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가끔 우리는 답을 기대하지 않는 물음을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28. 17:11

339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23일)

1
가끔 우리는 답을 기대하지 않는 물음을 한다. 예를 들면, 이 더위에 잘 지내는가? 그런 류의 인사 중에 건강 챙기는 당부를 하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과거의 비리를 파헤치는 특검 정국으로 언론의 말들 때문에 자연의 날씨보다 세상의 기후가 더 지독한 나날들이다. 그리고 철 지난 정치인들의 아무 말이나 하는 폭언들이 난무하는 세상의 온도가 폭염보다 더 힘들게 한다. 이런 세상에서 여름은 더 힘들다.

오늘 공유하는 시의 시인은 여름에 대면하는 삶의 진실을 ‘언덕’이라 노래했다. 단단하고 진중한 시의 위로, 세상 속 여름의 의미와 폭염 탈출법을 일깨운다. 이 시를 소개한 강소연이란 페친의 담벼락에서 감성이 촉촉해지며, 동시에 한 줄기 빛을 만나는 기쁨이 이 더위를 잊게 한다. 시인은 저절로 당도한 세계가 아니라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간 세계를 “언덕”이라 쓰고 믿는다. 시인이 잃어버리고 싶은 “나”는 주관성이나 편협함, "언덕"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만나는 기회이기도,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제법 의연한 자세로 인생길에서 만나는 예상치 못한 언덕의 풍경에서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움푹 파인 물웅덩이에도 담대한 태도로 언덕의 기분을 살피기도 한다. 

시인이 노래하는 “흰 토끼”는 외로움을 나눌 친구이거나 삶의 질곡을 견딜 원천이라 읽는다. 그러니 "흰 토끼"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는 이유로 울상을 지을 수밖에. 시인은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이라고 노래하지만 이것은 사실일까? 막연한 기대일까? 희망고문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단지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내 곁의 친구나 사소해 보이는 기회가 소중한 이유다. 일출이 있듯 일몰이 있고 아무리 무더운 한여름에도 한 줄기 소슬바람이 분다.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이것은 우리에게 세상의 기후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흰 토끼"에 안절부절하기보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는 화자의 노래에 기대어 가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낫다고 일러준다. 지금의 이 폭염도 시간이 지나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있을 터이니 말이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 토끼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2

이젠, 지난 7월 19일에 다 읽지 못한 <택뢰 수> 괘의 '육오'와 '상육'의 효사를 공유한다. '구오'의 효사는 "九五(구오)는 孚于嘉(부우가)니 吉(길)하니라" 이다. TMI: 嘉:아름다울 가. 번역하면, '구오는 아름다운 데에 미더우니 길하다'가 된다. '구오'는 외괘의 중에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인군이다. 중정(中正)하게 자리를 지키고 정치를 잘 하니 마치 저녁에 황혼을 보듯이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백성이 '구오' 인군을 믿고 따르니 길하다. 아름다운 것에 믿음을 두면 길할 것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믿음만한 사람에게는 신의를 지키라는 거다. '구오'는 중정한 '육이' 음과 정응하고 있다. '육이'는 "소자(소자)"인 '초구'에 메이느라 자칫 '구오' "장부(장부)"를 잃는 우를 범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구오'는 '육이'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갖고 있다. "가(嘉)"는 '육이'를 상징한다. '육이'는 음이고, '구오'는 양이며, '육이'의 입장에서 '초구'와 '구오'를 각각 "소자"와 "장부"라는 남자로 비유 했었기에, 마찬가지로 '구오'의 입장에서 '육이'는 ㅔ 아름다운 여자가 된다. 물론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다른 글자들을 쓰지 않고 "가(嘉)"를 사용했다는 것에서 아름다음의 의미가 단순히 외모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좋은, 훌륭한, 가상(嘉尙)한'이라는 내면적 요소를 강조한 것이다.  그 "가"의 대상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으면 길할 것이라 했다. 

