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 삶의 모든 게 적당한 때가 있으며,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23. 08:15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7월 23일)

날씨가 무덥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같이 일해보자는 주문이 막 들어 와 더운 줄 모른다. 그러나 좀 두렵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하루에 한 가지 씩만 일하기로 했는데, 점점 만나야 하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던 차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페북에서 만났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엔 처음이 있다. 나는 지금, 다시, 지나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 앞에 서 있다.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알지 못하는 길 앞에서 두려움이 앞서지만, 첫발을 내디딜 준비가 되었다. 나는 나의 가능ㅁ성을 믿는다."("오마이뉴스, 정인순)

인생은 모두 타이밍이다. Life is all about timing. 우리 삶의 모든 게 적당한 때가 있으며,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성실도, 창의성도 지식도 인내가 동반되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어떤 일을 도모할 때도 동반되는 긴장과 두려움도 인내로써 극복이 가능하고, 수시로 발생하는 돌발 상황도 인내를 통한 합리적 시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가 있다. 사이클은 이렇다. 인내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자기 믿음을 키우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희망은 가능성이다. 희망은 언제나 믿는 자의 것이다. 믿는 자만이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진다. 승리는 언제나 목숨을 건 자의 것이다. 여기에 다 인내를 요구한다.

희망을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하고, 희망에서 오는 '가능성'을 보태면, 내 삶이 더 희망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은 희망적이어야 한다' 정의가 정의로워야 하고, 사랑이 사랑스러워야 하고, 문화가 문화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가장 마지막에 죽는 것이 희망이다"라는 독일어 문장이 있다. 키에로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희망의 손을 뿌리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죽는다. 많은 화두를 얻었다. 언젠가 나는 희망을 '가능성'이라고 보기보다, '절망하지 않기'로 받아들였던 적도 있다.

어쨌든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성실하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믿음과 지금은 힘들지만 미래에는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인내하면, 포기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뀌고, 미래는 결정에 따라 바뀐다.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뀌고 바꾸지 않기로 고집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인생의 가치는 소유가 아니라, 더 깊은 인격이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이다. 인생의 참된 아름다움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다. 그 성숙이 성품이 된다. 다시 이 성품이 격이고, 매력이 카리스마이다.

그 '카리스마'는 가만히 풍기는 향기와 같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존재가 빛이 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는 오랫동안 쌓인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된 기분 좋은 향수와 같다. 배철현 교수는 그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을 '격'이 있는 자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살다 보면, 드물게 격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 사람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주위 사람들을 자신의 매력으로 알게 모르게 끌어들인다. 이 매력은, 흉내와 시기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여 오랫동안 오롯이 정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자신만의 개성이 넘치는 길을 내서, 그곳에서 세상을 보라고 주위 사람들을 유인한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매력을 스스로 찾도록 친절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부탁한다."(배철현)

자신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람은 감동 그 자체다. 그는 무엇을 억지로 드러내려고 치장하지 않는다. 요란한 치장은 부담스러운 옷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진부하고 천하고 공허하다는 증거다. 그것은 내면의 공허를 외면의 요란으로 감추려는 열등감이다. 이런 시끄러운 열등이 우월이라고 광고하는 세상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은 영웅적이다. 카리스마가 있는 자는 구도자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안다. 그곳을 향해 그 누구의 눈치로 보지 않고 정진한다. 그는 마치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과 같다. 개울물에 방해란 없다. 커다란 바위, 작은 나무, 약간의 늪지대 등등.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에게 유일한 길이다. 이것들은 개울물을 정화시켜주고 속도를 북돋아 주는 도움일 뿐이다.

