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꽃 피어 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8. 3. 17:15

340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29일)

1
7월이 거의 다 지나간다. 산책을 하다가 어제는 오늘 사진처럼 밝게 핀 무궁화 꽃을 만났다. 고 신영복 교수님이 당신의 책, <<담론>>에 남긴 글을 소환시켰다. "꽃에 대해서도 노촌 선생은 둘만 방에 남았을 때 이야기했습니다. 무궁화는 덕이 있는 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벌레와 진드기까지 함께 살아가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생각하면 꽃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꽃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피는 것도 아닙니다. 빛과 향기를 발하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 입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시들어서 더 이상 꽃이 아니라 하지만 그 자리에 남아서 자라는 열매를 조금이라도 더 보호하려는 모정입니다. 꽃으로 서의 소명을 완수하고 있는 무궁화는 아름답습니다." 무궁화가 이렇게 예쁜 꽃인지 올여름 처음 알았다. 흰 꽃, 분홍 꽃만 있는 게 아니라 자주, 빨강, 색깔도 다양하다. 무궁무진 피어난다고 무궁화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니 꽃 한 송이마다 벌이 한 마리씩 들어가 있다. 꿀벌이 귀한 시절이 되고 보니 열렬한 꿀벌을 품은 무궁화가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인생은 비스킷 통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커다란 통 안에 다양한 종류의 비스킷이 들어 있다. 설탕을 뿌린 것, 크림이 들어간 것, 딱딱하고 맛이 없는 것 등 여러 종류의 비스킷이 있는데, 우리의 인생은 이 통 안에서 한 개씩 비스킷을 꺼내어 먹고 있는 것과 같다는 거다. 마지막 한 개를 모두 먹고 나면 우리의 인생은 끝이나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어떤 비스킷을 먼저 먹을지 우리가 스스로 고를 수 있다는 거다. 맛있는 비스킷을 먼저 먹어도 되고, 나중에 즐거움을 위해 남겨둬도 된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똑같은 비스킷 통을 주었다는 거다. 어느 통에나 맛있는 비스킷과 맛없는 비스킷이 모두 들어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맛이야'라며 뱉아버릴 것 같은 비스킷조차 '계속 씹다 보면 맛있어'라고 말하며 감사히 먹는 사람이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맛있다'는 기준이 무척 낮은 사람이다. 무슨 일이든 기쁘고 즐겁게 하는 사람은 행복의 끓는 점이 낮다. 이 끓는 점이 기준의 높이를 말한다. 나는 행복을 느끼는 그 기준을 낮추고 싶다. 

같은 생각으로, 과거는 바꿀 수 있다는 거다. 떠올렸을 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과거는 바꾸면 된다는 거다. 사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거다. 맛이 없었던 비스킷도 '그때 먹었던 비스킷은 정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맛이었어'라며 그저 웃고 넘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오늘 길을 걷고 있는데 주위에 예쁜 꽃도 피어 있고, 하늘도 정말 맑았지 뭐야'라는 식으로 좋은 일만 이야기 한다. 


꽃 피어 야만 하는 것은, 꽃핀다/라이너 쿤체

꽃 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 핀다.
자갈 무더기 속에서도 돌 더미 속에서도
어떤 눈길이 닿지 않아도


2
오늘 아침, 페이스 북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본능을 인정하지 않으면 위선이 되고, 본능만 따르면 야만이 된다. 본능이란 무엇인가? 진화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형성된 자동적 충동이다. 예를 들면, 식욕, 성욕, 소유욕, 위협반응 등 같은 것들이다. 본능을 창조력과 열정의 원천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제하에 그 본능은 적절히 통제돨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본능을 가진 '동물'이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본능은 이해하되, 선택되어야 한다.

선택이 중요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한 방식으로 보면 그 선택은 쉽다. 에피쿠로스는 가능한 개인의 쾌락을 극대화하고, 당장 현실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삶이야 말로 미래가 불확실하고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였다. 그에 의하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두려움'과 '허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불행은 두려움이나 허영 그리고 절제가 없는 욕망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사람이 이 감정들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을 관조하는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이다.
▪ 자연스럽 필요한 욕망: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욕망으로 막고, 마시고, 잠자는 것.
▪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것: 식탐이나 성적 욕망과 같은 감정들. 이런 감정들은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더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 제어해야 한다.
▪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 명예와 권력.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쾌락이라는 말을 통해서 의미하는 바는 육체적인 고통과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고통과 근심의 원인은 비자연적이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나 걱정거리를 제거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개인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3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순간의 삶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라고 말한다. 그의 이름을 따서, 영어로 '에피큐리언(epicurean)'이라 하면,  '쾌락(향락)주의자'라고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동적 쾌락)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와는 달리, 그는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아타락시아'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극적 쾌락주의'라고도 한다. 이 말은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무제한의 쾌락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을 줄여 나가는 절제된 쾌락주의자라는 말이다. 그는 행복과 쾌락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쾌락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며, 바람직한 삶은 고통(불쾌함)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본다. 그의 쾌락주의는 방탕함에 빠진 자포자기의 삶이나 식욕, 성욕의 충족과 같은 강력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감각적 쾌락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에피쿠로스는 불행의 원인, 일상의 쾌락이 아닌 불쾌함의 원인인 두려움과 허영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네가지 치료법을 이렇게 말하였다.
▪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
▪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 최악의 상황은 견딜 만하다.