"구오'가 동하면, 지괘는 제51괘인 <중뢰 진(重雷 震)> 괘가 된다. <중뢰 진> 괘의 '육오' 효사는 "六五(육오)는 震(진)이 往來(왈래) 厲(여)하니 億(역)하야 无喪有事(무상유사)니라" 이다. 번역하면, '육오는 지진이 가고 오매 위태로우니, 헤아려서 일을 잃음이 없게 한다'가 된다. 우레거 오가는 것의 위태로움을 잘 헤아리면 유사시에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택뢰 수> 괘의 '구오'와 연결해서 읽으면, 우레가 치는 것처럼 관계에도 큰 변동이나 위기가 오기 마련이지만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하면 막상 일이 생긴다고 해도 잃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실의 대상이 사람이든, 관계이든, 자격이든 말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孚于嘉吉(부우가길)은 位正中也(위정중야)일새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아름다운 데에 미더워 길한 것은 자리가 바르고 가운데하기 때문이다'가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자리가 정중한 것'을 길할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정중'은 '구오'으ㅏ 자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육이'의 그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아무리 깊은 신뢰를 보낸다고 해도 그 신뢰를 저버릴 사람은 저버린다. 일시적으로 흔들릴지라도 결국 신뢰에 부응하는 사람은 결코 그런 자질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오'는 '육이'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본인도 신뢰를 받아야 하는 리더이다. '구오'가 사람들에게 갖는 믿음은 흉(凶)으로도 길(吉)로도 돌아올 수 있다. '육이'는 '구오'의 믿음을 길(吉)로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3
끝으로 '상육'의 효사는 "上六(상육)은 拘係之(구계지)오 乃從維之(내종유지)니 王用亨于西山(왕용형우서산)이로다" 이다. 번역하면, '상육은 잡아서 매고 이에 좇아 얽으니, 왕이 서산에서 형통하도다'가 된다. TMI: 拘:잡을 구·취할 구, 維:벼리 유·맬 유·얽을 유. <택뢰 수> 괘의 맨 위에 처하여 자리는 높으나, 모두가 '구오' 인군을 따르니 어느 누구도 '상육'을 따라주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억지로 잡아서 매고 따르라 하고 따르지 않는 자를 좇아가 얽으며 자기를 따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이미 백성의 신망을 잃은 왕이 해가 저물어 가는 서산에서 왕 자신의 영광스런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과도 같다. 

음인 '육이', '육삼'에 이어 '사육'의 효사에도 "계(系)"라는 글자가 쓰였다.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어떤 일에 매여 벗어나지 못하다'이다. "계"는 외호괘 <손괘> 바람과 내호괘 <간괘> 산의 상이 나온다. '육이'와 '육삼'과 달리 '상육'은 '따름'을 의미하는 <택뢰 수> 괘의 극(極)에 이르러 오도 가도 못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계(係)"보다 의미가 강한 "구계(拘係)"와 그것에 더해 밧줄이라는 의미의 "유(維)"까지 쓰였다.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담백한 주역>>에서 오중호 저자는 "붙잡혀 붙매이고 또 밧줄로 묶였지만 왕이 서산에서 제사를 지내게 될 것이다"로 읽었다. 그러면서, "실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라, 때는 반드시 온다"는 거다. 이 "육사'의 효사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고 한다. 문왕(文王)이 유리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 고향인 기산(岐山)으로 가면서 주왕(紂王)의 폭정에 등을 돌린 백성들과 함께하는 대목이다.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더라도 특히 이 '상육'의 효사는 지금은 붙잡혀 옴짝달짝 못하는 상황이라도 나중에는 서산에서 제사를 지내게 될 것이리고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외괘는 <태괘>이니 서쪽의 의미가 나오고, 내호괘는 <간괘>이니 산의 상이 나온다. 그래서 서산이 되었다. "형통하다"는 뜻의 "형(亨)"을 여기서는 '제사를 올리다'는 의미의 '향'이라고 읽자는 거다. "王用亨于西山(왕용형우서산)"은 제46괘 <지풍 승(地風 升)> 괘 '육사'의 "王用亨于岐山(왕용향우기산)이면 吉(길)코 无咎(무구)하리라"와 연결된다. 즉 '왕이 기산에서 제사를 드리면 길하고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참고로 제42괘 <풍뢰 익(風雷 益)> 괘의 '육이'에도 왕이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六二(육이)는 或益之(혹익지)면 十朋之(십붕지)라. 龜(귀)도 弗克違(불극위)나 永貞(영정)이면 吉(길)하니 王用享于帝(왕용ㅎ향우제)라도 吉(길)하리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번역하면, '육이는 혹 더하면 열 벗이다. 거북이도 능히 어기지 않으나 영구하게 바르게 하면 길하니, 왕이 상제께 제사지내더라도 길할 것이다가 된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서쪽 산에 올라 경건한 마음으로 산제(산제)를 올리는 것이기도 하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 정성을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서 다시 반성하고 겸손해질 수 있는 계기,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동기로 삼는 것이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拘係之(구게지)는 上窮也(상궁야)라" 이다. 번역하면, '상전에 말하였다. 잡아서 매는 것은 위에서 궁한 것이다'이 된다. 지금은 공자가 "궁(궁)"하다고 표현한 것처럼 모든 것이 풀리지 않는 답답하고 한심한 상황이지만 나중에는 사람들과 합심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 듯 전환의 시점을 맞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육'이 동하면 지괘는 제25괘 <천뢰 무망(天雷 无妄)> 괘가 된다. 천명에 순응하라고 이야기하는 괘이다. <천뢰 무망> 괘의 괘사는 "无妄(무망)은 元亨(원형)하고 利貞(이정)하니 其匪正(기비정)이면 有眚(유생)하릴새 不利有攸往(불리유유왕)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무망(无妄)은 크게 형통하고 바름이 이로우니, 그 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있을 것이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지 않다'가 된다. 크게 형통하니 바르게 하면 이롭다 올바르지 않으면 재앙이 있을 것이니 나아가는 것이 이롭지 않을 것이다. "원형이정"이니, 곧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여 아직은 나아가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천뢰 무망> 괘의 '상구' 효사는 "上九(상구)는 无妄(무망)에 行(행)이면 有眚(유생)하야 无攸利(무유리)하니라" 이다. 번역하면, '상구는 무망에 가면 재앙이 있어서 이로운 바가 없다'가 된다. 그러니까 나아가면 재앙이 있어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자중하면서 실력을 키우고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때인 것이다. 답답한 형국을 타개해 보겠다고 경솔하게 좌충우돌하면 상황이 더 꼬이고 뒤틀리기 쉬울 것이다.


