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산다는 것은 깨달음과 괴로움 사이에 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8. 5. 09:50

340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31일)

1
날씨가 너무 더우니,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잘 쉬자. 산다는 것은 깨달음과 괴로움 사이에 있다. '무아(無我)'와 '연기(緣起)'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으로 해방되면 깨달음이고, 그 속에 괴로워 하면 '생로병사'의 틀 안에서 힘들어 하는 거다. '무아'와 '연기'가 진리이므로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거나 이미 연기적인 완결성에 놓여 있다. 삶의 괴로움을 당하면서 사는 것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것을 연기적 관점에서 비교해 본다면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깨달아 있으며 이미 괴로움과 무관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의 족쇄를 스스로 애써(실제로는 운명적으로) 매달고 사는 것이다.

깨달음과 괴로움을 대하는 개인들의 삶의 편차는 하나의 긴 스펙트럼으로 그릴 수 있다. 좌측의 끝은 괴로움에 완전히 동일 시 되어 헐떡이는 상태이고, 우측의 끝은 환골탈태를 겪고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며 '자유롭게' 사는 상태이다. 모든 사람은 그 스펙트럼의 어디엔 가 놓여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더위가 두렵지 않다. 그리고 덜 덥다. 오늘은 벌써 7월의 마지막 말이다. 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는 '어정칠월'이 이렇게 지나간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 실감난다. '흰 망아지가 빨리 지나가는 순간을 문틈으로 언뜻 본다'는 뜻으로, 세월과 인생이 없이 짧음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오늘 사진이 말한다. 전에 잘렸지만, 다시 일어나 우리들에게 그늘을 준다.

다음은 '무아'와 연기'에 대해 내 인문 일지에 적어 두었던 것이다. 

'무아'와 '연기'의 실상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얻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그것으로 되어질 수만 있을 뿐이다.
 
진리는 오직 알뿐이어서 할 일이 없다.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자연, 천하, 도, 하늘은 태평하다. 아무 것도 어질러진 것이 없다.  
진리는 해야 할 일은 없으며 할 일이 일어날 뿐이다.
우리 일상의 사건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무아(無我)
나는 없다.
I'm nothing.

깨달음은 무아를 체득하는 것에 기반한다.
무아와 연기는 동전처럼 동일한 차원의 일이며 기능적으로 동어 반복이다. 
무아이므로 연기이고 연기이므로 무아이다. 
세계의 모든 것이 연기적 현상이므로 연기와 무관하게 독존하는 것은 없다.

2
석가모니는 존재, 즉 '있다'는 '있다가 없다가', '생겼다 없어졌다'(生滅, 생멸)하는 '공(空)'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공'은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다. '끊임없이' 바뀌고 변화 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세상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인드라망'이라는 것이다. 

'인드라망'은 불교의 연기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로써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드라(Indra)'는 본래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한역하여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한다. 신력(神力)이 특히 뛰어나 부처님 전생 때부터 그 수행의 장에 출현하여 수행을 외호(外護)하는 신으로  표현되고 있다. 바로 이 '제석천'의 궁전에는 무구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인드라망)이 있다.
 
그물은 한없이 넓고 그물의 이음새마다 구슬이 있는데, 그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 주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 그 구슬들은 서로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물로서 서로 연결되어져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스스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가 연결되어져 있으며 서로 비추고 비추는 밀접한 관계속에 있다. 또 이것은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세상과 인간과의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다.

3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각자의 특성과 역량의 결합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엄격한 심판자가 아닌 결과보다 과정에 더 큰 관심을 갖는 행동학자를 필요로 한다. 이런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행동학으로 읽은 질 들뢰즈는 우리 모두는 관계와 역량, 변용과 변화의 산물로,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긍정적으로 반응한다고 주장했다. 들뢰즈는 영속성보다 연관성과 반응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체와 그가 처한 환경이 맺는 관계와 그 둘의 지난한 상호작용을 관찰하면서 일반화의 위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런 전방위적 관찰이 바로 그가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이었다.

