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야 할 걱정은 고작 4%에 불과하다.

33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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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 J 젤린스키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들 중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22%는 사소한 사건이고, 0,4%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하면 96%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걱정은 고작 4%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 걱정거리의 해결 방안을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거다. 우리 고민의 해결책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해결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운 게 아니고 내 머리가 어지러움을 항상 잊지 말고 세상을 맑고 밝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걱정을 뜻하는 영어단어 'worry'는 '사냥개가 짐승을 물고 흔들다'는 뜻이다. 실제로 걱정은 삶을 물고 흔들어 서서히 죽어가게 만든다. 돈이 많다고 해서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걱정이 많은 이유는 나를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게 많은 것을 가지려 할 때이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욕망을 가져도 '적당 함'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걱정이 생기면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긴 호흡으로 천천히 걱정을 밀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항상 밝아야 한다'고 하니 달님이 그건 욕심이라고 했다. '항상 따뜻해야 한다'고 하니 햇님이 그건 욕심이라고 했다. 삶이 힘들 땐 지나친 욕심 때문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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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이룬 것은 불행하다. 원하는 것이 없으면 정신은 활력을 잃고, 모든 것을 소유하면 영혼은 잿더미로 변한다. 정신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열정과 호기심이 항상 충만해야 한다. 지나치게 만족스러운 상황은 오히려 치명적이다.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 근심의 씨앗이 싹트고,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림자만이 남는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에 의하면, 우리 뇌는 무언가를 상실하면 자동적으로 다른 기능을 강화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는 거다. 예를 들어 청력을 상실하면 시각이 강화되고 시각을 상실하면 청각이 강화된다. 더 좋고 더 강한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과감히 비우고 지울 줄 알아야 한다. 상실의 불행이 새로운 창조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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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애쓰는 삶에서 덜어내는 삶으로 바꿀 때이다. 삶은 덜어낼수록 더 단단해 진다. 삶에 자연스러움이 온전히 자리잡아 진정한 무위의 삶을 살자. 무위자연(무위자연): 인위를 가하지 않는 자연법칙을 따른 것이다. 헤라클리토스는 '눈물의 철학자'로 불린다. 혼자 세상의 원인을 고민하느라 늘 '인상을 쓰며' 혼자였고, 그는 자연 법칙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
내 방식대로 말하면, '자연은 말이 없다' 이다. 즉 설명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연은 discovery(발견)의 대상이다. 노자 <<도덕경>> 제23장은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많은 주석 가들은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또는 "말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로 해석을 한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 교수는 "도가 말이 없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 풀이한다. 크게 다음과 세 가지이다. 자연은 말이 없다.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나도 처음 <<도덕경>>을 읽을 때는 이렇게 읽었다. 우리는 보통 큰소리로 말을 많이 하며 자기 과시를 하거나 길게 논리를 늘어 놓으며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그러나 "희언자연"을 만나고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가르침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천지(하늘과 땅)가 합하여 온갖 일을 이루어 내지만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하지 않는다는 거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하는 등 자연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것을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말로 선전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거다.
▪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자연은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립, 노자가 말하는 무와 유의 대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한다. <<주역>>에 나오는 "무왕불복(無往不復) 무평불피(無平不陂) 간정무구(艱貞無咎)"라는 말을 소환한다. 자연의 순환 원리를 주역에서는 "무왕불복"의 원리라고 한다. 세상의 이치는 결국 가면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순환 철학은 <<주역>> 11번째 괘인 <지천태> 괘에 나온다. 현재는 평평하지만 언덕질 날이 있고,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 어렵고 바르게 하면 허물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평평하다 가도 언덕이 있는 것이 자연의 지세(地勢)이며, 좋은 세상이 있다가도 나쁜 세상이 오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이다. 그러니 태평할 때에 그 태평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렵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르게 해야 허물이 없다는 거다. 태평한 시절이라고 방심하고 과소비하고 부도덕하게 편히 살려고 하며 퇴폐풍조로 흐르면 안 된다고 걱정함과 함께, 어려운 시기가 다시 돌아올 것을 염려하여 어렵게 여기고 바르게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면 허물이 없게 된다는 말을 명심할 생각 말이다.
"간정무구(艱貞無咎)"와 함께, 난 개인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말, "무평불피"와 "무왕불복"을 좋아한다. 평탄하고 태평하던 국면이 위태롭게 기울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无平不陂, 무평불피), 떠나가는 것이 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无往不復, 무왕불복).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쇠운의 조짐이 보이는 때에는 그러한 법칙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면서 간난 속에서도 올바른 미래를 향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艱貞, 간정).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이 소환된다.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 온다'는 말이다. 연(緣)에 따라 윤회를 한다는 거다.
▪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 모든 것은 원리(logos)가 있다.
자연 현상은 원인에 의해 나타난다. 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자연은 점프하지 않는다. 자연의 작용은 연속적이다. 영어로는 이렇게 말한다. Nature makes no leap. 내가 좋아하는 두 문장이다. "하느님의 큐시트에는 반드시 반전 포인트가 있다."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음과 양의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세상이 이해되지 않을 때마다 소환하는 문장들이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原理)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관계론이 나온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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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고 싶다. ‘안분지족’은 노자 <<도덕경>> 제44장의 다음 문장을 소환한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可以長久(가이장구)" 이 말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으니 오래오래 삶을 누리게 된다'이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만족(足)을 알고 그치는(知) 것이 내 몸을 살리고, 내 정신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해답이다. 이 구절을 가지고 노자의 철학이 소극적이고 허무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주체는 성공한 귀족이거나 권력자이다. 이미 성공이라는 문턱에 다다른 사람에게 하는 경고이다.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더 큰 탐욕을 보일 때 벌어지는 참사에 대한 경고이다.