오늘도, 공유하는 시처럼, "가지 않을 수 없는" 그 길을 간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는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다. 그 길은 4S이다. Simple: 단순하게 산다. Small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Smile 화내지 않고 웃으며 산다. Slow: 천천히 느리게 산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 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 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김종천이라는 분의 담벼락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당나귀와 우물"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다. 농부가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다. 마침 당나귀는 늙었고 쓸모 없는 우물도 묻어 버리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 흙은 파 우물을 메워갔다. 당나귀는 더욱 더 울부짖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웬 일인지 당나귀가 잠잠해졌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하여 우물 속으로 들여 다 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렇게 해서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하여 무사히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 던진 비방과 모함과 굴욕의 흙이 오히려 자신을 살렸다. 남이 진흙을 던질 때 그것을 털어버리고 자신이 더 성장하고 높아 질 수 있는 영혼의 발판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어느 날 곤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을 맞이한다. 뒤집어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삶에는 반대가 되는 거울 뒤쪽 같은 세상이 있다. 불행이 행이 되고, 행이 불행이 되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의 변화가 있다. 우물 속 같이 절망의 극한 속에서도 불행을 이용하여 행운으로 바꾸는 놀라운 역전의 기회가 있다. 우물에 빠진 당나귀처럼, 남들이 나를 해칠지라도 두려워 말 일이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다.

중국의 한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도망갔다. 이에 이웃들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몇 달 후 도망친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다, 이때 이웃들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마해 다리가 부러졌으나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는 내용이다. 새옹지마를 직역하면, '노인의 말'이다. 그 말때문에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눈 앞에 벌어지는 결과만을 가지고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오는 긴 여정이다. 그런 시도를 '정신을 차렸다' 혹은 '제정신이다'라고 부른다. '제정신'은 순수 한국어 '저의'의 준말 '제'와 '정신'의 합성어다. 우리가 자신의 정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는, 혹은 자신하고 연관된 타인들이 좋다고 제시한 세계관, 종교관, 삶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기 삶의 문법을 구축하려 한다. 타인의 이념, 철학, 교리, 가르침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모래 위에서 세운 집이다.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런 외부의 유혹에 경도된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될 수 있는 그 마음인 '본심'이다. 본심은 성배와 같아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그 존재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지 가만히 추적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매일 매일 수련할 때, 슬그머니 등장하는 밤하늘의 작은 별이다. '욕심'은 '과유불급'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의 처사다. 그것은 배가 부르면서도 자신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게걸스럽게 먹으려는 식탐과 같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 자신이 배부른지 알면서도 과도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욕심(慾)이란 한자가 그렇다. 깊은 골짜기(谷)에서 끝없이 흘러내려 오는 물을 자신의 작은 입을 벌려(欠)다 마셔보겠다는 마음(心)이다. 욕망이란 단어가 근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매일 값싸게 만드는 마음의 마약이다. 이 욕심에서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와야 자신에게 온전하고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된다. 인간은 모두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 바로 '본심'이다.

본심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웅장한 나무의 뿌리와 같다. 저 큰 나무가 언제나 중력을 거슬러 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이유는, 그 높이와 너비에 어울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저 우주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 나무의 뿌리는 정확하게 지구의 중심으로, 아래로, 어둠으로, 심연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 보이지 않는 근원이 나무의 품격을 만든다. 태곳적에 바람에 의해 씨앗이 날라 왔다. 그 이름 모를 야산의 모서리에 안착하였고, 바람, 공기, 안개, 비, 햇빛을 통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과 가지를 내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통해 이렇게 우뚝 선 나무가 되었다. 구도자는 그런 나무와 같다. 나무의 특징은 단순함이다. 자신의 뿌리로부터 중력을 거슬러 올린 생명의 환희를 간직하고 항상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단순함은 궁극의 사치이며 최선의 아름다움이다. 세상에는 자연이 있고 사물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자연의 원칙은 무위(無爲)이며 인간이 만든 사물의 원칙은 인위(人爲)다. 격은 산에 심긴 나무의 뿌리와 같이 볼 수는 없지만, 그 웅장하게 하늘 높이 가지를 펼친 나무의 기반이다. 격은 그 대상이 그 대상 답게 하는 품격이다. 나무에게서 성품을 배운다. 그 성품이 격이고, 매력이고 카리스마이다. 오늘도 그 뿌리를 위해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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