거미나 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변화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빨라 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이런 요인들을 관찰하는 편이 더 좋은 것이다. 이 상호적 관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바라볼 때, 성급한 확신은 불확실함으로 바뀌고 한 사람에게 이런저런 꼬리표를 붙이고 싶은 마음을 자제할 수 있다.

망치로 무쇠를 두드리는 것은 가치판단이 필요 없는 노동 행위일 뿐이지만, 망치로 누군가의 머리를 때리는 것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모든 존재는 여러 원인과 조건(인연因緣)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세계에 있으며, 이 세계는 만들지 않으면 본래 없는 것이라는 공(空)의 세계이다. 불교의 사실판단이다. 여기에 가치판단을 하려면, 세상의 법칙이 이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사실 판단이며, 자비(慈悲)는 가치 판단이다. 깨달음은 지혜이고, 가치의 판단은 자비(사랑)이다. 그러니까 모든 길은 사랑으로 통하고 사랑으로 만난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과 생명에게 편견과 차별을 거두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끌어안고 같이 기뻐하거나 아파하는 것이다.

4
불교에서는 '인간에게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고 말한다. 내 자아는 계속 변한다. 우리의 자아는 불변하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오온(五蘊-색, 수, 상, 행, 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강도에 따라 요동치는 것일 뿐이다. 인연은 '인(因)'이라는 원인과 조건이라는 '연(緣)'들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간접적인 조건이다. 그러니까 원인도 중요하지만, 그 '인'을 좋은 조건의  '연'으로 만들어가는 매일매일의 노력도 그만큼 중요하다. 말장난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투사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사실 판단)이 아니라, 특정한 개인적 관계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개념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그리고 어떨 수 없이 과거와 현재의 평판에 따라 서로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어떤 관계 속에 얽매여 있지만, 그건 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과는 별개로 관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들의 과거는 다 똑같지 않고 그들의 경험 대부분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의 관계를 바탕으로 누군가에 대해 '그만하면 괜찮다'거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무의식적인 투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수많은 관계와 생각, 불화, 우정의 총체라 할 수 있다.

5
'근기(根機)'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근기'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끈기’라는 말도 바로 이 '근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氣)' 그리고 '하근기(下根機)'가 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아'와 연기'라는 진실에서 '생로병사의 해방을 즐기며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상근기;에 있는 사람이고, '생로병사'의 괴로움과 무관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의 족쇄를 스스로 애써(실제로는 운명적으로) 매달고 사는 사람이 '하근기'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스팩트럼이 만들어 진다. 그러나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근기', '상근기'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기'의 고비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기'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기'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기' 사람들을 우리는 일종의 '병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기'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중근기'일수록 더 하지 못한다. 이들은 관련된 서적을 잠깐동안 관심을 갖는 척하는 사람일 뿐이다.

불교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절에서 가끔씩 듣는 “성불(成佛)하세요!”라는 말은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안아트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별도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기'가 탁월한 '상근기(上根機)'이다.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거사(居士)'라고 한다.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성불하려면, 임제 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지 자신이 주인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절에 들어가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을 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이다.

근기(根氣)는 '근본이 되는 힘'이다. 이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과실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았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깨달음은 이런 세상을 알아차리는 거다.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 오늘 공유하는 시는 <아닌 것>이다.

아닌 것/에린 핸슨

당신의 나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입는 옷의 크기도
몸무게와
머리 색깔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도
두 뺨의 보조개도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읽은 모든 책이고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다.

당신은 아침의 잠긴 목소리이고
당신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이다.
당신은 당신의 웃음 속 사랑스러움이고
당신이 흘린 모둔 눈물이다.

당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걸 알 때
당신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
당신이 여행한 장소들
당신이 안식처라고 부르는 곳이 당신이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들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당신 방에 걸린 사진들이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이다.

당신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당신이 잊은 것 같다.
당신이 아닌 그 모든 것들도
자신을 정의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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