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부정이 부정으로 고착되지 않고, 스스로 부정 되어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8. 6. 12:02

 


340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8월 2일)

1
오늘 아침에 만난 문장이다.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정의와 질서, 능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들끓는 욕망과, 근원은 알지도 못할 혼돈과 방황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신이면서 악마인] 아브락사스는 내 안의 악마라고 해도 좋을 욕망과 고통을, 외면하고 통제해야 할 악이 아니라 대면하고 수용하도록 돕는 신이다."(이주향)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 제5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민음사, p 124). '우리가 자신을 둘러싼 하나의 틀을 깨뜨리고 비로소 '참 나'에게로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말로 나는 해석한다. 그리고 내 경계를 초월하려는 마음으로 경계 위에서 설 때 만나는 신이 압락사스라고 나는 보았다. 그래 압락사스라는 단어를 구글에 물었더니, '아브락사스'라고 한다. 화자 싱클레어는 이  압락사스를 찾아가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가 신성과 마성, 남성과 여성, 인성(人性)과 수성(獸性), 선과 악을 다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신에 대하여 이야기 해준다. "압락사스는 (…)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 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민음사 p.125). 이 말을 듣고 화자는 데미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존경하는 신 하나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는 함부로 갈라 놓은 세계의 절반만 나타낸다. 그러나 세계 전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의 화자가 그려내는 꿈의 영상, 문장(紋章)에 그려진 그림, 구름의 모습 등이 압락사스의 모습을 가진다. 화자가 하는 생각을 공유해 본다.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혔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인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Ibid, p. 128) 

화자는 압락사스라는 신을 찾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그 꿈의 영상에 집착하다가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 만나게 되고,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절실한 귀 기울임과 배화(拜火)를 경험한다. 화자는 또 하나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철학 한다는 건 '아가리 닥치고 배 깔고 엎드려 생각하기;라고 하오." "배화는 인간이 창안해 맨 것 중 가장 멍청한 짓만은 아니 었어."

2
배화(拜火)라는 단어에서 '배(拜)'는 '절할 배' 자이고, '화(火)'는 '불 화' 자이다. 그러니까 '불에게 절을 하는 종교'이다, 불을 신격 화하여 숭배하는 신앙이다. 조로아스터교가 그렇다. 그러니까  '배화교'는  조로아스터교이다. 조로아스터는 '낙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유목민의 후손임을 짐작하게 하는 이름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의 권위의 신으로 세웠다. 아후라 마즈다는 그 시기 언어로 '지혜(마즈다)의 주인(아후라)'을 뜻한다. 이제까지 다신교 전통에서 신들의 세계에는 선신과 악신이 뒤섞여 있었고, 희생 제물을 드리기만 하면 무조건 복을 주는 신들을 따르는 숭배자들이 많았다. 인드라가 대표적이다. 이 신은 숭배자가 죄를 지었는지 올바르게 살았는지에는 신경 쓰지 않고 권력과 부를 베풀었다. 인간의 욕망에 봉사하는 비윤리적인 신이었던 셈이다.

그런 면에서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누었다는 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 만신전의 신들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선에, 다른 한쪽은 악에 배치했다. 그리하여 선을 관장하는 아후라 마즈다 아래 선한 하위 신격들이 조력자로 들어섰다. 반대로 악의 편에는 우두머리 악령 앙그라 마이뉴 밑으로 여러 하위 악령들이 모였다. '앙그라'는 '파괴적이고 어지러운'이란 뜻이고, '마이뉴'는 '사악한 정신'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앙그라 마이뉴는 '파괴적이고 어지러운 나쁜 정신'이란 뜻이다. 선신 아후라 마즈다는 악신이 덤비면 성스러운 시를 외웠다고 한다. 그래 나쁜 정신이 내 생각에 끼어들면, 성스러운 시를 읽으면 악신은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조로아스터가 본 세상은 선과 악의 두 세력이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우는 거대한 전쟁터였다. 인간들은 이 싸움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올바름, 곧 '아사'를 선택하면 선한 신과 한 편이 되는 것이고, '아사'를 저버리면 악령과 한패가 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선택이 중요한 것은 선한 신들이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서 악을 무찌르려면 인간의 힘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선의 편에 선 사람은 악의 괴롭힘으로 인한 슬픔과 고난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됐다. 조로아스터는 이 싸움 끝에 선의 세력이 승리하리라고 확신했고, 마지막 날에는 모든 죽은 자와 산 자가 선업과 악업에 따라 심판 받고 선한 자들은 천상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리라고 예언했다.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육체적 도덕적 상태를 보살펴 최고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릴 의무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다른 인간들을 돕고 아낄 의무가 있었다. 더 나아가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가능한 한 동물들을 덜 괴롭히고, 식물과 나무가 잘 자라도록 북돋우고, 땅을 갈아 기름지게 하며, 물과 불을 오염시키지 않는 것'도 조로아스터교도의 의무였다. 조로아스터의 가르침과 함께 '윤리적 종교'가 탄생했고, 이 종교와 함께 인류가 '윤리적 삶'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독일식 발음이다. 퀸의 리드 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는 조로아스터교인이었다. 선한 길을 가고자 하는 인간은 '선한 생각, 선한 일, 선한 말', '3덕'을 쌓아야 한다고 설명하는 종교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머큐리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여러 번 강조한다. "좋은 생각, 좋은 행동, 좋은 말".

