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상마련(事上磨鍊): 자신의 맡은 바 일을 하면서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8. 9. 20:13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8월 9일)

'사상마련(事上磨鍊)"이란 말이 있다. '자신의 맡은 바 일을 하면서 자신을 연마하고 단련한다'는 뜻이다. <<전습록(傳習錄)>>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말이라 한다. "심신이 고요할 때는 좋은 의견과 생각이 떠오르다 가도 일을 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데 어찌 그런 가요?" 왕양명이 다음과 답했다. "그것은 심신을 고요한 곳에서 수양할 줄만 알고 자신을 이겨내는 극기의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어떤 일에 부닥치면 그 일에 빠지기 쉽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을 하면서 자신을 연마해야만 비로소 입지를 세워 고요함 속에서도 안정될 수 있고, 움직임 속에서도 안정될 수 있는 것이란다." 이는 수양(修養)은 동정(動靜)에 구애되지 말고 일관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닦는 수련은 일상 속에서 하는 것이지 깊은 산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상마련"은 수양처, 즉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통해서 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양명학은 일상에서 수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다. 선 선비들은 매일  "거경(居敬), 궁리(窮理), 역행(力行)"을 추구했다고 한다. '거경'은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이다. 그러나 거경은 진통제이다. 아직까지는 무지와 아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궁리는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이다. 그러니까  궁리는 치료제이다. 끝으로 역행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자가 하급관리로 일하고 있는 조카 공멸에게 물었다. "네가 일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이냐?" 공멸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은 것은 세 가지나 됩니다. 첫째는 일이 너무 많아 공부를 하지 못했고, 둘째는 급료가 적어 주변 사람들을 대접하지 못해 평판이 나빠졌으며, 셋째는 공무에 바빠 친구들과 멀어졌습니다." 얼마 지나 공자는 제자 복자천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도 공멸처럼 낮은 벼슬에 있었다. "저는 잃은 것은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는 일하면서 배운 것을 실행하게 되어 배운 내용이 더 확고 해졌고, 둘째는 급료를 아껴 주변 사람들을 대접하니 그들과 더 친숙 해졌으며, 셋째는 공무 중에 짬을 내어 친구들과 교제하니 우정이 더 두터워졌습니다." 배연국 세계일보 논설위원의 글에 얻은 거다.

'격물치지(格物致知)'가 필요하다. '격물치지'는 동양 고전 <대학>의 8조,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속한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본말(本末)과 시종(始終)을 파악하여 지혜를 이룬다.' 그러니까 중심(중요한 것)과 주변(사소한 것), 시작과 끝을 잘 알고 일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 물건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 그리고 중요한 것부터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사리를 통하여 그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 머리를 밝혀가는 중에 만나는 그 길, 지혜)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중심과 부분, 근본과 말단, 일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아는 것이 격물(格物)이고, 이러한 격물을 통하여, 먼저 할 것(先)과 뒤에 할 것(後)을 정확히 아는 것이 '치지(致知)'이다. 이게 그 어려운 '격물치지'란 말이다. 여기에 '격'자가 나온다. 품격.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고민하며, 격물치지를 이루며 일을 할 때 '격'이 나온다. 이게 지혜이고, 순 우리말 슬기이다. 격물치지를 모르는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을 작정이다.

품격의 품(品)은 입 구(口) 자 셋으로 만들어진 글자이다. 입을 잘 놀리는 것도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논어>>에서는 입을 다스리는 것을 군자의 최고 덕목으로 꼽았다. 군자의 군(君)을 보면, 다스릴 윤(尹) 아래에 입 구(口)가 있다. '입을 다스리는 것이'이 군자라는 뜻이다. 세 치 혀를 잘 간수하면 군자가 되지만, 잘못 놀리면 한 순간에 소인으로 추락하다. 말만 하고, 실천이 안 따르는 사람도 이 부류에 속한다.

