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홀로되기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17일)
오늘의 화두는 "함께 홀로되기"이다. 영혼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원한다면 우리는 영혼이 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더 큰 세상에서 누구에게 속하는 지를 아는 참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홀로됨에서 생기는 내적인 친밀성과 커뮤니티에서 생기는 다름에 대한 인식이 모두 필요하다. 내면의 교사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미궁 같아서 길을 잃기 쉽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많은 걸 배워야 하지만 혼잡한 궁중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홀로됨과 커뮤니티가 동시에 필요하다. 이 방식으로 배우는 것들이 저 방식으로 배우는 것들을 북돋우고 균형 잡아 준다. 그 둘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 함께하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든다.
이 방법이 쉽지 않다. 우리가 홀로됨과 커뮤니티를 진정한 역설로 함께 받아들이려면 그 양극에 대한 이해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 홀로됨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자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 커뮤니티는 반드시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놓치지 않음을 뜻한다.
이러한 '홀로됨의 커뮤니티'가 수도원 전통이다. 이 곳은 영혼의 본성과 요구를 존중하는 원칙과 실천들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러면 무엇이 영혼의 본성이고 요구인가? 영혼은 야생동물처럼 거칠고, 회복이 빠르고, 재빠르고, 직감적이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기에 어떤 어려운 곳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죽음과 같은 암흑 속에서 우리가 늘 의존해오던 능력들은 무너진다. 우리의 지능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고, 감정은 마비되고, 의는 무기력해지고, 에고는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영혼이 지성을 통해 말할 때 우리는 가슴 속 진심 어린 마음으로 생각한다. 영혼이 감정을 통해 말할 때, 감정은 우리의 관계를 풍요롭게 한다. 영혼이 의지를 통해 말할 때, 우리의 의지력은 공공선을 향해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영혼이 에고를 통해 말할 때, 우리는 용감하게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들이 영적인 성질을 띤다면 우리가 더 능숙하게 복잡한 삶을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들의 영혼은 야생동물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 있을 때는 덤불 속으로 숨어든다. 야생동물을 보고 싶다면 숲을 마구 헤치고 다니면서 밖으로 나오라고 고함쳐서는 안 된다. 조용히 숲 속으로 들어가, 나무에 기대어 끈덕지게 앉아, 땅과 더불어 숨쉬고, 주위 풍경 속으로 녹아 들어야만 우리가 찾는 야생동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불행히도 우리 문화에서 커뮤니티는 함께 숲을 헤치고 다니면서 영혼에게 겁주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는 지능, 감정, 의지, 에고는 드러날지 모르나 영혼은 드러나지 않는다.
'신뢰의 서클'이 있어야 한다. 그곳은 조심스러운 영혼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조용히 '숲에' 앉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러한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밀어붙이지 않고 기다린다. 대결하지 않고 관대하다. 우리의 기대와 요구로 채우려 하지 않고, 내면의 교사가 실재한다는 믿음으로 채우려 한다. 예를 들어, 우리를 참 자아 쪽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이들은 우리에게 모자란다고 비판하지 않고 변화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준다. 그 사랑은 우리를 밖으로 자라나게 하는 충분한 에너지의 공간, 위험을 감수하고 성장에 필요한 실패를 견딜 만큼 충분히 안전한 힘 있는 공간을 둘러싼다. 우리는 바깥의 요구에 의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최선의 가능성으로 뻗어나가도록 하는 우리 내면의 공간 안에서 참자아 쪽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사유를 하다가 문득 언젠가 들었던 어느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암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갈수록 성격이 난폭 해졌다. 가족은 물론 병원의 전문 상담가들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아는 동네 꼬마가 병문안을 왔다. 병실에 들어간 꼬마는 30분 뒤에 나왔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할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꼬마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니?' 꼬마가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우시기에 따라서 같이 울었을 뿐이에요.' 이게 짐심으로 함께하는 법이 아닐까?
어쩌면 죽어가는 이 곁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함께 하는 법, 즉 상대방과 나 사이의 공간을 신성하게 여기고 영혼과 운명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않을까? 우리는 그 존중을 나타내기 위해 아무 말 없이 공손히 앉아 잇고, 어쩌면 그것을 죽어가는 이가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떠하든 우리는 한 사람의 외로운 여행을 지켜보면서 줄곧 그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함께 함은 우리가 신리의 서클에서 지금 당장 주고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고 신영복 서화집에서 보았던 문구가 생각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두 홀로됨이 서로를 보호하고, 접하고 인사하는 것"이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도 소환된다.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영혼을 편안하게 한다.
- 그러한 사랑은 우리가 때때로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학대하는 관계에서 공공연히 일어나는 물리적인 폭력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와줄 의도로 다른 이의 홀로됨을 방해하면서 가하는 미묘한 폭력을 일컫는다.
- 이런 종류의 사랑은 악의 없는 외면도 막아주기 때문이다. 무관심을 피하게 한다는 거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한 노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타인의 투쟁이나 고통을 외면하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의 서클 이야기는 내일로 미룬다. 그리고 평소에 좋아하던 시를 공유하고 마친다.
사랑하려 거든/류인순
고슴도치같이 사랑하라
서로 소유하려 들지 말고
너무 가까이 가려 하지 말고
욕심에 가시 털 세우지 말고
서로 찔려 상처 생기지 않게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며
가슴으로 사랑하라
영원한 평행선으로
쉬어 가는 간이역에 앉아
함께 숨 고르며
손잡으면 닿을 수 있는
그만큼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주고받는 속삭임만으로
서로의 온기를 잃지 않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사랑은 나무와 같다. 나무가 자라면 그만큼의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사랑도 사랑하는 만큼 사랑으로 당할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고통을 줄인다고 그림자를 반으로 쪼개려면 사랑을 반으로 쪼개야 한다. 사랑은 고통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고통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려면, 넘어지는 게 무섭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사랑을 하려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안 해 본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면 그만큼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순간 끝이 난다. ‘하나'되는 사랑은 사랑의 종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 모두 혹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전제를 함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그래서 사랑은 결코 ‘하나'가 아니라, ‘둘'의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래 사랑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잔인 해져야 자기 사랑을 한다. 조연으로만 있으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예는 주인에게 잔인하지 못한 반면, 주인은 때리기도 하고, 상도 준다. 잔인해 지려면 자신의 품위 지키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야성을 끌어내고 그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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