3
우리는 보통 대립된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쪽 아니면 저 쪽을 택하면서 상대방에게도 그러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이단이나 극단적 근본주의자는 두 면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한 쪽을 택한 후,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순수하고 절실하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여긴다.

두 면을 동시에 장악하거나 두 면 사이의 경계에 처하지 않으면 전면적 인식이나 진보적 삶은 구현되지 못한다. 이것을 부정하다가 저것에만 빠지는 것은 부정의 고착화이다. 지속 부정을 통해 부정을 살아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이탈이다.

한쪽을 택하면 과거에 박히거나, 경계에서 서면 미래로 열린다. 한쪽을 택하면 이념 화되기 쉽고, 경계에 서면 생산적인 효과를 낸다. 한쪽을 택하면 얼굴에 짜증기가 새겨지고, 경계에 서면 밝고 환해 진다.

공부는 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그 경계의 끝까지 나를 몰고 가는 것이 공부이다. 그런 사람은 숭고하다.  숭고(崇高) 란 '뜻이 높고, 고상하다'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영어로는 ‘서브라임(sublime)'이라고 부르는데, 그 어원적인 의미는 ‘리멘(limen) 아래서(sub)' 혹은 ‘넘어서(super)'라는 의미다. 새로우면서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놀라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가 ‘리멘(limen)'이다. 리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장소인 ‘현관(玄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지방'과 같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경계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면, 불안하지만 반드시 거쳐야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런 불안한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 안에서 최선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이미 숭고하다. 그는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고 묵묵히 걸어가기 때문이다.

‘숭고’는 인간이 인식 가능한 경계를 너머 선 어떤 것, 흔히 ‘위대함'을 우리들에게 바라보게 한다. 숭고는 오감을 통해 그 일부를 느낄 수 있고, 도덕적이거나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이나 미적으로 감지될 수 있고, 예술적이나 영적으로 매력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숭고는 인간의 숫자와 언어를 통해 측량되거나 표현될 수 없고 더욱이 흉내 낼 수 없는 묘한 것이다.

숭고한 상태인 서브라임이란 문지방 근처에서 머뭇거리다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니까 숭고함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삶을 경험하면서, 세계를 이끌어 갈 인물로 상장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작은 디딤돌 아래, 아니 근처 경계에 서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에로스, 숭고한 사랑, 서브라임, 경계에 있는 사람의 덕목은 공감 능력과 자비 능력이다.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고, 자비 능력은 다른 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해석하는 능력이다. 이 자비가 연민이다. 연민은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당신의 슬픔'이다. 연민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이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가장 좋은 위로는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 못지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너의 어려운 처지가 나의 어려운 처지처럼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지만, 마음의 얼룩은 걷어내지 못한다.

4
인간의 이탈 욕구는 사실 긍정적 발전이다. 이탈, 들뢰즈는 탈주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이탈의 욕구가 있다. 이탈이 부정적일 수 있지만, 사실 이는 매우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기도 하다. 모든 생물은 자기 존재를 보존하며 확장하려 애 쓰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서로 확장하려 하다가 경쟁을 피할 수 없다.