5
'따른다'는 <택뢰 수(隨)> 괘의 단사를 다시 소환한다.  "彖曰(단왈) 隨(수)는 剛來而下柔(강래이하유)하고 動而說(동이열)이 隨(수)니 大亨(대형)코 貞(정)하야 无咎(무구)하야 而天下(이천하) 隨時(수시)하나니 隨之時義(수지시의) 大矣哉(대의재)라."  번역하면, '단전에 말하였다. 수(隨)는 강(剛)이 와서 유(柔)에 아래하고, 움직이고 기뻐함이 수(隨)니, 크게 형통하고 바르게 해서 허물이 없어서 천하가 때를 따르니, 수(隨)의 때와 뜻이 크도다'가 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천하가 때를 따르니("而天下 隨時, 이천하 수시"), 수의 때와 뜻이 크도다(隨之時義 大矣哉, 수지시의 대의재)이다.

<택뢰 수> 괘는 <천지(天地) 비(否)>에서 나온 것이다. <천지 비> 괘는 하늘은 하늘대로 위에 있고 땅은 땅대로 아래에 있어 서로 소통을 못해 불안하고 비색한 세상이니 누가 즐거워 따르겠는가? 서로 따르게 하려면 즐거워야 한다. <천지 비> 괘의 맨 위에 있는 양은 맨 밑으로 내려오고, 맨 밑에 있는 음은 맨 위로 올라가면, <택뢰 수> 괘가 된다. 높이 있는 사람이 맨 아래로 내려와서 사귀니 따르는 것이다. 위에서 높은 체나 하고 있으면 누가 따르겠는가? <택뢰 수> 괘는 "동열(動說)"의 덕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 <진괘> 우레는 움직이는 덕을 가지고 있고, 밖으로 <택괘> 연못은 기뻐하는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안으로 기쁜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니 서로가 반목질시하지 않고 따르므로 크게 형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잘못 따라서 남녀가 서로 좋아 따른다고 하다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든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따라서 매관매직을 한다 든지, 또 정부기관에 있는 사람과 재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정경유착이 된다고 하면 허물을 며치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게 하여 허물이 없어야 한다.

역은 단적으로 말하면, "수시변역이종도(隨時變易而從道)"라 했다. 흥미로운 말이다.  역은 변하고 바뀌는 것인데, 그 변역 하는 때를 따라서 민첩하게 변역을 하되 함부로 하지 말고, 그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隨之時義 大矣哉(수지시의 대의재}"라는 말이 이해가 잘 된다. "수시변역(隨時變易)", 때에 맞춰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시변역(隨時變易)'과 '수기응변(隨機應變)'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수시변역'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잘 대처하는 것이고, '수기응변'은 기회에 따라 잘 넘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시변역'은 만세의 정법이고, '수기응변'은 임시의 방편이다. 그리고 "수번뇌(隨煩惱)와 '수희(隨喜)'의 구별도 좋은 삶의 지혜가 된다. '수번뇌'는 사람의 번뇌 속에 원한, 분노, 질투 등 여러가지 잡다한 것들이 뒤를 이어 따른다는 뜻으로 불교 용어이다. '수희'는 <<법화경>> '석가세존이 이 법을 설하니 우리가 기쁘게 따른다'는 "世尊說此법, 아등수희(세존설차법, 아등수희)"에서 나온 말이다. 

내 삶의 슬로건은 "고집스러운 기쁨" 속에서 사는 거다. 인생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 우려면 기쁨을 일상에서 선택하고 잘 배치하여야 한다. 인생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낙(樂)보다는 "희(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는 기쁨이고, '락'은 즐거움이다. 둘 다 '쾌(快)'의 감정이지만,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희'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희'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이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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