간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하찮은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실력이 자연스럽게 겉으로 배어 나오게 된다. 마치 가득 찬 독에서 물이 넘치듯이,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아도 실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알게 된다. '내공(內供)'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순자의 멋진 표현을 다음과 같이 공유한다.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 와 마음에 붙어서 온몸으로 퍼져 행동으로 나타난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 와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겨우 네 치에 불과하니, 어찌 일곱 자나 되는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이다. 그리고 공부의 마지막은 일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이 계속되는 한 공부는 끝이 없다. "인간은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땅에 남기는 발자국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고 했다.

조선의 선비들이 생각했던 공부도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나뉘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人)은 타인을 가리키고, 기(己)는 자기 자신에 해당한다. '위인지학'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이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공부이다. 반대로 위기지학은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혼자 있을 때 삼가고 조심하는 공부이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스펙'을 쌓는다는 것은 다 '위인지학'이다. 스펙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 아닌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는데, 사회로 지탄 받고 있는 586세대는 '러시아혁명사'와 '사회학적 상상력'을 밤새워 읽었던 사회과학의 세대였는데, 지나고 보니까 위인지학만 열심히 한 셈이었다. 사회과학의 관심은 온통 사회구조적 문제에 있었지 자기 자신의 사욕과 이중성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었다. 사회를 분석하고 타인의 흠결을 송곳처럼 지적질 하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자기 오류를 인정하고 허물을 반성하는 공부는 하지 않았다. 모든 게 사회악 탓이었다. '위기지학'은 어려운 공부이다.

요즈음 돌아 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극우파'의 모습을 보이며 등장한 두 전직 관료의 대선 후보를 보면, 위기지학은 커녕 위인지학도 제대로 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들을 보면 586을 탓할 때가 아니다. 문제는 소위 '고시' 공부만 했다. 진짜 공부를 하지 않은 자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였음이 백일천하에 그대로 드러난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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