확장은 기존의 터전에서 고착되지 않고 벗어나려는 율동이다, 이것이 이탈이다. 이탈은 부정이다. 저항이다. 비틀기이다. 정반합의 반이다. 그러나 합을 기약하는 반이다. 인간은 이탈을 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한다. 생산적이지 못한 상황에 처한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이탈의 시작은 지루함을 이기려고 생산적이지 못한 상황을 부정하면서 시작이다. 그리고 부정할 수 있어서 우리는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발전도 부정의 한 형식이 빚은 결과이다. 부정이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은 얼마나 공격적이며 생산적인가?

근데, 부정도 어느 순간에 고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정이 죽으면 안 된다. 싫증난 한 편을 부정한 후에 채택한 새로운 한 편이라고 해서 계속 새롭거나 영원한 선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부정이 기약될 때만 새롭고 선하다. 부정의 동력이 끊기고,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으면 폐색과 멸망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래 불교에서는 이중부정, 지속부정을, 양공(兩空)이니 중현(中絃)이니 표현한다. 장자는 양행(洋行)을 말한다. 최근 나의 사유를 지배하는 것이 동원 체계에서 동행 체게로 사회가 바뀌어야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거다. 장자가 말하는 "양행"이 아닐까? 그래 신이면서 악마인 아브락사스라는 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오늘의 시를 공유한다. 그리고 이 시와 어울리는 사진도 함께한다. 도회지의 '쇼 윈도우' 이다.

신은 망했다/이갑수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회를 만들었다
신은 망했다.


사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중심 자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신은 인간이 가고 싶어하는 방향이거나 완성이거나 원본이거나 모델이거나 초청된 감독자이다. 신은 인간 확장의 정점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회를 건설하면서 확장에 가속도를 냈지만, 도회적 확장의 절정은 신이 만든 시골을 닮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골의 도회화이다. 우리는 도회에 있으면서 시골을 갈망한다.  그러면서 신을 닮아가려고 도회를 공격하지만, 도회를 떠나지 않는다. 

부정이 부정으로 고착되지 않고, 스스로 부정되어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

5
다시 <<데미안>> 소설 이야기로 되돌아 온다. 태어나기 위해서 한 세계를 깨뜨린 자는 양쪽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깨뜨린 세계에서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태어난 세계로는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채,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우왕좌왕 하는 것이다. 방황하면서, 경계에 서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뿌리를 내려가는 싱클레어가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은 자기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갑자기 생경해 보이는 풍경이다. 어두운 “다른 세계”와 밝고 익숙한 세계 사이에 끼면 이 생경함의 엄습을 피할 수 없지만, 생경함은 어떤 방도로도 해석할 수 없어 신비의 꿈결 같기도 하다.

방황은 종종 방탕을 낳기도 하니, “방탕한 생활은 신비주의자가 살기 위한 최상의 준비 활동”이라는 데미안의 말은 그냥 방탕에 빠진 싱클레어를 가볍게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클레어의 방황에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양쪽 세계에 낀 자의 사명은 방황과 방탕 속에서도 양쪽 세계를 품어야 하는 운명으로 진화하는 일이다. 이 진화를 먼저 해낸 데미안의 모습을 보라. 데미안은 “자신만의 법칙대로 사는 듯 진귀하고 고독하고 조용하게 걷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을 걷는 자는 사이에 낀 채 혹은 양쪽을 품은 채 고독하다.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 고독한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유’(有)의 세계와 ‘무’(無)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품어야 ‘도’(道)라고 말하는 노자는 아브락사스의 중국판이다. ‘유’와 ‘무’를 동시에 품은 노자도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의 세계”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홀로” 고독했다. 양쪽을 품은 신비적 존재는 고독하다. 고독한 자는 개방적이고, “인위적 절반의 세계”에서 편안한 자는 폐쇄적이다. 인위적 절반에 갇혀 폐쇄적인 자는 사랑을 학습하거나 거래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존재와 일치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고 싱클레어가 “이제 홀로 있을 수 있고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다”고 말 한 것은 자신을 향해 걸었던 길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여 문득문득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는 뜻이겠다. 사랑은 고독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이 자신으로 돌아간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왕국인 것이다. 사랑은 도덕과 무관하다. 도덕은 한 쪽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칼끝이 조금이라도 향한다면, 그것은 죽은 사랑이다. 사랑은 음악을 닮았다. “한 사람이” 자신에게 도달하여 “천국과 지옥을 잡아 흔든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음악”을 닮았다. 여기서 이주향 교수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는데 자연스레 겹쳐진 것이 바로 그 <<데미안>>이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직접 더 들어 본다. "‘케데헌’은 아브락사스 철학의 케이팝 판이라 읽어도 될 것 같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그 철학적 깊이에서 온다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잘 생긴 주인공들, 귀에 박히는 음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라 하다 보면 흥이 돋는 매혹적인 춤일 것이다. 케이팝 아이돌들이 합숙해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세계를 홀렸던 춤을, 환상 속 아이돌들은 힘도 들이지 않고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다. 먹지도, 자지도, 늙지도 않은 아이돌과 현실의 아이돌, 어느 쪽이 실재고, 어느 쪽이 환상일까. 팬들의 입장에선 환상과 현실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길을 간다. 자신만의 길, 고유한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는 묻게 되어있다. 내 자리는 어디인가. 자기 길을 찾아가기 위한 몸부림 그 자체가 길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면 금수저라도 소용없다. “유령 같았던 나, 난 내 자리를 찾지 못했어. 문제아라 했지. 거친 성격 탓에. 하지만 그게 여기까지 날 이끌었어.” ‘골든(Golden)’을 부르는 루미의 마음, 카인의 후예다.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닌 느낌, 아프고 시린 일 많아 내 자리를 찾아 방황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루미처럼 나를 키운 것은 바로 악이라는 이름의 혼돈과 방황이었다고 느끼게 된다."