만족을 모르고, 행복을 쫓는 사냥을 끝없이 펼치다 보면 결국 얻게 되는 건 불행이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족을 알자는 거다. '안분지족'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分數)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이란 뜻이다. ' 자기 분수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만족하면서 편안히 지낸다'는 거다. 윤리적으로 인격이 높은 덕망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잣대로 오만(傲慢)에 빠지거나 자만(自慢)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나 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삶의 아름다운 향기가 풍긴다. 이렇듯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야 말로 '멋진' 삶이 아닐까?
소유는 나눔을 통해 빈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 지속(長久) 성공과 생존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분지족'의 소박함은 칭찬과 인정의 문제 와도 관련이 있다. 자신에게 귀속되는 양보다 더 많이 요구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화자찬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과 만족은 겸손을 갖추었을 때라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법이다.
성숙한 사람들은 대개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행동, 어떤 계획, 어떤 관계를 시작할 수 있게 한 처음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 대부분은 지극히 사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혹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취를 굳이 드러내지 않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보다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비범함이다. 타인의 평가에 얽매인 채 끝없이 괴로워하는 것이야 말로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불행이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대신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갖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극단을 멀리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지 말고, 중용을 추구하는 거다. 소박하게 지낸다. 드높은 소나무는 바람에 자주 흔들리고, 가장 높은 탑은 더욱 육중하게 무너져 내리며, 산꼭대기는 번개를 맞게 되는 법이다. 순풍이 불어 돛이 부풀어 오를 때 돛을 다시 접을 수 있어야 한다. 평안한 삶은 무기력한 삶이 아니다. 본능적 과시욕을 자제하려면 용기와 명철한 정신이 필요하다.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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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의 크기는 행복의 크기와 비례한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모든 비난을 해결하고 얽힌 것을 풀어 헤치며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들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절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친절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다. 모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향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성공하고 싶다면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인도의 간디는 몸은 왜소했지만 잔잔히 흐르는 미소를 머금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비폭력을 외치며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에 인도의 성자로서 추앙을 받았고 지도자로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요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 뿐만 아니라 정부부처의 공무원들에게 까지 친절을 강요하는 것은 위 모두가 행복한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며 부드러운 말씨를 선택해서 쓴다면 우리는 친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결국 친절의 크기는 행복의 크기 와도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다. 그러려면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에 근육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많이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일은 자동차가 제자리에서 공회전을 하듯이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면서 기름만 태우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느라 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이가 아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으로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일상을 방해 받을 정도로 지나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따뜻한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절하자는 것이 우선이다. 나를 좋아하고 싫어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그 사람의 자유이다. 적어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모든 사람에게는 친절할 수 있다. 허름한 옷에, 번뜻한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자신이 한 따뜻한 한 마디를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차에 좋은 옷을 입고, 돈이 많거나 좋은 직장을 가졌거나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해도, 다른 이의 단점만을 들추어내며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다. '너는 너의 노래를 불러라! 나는 나의 노래를 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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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서랍에 ‘자존심’을 넣어두고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을 나서면서 ‘이제 난 내가 아니다’ 하며 자기 암시를 했다. 자존심을 빼놓고 왔으므로 직장에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다. 어쩌면 ‘가면’을 쓰고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굴 위에 ‘또 다른 나’로 진정한 내 모습을 감춘 채. 시인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나 보다. 서랍에 “서로 다른 얼굴들”을 넣어두고 꺼내 쓴다. 시인은 “다정한 얼굴”을 골라 쓰고는 따뜻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행복한, 사랑스러운, 신난, 멍한, 화난… “서랍에 갇힌 얼굴들”은 차마 꺼내보지 못한 사연을 안고 밀실에 잠들어 있다. 모든 사연을 풀어놓으면 “삼백 년”쯤 걸릴지도 모른다. 가까이는 집안, 멀리는 세상이 들썩일 수도 있다. 시인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마녀’를 떠올린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잠과 살아도 산 것이 아닌 현실. 며칠쯤 울고 나서야 “늑대와 악어”가 득실대는 문밖으로 나선다. 출근 한 달쯤, “안녕”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의 덧붙임이다. "다정한 얼굴"을 골라 써야 한다.
미소가 나를 택할 때/강순
서랍을 뒤질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들이 손에 잡혀 오늘은 다정한 얼굴을 뒤집어쓰기로 해 서랍에 갇힌 얼굴들은 깊은 복도를 지나 서로의 밀실을 백 개쯤 두고 있어 밀실에는 끝없는 잠이 숲속으로 쏟아져 흰 눈처럼 소복이 쌓이는 잠을 밟고 걸어가면 나는 삼백 년 동안 밀린 빚을 갚는 마녀, 검은 얼굴을 감추고 웃다 보면 점점 하얗게 되어 가 온통 하얀 숲이 내 전생일지 모른다는 생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된다면 며칠쯤 서랍 속에서 울음으로 양탄자를 만들래 오늘은 어제의 컴컴한 복도를 지나 다정한 얼굴이 나를 붙드네 미소가 나를 택하면 나는 죽은 사람의 머리를 내밀어 미소를 뒤집어쓰지 늑대와 악어 들을 문밖에 두고 오늘도 안녕? 오늘의 얼굴을 다시 갖다 놓을 때까지 당신도 안녕? 안녕이라는 새 언어를 배운 지 삼십 일 정도 되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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