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중에 어떤 기쁨을 택하느냐가 삶의 격과 질을 완전 반대로 만들어 낸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7월 20일)
인간의 지성(知性)에는 '틈'이 있다. 영어로 이걸 '갭(gap)'이라 한다. 의지와 행동 사이에 ‘생각’이 있고, 개념과 제작 사이에 ‘디자인’이 있고, 꿈과 현실 사이에 ‘플랜’이 있다. 하늘에선 뚝 떨어진 현실이란 없다. "인간의 몸은 생각하고, 피아노를 치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체온을 조절하고, 세균을 죽이고, 해독하고, 아기를 잉태하는 일을 한꺼번에 수행한다. 이를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지성이다. 지성은 우리 몸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만드는 한편,
충만함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하도록 이끈다." (디팩 초프라의 《완전한 행복》) 이러한 선택을 하려면 '틈'을 만들어야 한다.
굳이 지성이 없어도 인간의 몸은 작동할 수 있다. 호르몬을 분비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마치 글을 몰라도 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알면 말도 달라지듯, 지성을 갖추면 모든 것의 격과 수준이 달라진다. 삶의 방식이 풍성해지고 그 풍성함이 다른 사람의 삶에도 넉넉함을 안겨준다. 그러니까 틈을 벌리는 지성에서 한 사람의 격과 수준이 나오는 것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선택'의 문제이다.
쾌락과 지성 그리고 중독과 영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 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쾌락을 선택하면 중독으로 가고, 지성을 선택하면 영성으로 이어진다.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이번 주 목요일부터 거리두기 3단계로 오후 10시까지로 영업을 제한한다. 넘어진겸에 쉬어 간다고, 고요와 비움으로 평상심을 유지하고,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더위를 극복할 생각이다. 내가 <장자>을 읽으면 좋아했던 문장이다. "瞻彼闋者(첨피결자) 虛室生白(허실생백) 吉祥止止(길상지지) 夫且不止(부차부지) 是之謂坐馳(시지위좌치)" 이 건 한편의 시이다. "저 빈 곳을 보라/텅 빈 방에 밝은 햇빛이 찬다./행복은 고요함 속에 머무르는 것
고요함 속에 머무르지 못하면/이를 일러 '앉아서 달림(坐馳, 좌치)이라 한다." (오강남 역)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선택"의 문제이다.
어제 오후에 지인의 전화로 낮술을 하는 바람에, 어제 <인문 일기>를 오늘 공유한다. 그 지인이 보이스 피싱으로 많은 금액을 잃었다 했다.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위로라 생각하고 주저없이 나가 저녁까지 먹고 왔다. 참 세상은 어지럽다. 초연결시대에 스마트폰이 팔요 악이다. 스마트폰을 해킹하여, 통장에 있는 돈을 빼내가는 방식의 사기였다.
선택/이수익
과녁을 향하여 정조준을 끝낸 화살을 띄운다
마지막- 이라는, 필생의 한 판 승부를 위하여
저 먼 하늘 끝으로 시위를 날린다
날아가는 일은 지금의 운명,
포기할 수 없는 힘에 갇힌 중력으로
한번 거칠게 부딪쳐 보자는 듯
더 높이 떠오르는 일의 불굴의 욕망만으로
그의 입은 가득해진다
마침내, 떨어져 내려야 할 충격적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면서
불의 주둥이에 갇힌 크나큰 고통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끌어당기는 하강의 속도로 파르르 떨리면서
한 순간에 힘을 쏟아야 할 시점에 이르러,
그것은 폭풍 같은 명중으로
가슴을 치면서 우뚝 서 있거나
또는 어처구니없이 텅 빈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의
그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므로
오, 마지막 선택은 시작된다
선택 중에 어떤 기쁨을 택하느냐가 삶의 격과 질을 완전 반대로 만들어 낸다. 그것은, 오늘 시에 나오는 화살처럼, "폭풍 같은 명중으로 가슴을 치면 우뚝 서 있거나/또는 어처구니없이 텅 빈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의/그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윤정구 교수의 담벼락에서 커다란 통찰을 얻었다. 그리고 re-writing 해 보았다.
우리는 즐거움을 주는 원천을 자기도 모르게 일상에서 반복한다. 당연히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는다. 어쨌든 즐거움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그것에 중독된다. 중독의 단순한 메커니즘이다. 즐겁지 않아 반복이 불가능하다면 중독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한다. 이런 중독에는 좋은 중독과 나쁜 중독이 있다. 예컨대, 공부에 중독되는 것은 좋은 중독이고, 마약이나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것은 나쁜 중독이다. 공부같은 좋은 중독은 즐거움의 선순환 고리를 연결해 삶을 재생시키며 생명의 원리를 보이지만, 스마트폰이나 마약 중독은 즐거움은 악순환의 고리를 완성해 궁극적으로 삶을 죽음으로 이끈다.