오늘 아침 화두는 세 번째 치료법인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이다.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런 외부의 유혹에 경도 된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될 수 있는 그 마음인 '본심', 즉 '제 정신'이다. 본심은 성배와 같아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그 존재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지 가만히 추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매일매일 수련 할 때, 슬그머니 등장하는 밤하늘의 작은 별이다. 반면, '욕심'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의 처사다. 그것은 배가 부르면서도 자신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게걸스럽게 먹으려는 식탐과 같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자신이 배부른지 알면서도 과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4
욕심(慾)이란 한자가 그렇다. 깊은 골짜기(谷)에서 끝없이 흘러내려 오는 물을 자신의 작은 입을 벌려(欠)다 마셔보겠다는 마음(心)이다. 욕심이란 사실은 자신을 매일 값싸게 만드는 마음의 마약이다. 이 욕심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자신에게 온전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된다. 인간은 모두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 바로 '본심'이고 '제 정신'이다.
 
'제 정신', 즉 '본심'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웅장한 나무의 뿌리와 같다. 저 큰 나무가 언제나 중력을 거슬러 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이유는, 그 높이와 너비에 어울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본심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마음, 참 마음이다. 인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군 가의 발굴과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교육은 이 본심을 정성스럽게 발굴하는 체계다. 이 본심은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 와도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하기 때문에 인류, 자연, 그리고 우주처럼 보편적이다.

인간은 욕구에 빠지는 것보다는 욕망에 집중하는 것이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데 좋다. 욕구는 생존에 직접 필요한 것들, 즉 먹고, 자고, 입고, 배설하는 등 당장 필요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반면 욕망은 자유나 창의나 성취감이나 자존감 등과 같이 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다음, 아니 너머의 것들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의 승부는 누가 욕구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누가 욕망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가로 갈린다. 목숨을 유지하는 데는 욕구가 필요하고, 삶을 승화하는 데에는 욕망이 필요하다. 삶이 지지부진하고 오리무중에 빠진 것 같다면, 아마 "큰 욕망(大發原)"을 품지 않아서 일 것이다. 우선 욕구 차원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깨워서 "큰 욕망"을 품어라.

욕망을 끊어서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쪼그라들면 어찌 자잘해 지지 않겠는가? 자잘해 지고도 마음에 찰기가 돌고 생기가 돋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 아래에 않아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나 매 한 가지이다. 사는 것처럼 살다 가고 싶다면,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 더 잘 살고 싶다면 잡념을 끊고 생각하라.

생존에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은 쉽다. 반면 명예와 권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선한 것은 단순하고 검소한 음식과 거주지이다. 이런 것들은 부와 권력과는 상관없이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좋은 음식과 거주지를 원한다면 탐욕이 작동한다. 탐욕은 필요 없는 욕망과 걱정을 야기하며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니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자니 나는 행복하다. '얕은 처세'에 현혹되지 말자.

5
조윤제 작가의 <<신독, 혼자 있는 시간의 힘>>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고전의 숱한 문장들 속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의 가치를 짚은 '신독(愼獨)'을 조명한 책이라 한다. 내가 유학하는 동안 내 아내는 거실에 '신독'이라는 말을 크게 쓴 액자를 걸어두었었다. 

혼자 있는 시간과 혼자 사는 삶의 방식이 늘어난 오늘날,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단단하게 다지는 지혜를 2000년 전 명문장들을 통해 풀어내었다고 한다. 곧 주문해 읽을 생각이다. 이 정보를 준 것은 <아시아경제>의 조인경 기자이다. 긴 세월을 관통하는, 우리 삶에 가장 본질적이고 실천적이며 현실적인 조언과 흔들이지 않는 내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우리는 대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잔다. 자연의 이치이자 생리적인 욕구이므로 거의 대부분이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고 잠자기 전과 잠에서 깬 다음에는 누구에게나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다. 사람은 낮의 성과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데, 그 일의 성과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혼자만의 시간이다.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실력을 쌓고, 능력을 키우는 힘을 얻는다.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낮의 성과가 달라지고, 나아가 미래가 달라진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신독의 기회로 삼았다.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충실한 낮을 보내기 위한 준비로 삼았다.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은 곧 수양과 치열한 증진의 기회였다. 말년에 이르러 다산 정약용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단 한 권의 책으로 <<심경(心經)>>을 꼽았다. 그리고 <<심경>>을 해설한 책 <<심경밀험>>에서 '신독'에 대해 이렇게 생각을 밝혔다. "원래 신독이라 함은 자기 홀로 아는 일에서 신중을 다해 삼간다는 것이지, 단순히 혼자 있는 곳에서 삼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방에 홀로 앉아서 자신이 했던 일을 묵묵히 되짚어 보면 양심이 드러난다. 이는 방안 어두운 곳에 있으면 부끄러움이 드러난다는 것이지, 어두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히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은 늘 사람과 함께하는 곳에서 이다."

다산은 '홀로 있을 때 신중히 하라'는 가르침을 단순히 공간의 개념, 시간의 개념에 한정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단정히 하는 것은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자세이며, 오히려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해를 끼치고 악을 행했던 일은 없는지 혼자 있을 때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다산에게 신독이란 특별한 행동거지가 아니라 그저 일상에서 지켜야 하는 도리였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