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훈육 되는 것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8월 7일)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지배자들은 무력으로 세상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나라에는 ‘시민사회’라는 것이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지배 체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면 어지간해서 이 합의는 깨지지 않는다. 한국은 시민사회가 매우 성숙한 나라여서, 더 이상 무력으로 통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곳이다. 시민사회의 합의가 없으면 무력은 무용지물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시민사회에서 합의된 힘을 ‘헤게모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람시는 시민사회가 발달된 국가일수록 무력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주장했다. 이 헤게모니 싸움을 누가 할 것인가? 그람시는 이 무거운 책무를 지식인에게 맡겼다. 학자, 언론인, 교사 같은 지식인들이 공론의 장으로 뛰어 들어가 헤게모니 싸움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에게는 단단한 사명감이 필요하다. 이게 민중들이 지식인에게 부여한 임무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나는 인문 운동가이기 때문이다. 표절이고 아니고를 떠나 대머리 남자와 주걱턱 여자의 궁합이나 다루고 있는 그 논문이 박사 학위 논문이기는 한 건가를 질문해 본다. 그런데 나를 더 슬프게 하는 대목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교수들이 왜 이 사태에 침묵하는 가라는 질문이다.
명색이 지식인 아닌가? 지식인에게는 세상을 지키고 바꿔야 한다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 그런데 그 많은 교수들, 특히 국민대 교수들은 비열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불이익이 두려워서 침묵한다고? 그게 두려워서 대머리와 주걱턱 궁합이나 보는 논문을 인정하고 있는다면, 어디 가서 지식인인 척 할 자격도 없는 거다.
많은 지식인들이 “나는 정치 문제에 간여하지 않고 순수하게 학문만 연구하는 사람이다”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이런 사회적 이슈에 발을 뺀 채 고고한 지식인인 척을 다 하고 다닌다. 아침 페북 담벼락에서 이완배 기자의 글을 읽었다. "1960년대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치열하게 인권운동을 벌인 미국의 석학 하워드 진(Howard Zinn)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유명한 말로 침묵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한쪽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 위에서 “나는 중립이에요~”라며 가만히 앉아있다면, 그는 사실 그 기차가 달리는 방향을 지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계속해서 이완배 기자의 이야기를 작접 들어본다.
“'나는 그저 이번 문제에 관심이 없어 침묵을 지킬 뿐이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그 침묵은 대머리와 주걱턱의 궁합이나 보는 박사학위 표절 논문을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해주는 비열한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다." 이런 경유 침묵은 범죄이다. 나도 같이 주장한다. "당장 그 잘난 익명 인터뷰도 집어치워라." 그리고 나서야 한다. 이 논문은 표절이라고, 그리고 이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국민대의 주장은 권력에 굴종하는 행위라고 말이다. 국민대 교수님들, 당신들이 지식인인가? 이 질문에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것도 하기 싫으면 당신들은 지식인도 아니다.
인문 운동가는 슬프다. 국민대 유지(Yuji) 논문 사태도, 논문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함량 미달 잡문을 유지하는 것은 자칫 대학의 자율적 판단을 했다가 무서운 검찰정권에 맞서게 될까 봐 회피한 것 같다. 교수들이 시중 농담성 잡문조차 걸러내지 못하는 정도로 연구윤리와 학자적 양심을 내팽개친 무책임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정도로 지금 우리 사회가 타락하고 있는데, 조정자가 없다. 그라운드에서는 반칙이 난무하고 있는데 심판의 휘슬은 울리지 않는다.그 틈에 배신자들만이 득세한다. 원래 사회가 타락하면 배신자들의 출세 길이 넓어진다. 여기서 멈춘다.
계속해서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는다. 오늘 <인문 일지>의 주제는 '사랑은 훈육 되는 것이다'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인상적이다. 사랑은 마음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훈육을 하여야 한다는 거다.
오늘은 자기 훈육의 힘은 사랑에서 나오며, 이것은 의지의 한 유형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읽고 있는 중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훈육은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훈육에 따라 행동한다"는 거다. 자기 훈육을 자기 수련, 수행으로 보고, 이러한 의지의 힘 '인(仁)에서 출발 한다'로 나는 이해했다.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분명히 그의 영적 성장에 최대한 기여하도록 행동의 우선 순위를 정하게 된다는 거다.
사랑의 감정은 훈육 받아야 할 감정이다. 사랑도 감정의 영역이다. 그러나 감정은 우리들의 노예이다. 감정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 훈육의 기술은 노예를 소유하는 기술과 같다. 인간의 감정은 에너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감정은 일상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노동력, 다시 말해 노예의 노동력을 제공한다. 감정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노예인 감정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예 소유자는 흔히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른다. 이 실수는 양 극단의 형태를 띤다.
(1) 노예를 훈련시키지 않고 아무 규율도 정해주지 않는다. 어떤 제한도 없고 방향도 제시하지 않으며 누가 주인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주인이 노예들의 노예가 되어 혼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2) 노예 주인은 그의 노예(감정)가 자기 지배 밖으로 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노예들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매를 들어 항복하게 하고 어떤 문제의 징조가 보이면 심하게 벌을 준다. 이런 방법을 적용하면 결과적으로 심한 대우 때문에 의지가 메말라버려 노예들은 점점 더 기능을 못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반항적으로 바뀐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인을 집안에 둔 채로 집을 불태워 버린다. 이것이 정신병과 과도한 신경증(노이로제)의 기원이다. 나도 평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린 가끔 이성적인 사고를 하겠다는 이유로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모든 감각의 촉수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성도 감각의 조화 속에서 더 사려 깊어질 수 있다. 이성은 브레이크이고, 감성은 액셀러레이터이다. 감성이 메마르면 이성도 역시 할 일이 없어진다.
인간의 감정을 적절하게 다루는 데에는 복잡하지만, 균형 잡힌 중용의 길이 있다. 그것은 끊임 없는 판단과 지속적인 조절을 필요로 한다. 자기 훈육이 필요하다. 훈육을 받아야 할 감정 중에 사랑의 감정이 중요하다. 사랑 그 자체로는 순간적인 애착과 관련된 감정이다. 그러나 장차 가져다 줄 창조적 에너지를 위해서 사랑의 감정은 존중되고 양육돼야 한다. 그 때 필요한 것이 선택이다. 모두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인해 영적 성장을 이룰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훈육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생산적인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사랑을 발산해야 함을 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에서 말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류시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아는 사람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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