좋은 중독의 예인 공부 중독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해방시키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공부는 해방의 도구이다. 공부를 통해 자신이 삶의 진실에 더 가까워지면 더 큰 자유로움을 느끼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세상을 통제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래 공부는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공부를 통해 탁월한 시선에 이르면 그만큼 세상을 통제하는 힘이 더 커진다. 그리고 주제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 된다. 윤교수님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인간 의식의 본질은 자유로움이다. 공부에 대한 중독은 의식의 자유로움을 통해 몸을 해방시키는 과정이다. [그 해방된 만큼] 세상과 자신이 끊임없이 교감[소통]할 수 있고, 이 교감[소통]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스스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즐거움이 플로우처럼 의식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져 더 큰 즐거움을 낳게 하는 선순환이 완성된다." 그리고 "진짜 공부를 통한 선순환의 더 큰 즐거움은 자신과 교류하기 위해 멀리서도 찾아오는 친구들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좋은 중독과 나쁜 중독의 차이는 결국 자신과 진정으로 교류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지 아니면 있던 친구도 점점 사라져가는지 로도 종결된다."
이제 공자가 <논어>에서 인간으로서 가장 큰 즐거움을 얻는 순간을 공부와 친구로 규정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好(학이지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맞춰 그것을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 가>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浩(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 가)"를 <논어>의 제 앞에 말한 이유를 잘 알았다. 학문의 즐거움과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동아시아에서는 공부를 지속하여 학문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이것을 친구와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학문을 통해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 즐거움을 또 다시 얻기 위해서 또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이다. 즉 학문에 중독되는 거다.
반면, 스마트폰, 마약, 도박 등의 중독 원리도 학문에 중독되는 메커니즘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친구가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어쩌다 스마트폰이나 SNS에 친구들이 반응을 해오고 여기에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 이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계속 스마트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약이나 도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안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어쩌다 마약을 접하고 여기에서 '쉬운'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 계속 이 '쉬운'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댄다. 여기서 '쉬운'에 방점을 찍는다. 또한 경제적으로 불안함을 느끼던 사람들이 어쩌다 도박을 해서 큰 돈을 따는 경우가 생기면 이 같은 경험을 다시 얻기 위해서 도박을 지속한다. 잃기만 했다면 중독도 일리가 없다. 중독은 만족에 대한 경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의 해결책으로 감옥을 생각한다. 감옥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이나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최고의 값싼 안정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 스마트폰이나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는 행동을 한다. 불안이나 공포를 느낄 때마다 스마트폰이나 마약을 통해서 자신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식으로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더 강하게 중독되기 시작한다.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살수록 세상과의 교감이 끊어지고 사회적 부적응자로 낙인 찍힌다. 세상으로부터 점점 잊혀져 존재감을 잃어간다. 불안과 공포를 쉽게 해결하는 즐거움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은 친구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비극으로 종결된다.
역으로 학문에 대해 중독되는 사람들은 삶은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되는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재해석됨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공부 중독은 감옥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있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해체하고 다시 해방시키는 즐거움이 된다. <논어>에서 공부하는 즐거움과 건강한 친구와 교류를 가장 건강한 즐거움의 기원으로 제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중심의 인지적 공부가 아니라 친구와 삶을 통해 나눌 수 있는 성장체험을 공유하고 이런 경험이 영향력으로 번져 더 많은 친구를 불러온다. 진짜 공부에 빠진 사람들은 마약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들처럼 의식이 돌처럼 굳어질 틈이 없다.
마약이나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현상은 비현실적인 상상 속에서 엄습해 오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자기방어적 메커니즘인 것이다. 불안과 공포 때문에 성장과 자유로움이 본질인 의식이 돌처럼 굳어져 버리면 확실히 만지고 직접 소유할 수 있는 것들에 집착한다. 마약, 스마트폰, 돈, 명예 권력 등을 더 많이 축적해야 불안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에 갇힌다. 돌처럼 굳어진 의식에 해체적 초월 기능을 상실한다. 나쁜 중독이란 의식이 마약, 스마트폰, 돈, 명예에 오염되어 죽어버린 것이다. 그래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공부 같은 좋은 중독과 마약이나 스마트폰 같은 나쁜 중독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시 말하지만, 학문은 즐거움의 선순환 고리를 연결해 삶을 재생시키지만, 스마트폰이나 마약 중독은 즐거움의 악순환 고리를 완성해 궁극적으로 삶을 죽음으로 이끈다. 선택의 문제이다. 학문을 통해 지성의 힘을 길러야, 쾌락이나 나쁜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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