신은 고독의 정상에 있다. 정상에 있어야 “인위적으로 구분된 절반”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허용된 양쪽을 다 자신의 세계로 일치시킬 수 있다. 자신에게 도달하면 신처럼 정상에 선다. 당연하게도 “각자를 위한 당연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 아브락사스를 추종하거나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브락사스가 되는 일인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자신에게 도달한 개방적 존재다. 고독과 개방이 일치하다니.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인 천직을 성실히 수행하면, 신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눈을 감고, 신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게 된다. 입맞춤 후에 신은 떠나고 자신만 자신으로 남았다. 신은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진짜로 살아보려는 자는 자신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도달한 자라면 그가 신이다. 자신에게 도달한 자가 아브락사스다." 나는 그게 '도'라고 본다. 그래 난 구도자이다. 구도자들은 신을 향해 걷는 방식으로 포장해서 사실은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다 고독한 구도자를 닮는다. 구도자들이 보통의 삶을 끊은 채, 자신이 걸어야 할 궤도를 스스로 짠 후, 일부러 거기에만 맞춰 돌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그 누구도 모범 삼지 말고 자신에게만 진실 하라"고 헤세는 말하였다. 나는 그처럼 고독한 삶을 위해 자발적 왕따로 살고 싶다. 전혜린이 <데미안>에 대해 열심히 말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가정적 억압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이 되고, 나 자신에게만 진실하라는 그 자유와 독립의 메시지였다. 잘 살펴 보면, 헤세는 약 40년을 스위스에서 살았다. 그의 삶의 원리는 스스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것과 고귀한 것을 찾아 스스로 읽고 생각하며 쓴다는 것이었다. 그건 모든 권력이나 권위나 전통으로부터의 고독이었다. 헤세의 반항은 전쟁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대한 반항만이 아니라, 허영과 가식, 명예 추구와 사리 사욕,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도 포함된다. 그는 모든 '무리 짓기'를 거부했다.
 
데미안은 절대적인 정직을 통한 자아의 규명과 자기 길의 발견, 그리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 새로운 개념의 자발적 왕따였다. 결국 헤세가 원했던 것은 어떤 정치 슬로건이 아니라, 홀로 바르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개성을 키워주고 싶었다. 그 개성은 그 개인에 의해 찾아지는 것이다. 누구도 그 개성을 대신할 수 없다.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마저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고백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멀어진다는 건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부분은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의 문을 열지도 않는다. 오늘 질문은 이 거다. '밖에서 주어지는 것에는 쉽고도 강하게 빠지면서,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따르는 일은 왜 그리 어려워하는가?' 데미안은 이렇게 말했다.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복종해버린다.” 밖에서 주어진 것을 갖고 살기는 쉽고,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것을 살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와 도덕과 종교에서 제공하는 믿음의 집단 최면에 빠져 “그냥 복종해버리면서” 자신을 스스로 내팽개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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