모든 일에는 근본(根本)과 지엽(枝葉)이 있다. 근본을 제쳐두고 지엽부터 시작하면 일은 뒤틀어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급해도 마차를 말 앞에 주지 말아야 한다. "소가 수레를 끄는데 만약 수레가 움직이지 않으면 수레를 떼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중국 남악회양 선사)  그의 말은 사물의 근본 이치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인내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야 한다. 이것을 '부정적 수용 능력'이라 한다. 이 말은 모순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자기 삶의 일부로 껴안으려는 삶의 태도이다. 자신이 처한 낯설고 힘든 경계가 사실은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는 심오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 앞에 놓인 불완전한 삶을 한결같은 인내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일이다. 절망의 순간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숭고함이다.

숭고함은 경계에서 노는 사람의 모습에서 나온다. 숭고함은 경계에서 노는 일이다. 경계를 넘어서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경계에서 놀아라." 그래야 '탁월한 시선'이 나온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라는 말이다. '도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나, 사람이 어느 쪽으로든 치우친 견해에 떨어짐이 없다면 쉽게 도에 이를 것이다.' 승찬선사의 말이다. 한쪽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그면, '시선'이 왜소해진다. 내가 "사는 이유"는 경계에 서는 일이다.

사는 이유/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카프카가 그랬다. 평안, 정적, 휴식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성급함은 인류의 중죄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기 짐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살아간다. 그 짐을 내려 놓으려면 침묵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문제는 소란에 길들여진 영혼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침묵의 길에 들어서려면 세상을 행한 감각의 창문을 모두 닫고, 자신의 내면만을 응시하면서, 어떤 '은밀한 소리'를 들어야 하다. 그 소리를 들으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숭고한 자신을 찾아가는 순례자에게는 고요와 침묵 그리고 경청이 필요하다.

경계에 서려면, 우리는 고요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유혹하는 외부의 소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신의 사소한 생각에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건 듣기 위해 침묵을 유지하는 일이다. 사실 듣기와 말하기는 서로 배타적이며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 듣기를 수련한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하기에 급급하다. 주의 깊게 들을 수 잇는 사람만이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경청을 통해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야 가능하다. 여기서 무아에 방점을 찍는다.

영어로 말하면 타자 중심적 듣기인 'listening' 이다. Listen은 자신이 듣고자 하는 대상 앞에 전치사 to 가 놓인다. 그러므로 '리스닝'은 상대방의 말에 나의 귀를 가져다 대는 노력이 필요하다.말 그 대로 '경청(傾聽)'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 중심적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과 귀를 쭉 뻗어내려는 수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반면 영어 단어 hearling은 자기 중심적이다. 히어링은 상대방의 말을 흘려 듣는 낮은 수준의 듣기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말만 취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를 헤아릴 수 없다.

오늘 <인문 일기>의 화두인 마음의 안정과 여유는 지금의 자리에서 누려야 한다. 고요는 바깥의 소음과 별 상관이 없다. 세상이 시끄러워서 마음의 아전을 취할 수 없다. 살기에 바빠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세상 탓은 변명에 불과하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누에는 거친 뽕잎을 먹고도 비단실을 토해 내고, 연못의 연은 흙탕물 속에서 꽃대를 밀어 올린다. 깨끗한 물에서 핀 연꽃은 3-4cm 크기밖에 되지 않지만 진흙탕 물에서 자란 연꽃은 20cm나 된다고 한다. 물이 탁할수록 더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다. 세계일보 배연국 논설위원의 글에서 얻은 것들이다.

"음악이나 별미로는 지나는 사람 잠시 머물게 할 수 있으나 도에 대한 말은 담박(淡泊)하여 별 맛이 없습니다." <<도덕경>> 제35장의 말이다. 그 담박한 도가 아무런 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인 것처럼, 우리도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제19장), “완전한 비움에 이르고 참된 고요를 지키는 것”(치허극 수허독, 治虛極 守靜篤)-제16장), 이런 것이 ‘위대한 개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길이다. 더위, 조금만 참으면 된다. 오히려 고요를 즐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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