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리되지 않고, 부족할 것 없이, 온전한 채로 이 세상에 온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16일)
우리가 지금 영혼과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도덕주의'이다. 도덕주의는 특정한 도덕을 우선시하는, 19세기에 발생한 철학이다. '그가 도덕적'이라는 말과 '그는 도덕주의자야'라는 말은 다르다. 누군가를 '도덕적'이라 했을 때는 그 사람 개인의 행실에 국한시켜 하는 말이지만, '도덕주의적'이라 했을 때는 그 사람이 세상을 도덕의 잣대로만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도덕은 자신을 향하지만, 도덕주의는 남을 행한다. 남을 단죄할 때는 도덕주의 칼을 쓰고, 자신의 처신은 도덕을 초월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독설도 불사하는 전투적 자세로 서민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정책을 펴겠다면서 자신은 재테크로 치부하고 자기 자식은 극성을 부려 일류 교육을 받게 하는 정치인이 있다고 가정해 보면, 법대로 하는 일인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주변의 많은 도덕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있어야 할 곳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 경쟁에서의 승리, 과소비, 성차별, 인종 차별 등 자기가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환상을 줄 그 어떤 것으로 채우려 하는 내면의 공허함 - 를 갖고 있다. 도덕주의가 만연된 사회에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진정한 보살핌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를 고립시켜 불안하게 만드는 대중 사회, 인간의 권리보다 자본을 우선시하는 경제 체제, 시민들을 하찮게 여기는 정치 과정이 우리의 도덕적인 무관심을 낳는 외부 원인들이다. 이런 것들이 고삐 풀린 경쟁, 사회적인 무책임, 빈부 격차를 가져오고 부추기는 세력들이다.
건강한 커뮤니티는 사람들이 참자아에 대한 의식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건강한 커뮤니티 안에서는 자아를 주고 받고, 귀 기울이며 말하고, 존재하고 행동하는 자연스러운 능력을 발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뮤니티가 약해지고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 자아는 위축되고 우리 자신과의 접촉도 약해진다. 우리가 관계라는 망 안에서 자신일 수 있는 기회를 잃으면, 우리는 관계를 더욱 분열시키고 내면의 공허함이라는 유행병을 퍼트리는 행동을 계속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자아감마저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분리되지 않고, 부족할 것 없이, 온전한 채로 이 세상에 온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내면에 있는 것들을 보호하려 하거나 주위 사람들을 속이려 하면서 내면과 바깥의 삶 사이에 벽을 세운다.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살펴본다.
우선 자신의 바깥, 또는 무대 위 삶을 그려본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며, 자신이 세상과 상호작용할 때 자신의 바람과 걱정을 그려보는 거다.
- 누가 지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 내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
다른 한 면에는 자신의 내면, 무대 뒤의 삶을 그려본다. 여기서 쓰이는 낱말들은 '생각, 직관, 느낌, 가치, 믿음'과 같은 좀 더 불안하고 더 반성적인 낱말들이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들의 원천을 가리키기 위해 '마음, 심정, 영혼, 참 자아, 정신'과 같은 낱말들을 선택한다.
이 무대 뒤와 무대 위의 삶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펼쳐진다고 우리가 읽고 있는 파커J. 파머는 <<온전한 삶으로 여행>>에서 말했다.
1. 내면의 삶과 바깥의 삶 사이에 아무런 분리도 없는 단계: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 내면에 있는 건 즉시 밖으로 나타난다.
2. 어린 시절을 출발하여 사춘기와 성인기를 거치면서 만드는 분리의 벽: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더 똑똑하고 더 거칠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처음에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취약한 자아를 숨기기 위해 벽이 필요했다. 그러나 낯선 이들에게 감춰진 자아는 곧 가까운 이들에게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작장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튼튼하게 둘러쳤던 벽은 가족과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쉽사리 부서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직업 세계에 서와 마찬가지로 사적인 삶에서도 참자아를 계속 숨기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으로 부터도 자신의 진실을 감추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결국 벽 뒤에서 살게 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과가 발생한다.
- 내면의 빛이 우리가 새상에서 하는 일을 비출 수 없다.
- 우리가 벽 뒤에서 살면 세상의 빛이 우리 내면의 어둠을 비출 수 없다. 오만이 그러한 에 중의 하나이다. 즉 오만을 못 본다.
- 우리가 벽 뒤에서 살면, 우리와 가까운 이들은 무대 위 모습과 무대 뒤 모습 사이의 간극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3. 치유의 단계: 우리의 가치와 믿음 주위에 무대 위 삶을 다시 배치함으로써 통합을 이룰 수 있다. 바깥의 삶을 내면의 진실에 맞추려는 욕망은 우리를 통합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 "중심 잡힌" 다음과 같이 열망을 나타낸다. '나는 내면의 진실을 중심으로 하여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결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림자가 남아있는 데, 그것은 위장된 2단계일 수 있다.
4. 마지막 단계: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밖으로 계속 흘러 나가 세상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계속 안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는 단계이다. 이 4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성인으로서 타고난 온전성을 발휘하게 된다. 성인의 온전성은 유아의 온전성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내면의 아이를 맞아들이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 우리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은 지니고 있지 않은 짐과 요구 - 우리의 실패, 배반, 슬픔이라는 짐과 우리의 재능, 능력, 비전의 요구 - 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러면서 어른됨의 한 가운데 살면서 , 더 나아가 성장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 우리가 내면에서 바깥세상으로 무엇을 내보내고 있고, 그것이 '저 바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그것이, '여기 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가 '분리된 삶'을 사는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그러한 보호 본능은 '인생에 대한 밝은 기대'와 '그늘진 현실' 사이의 간극을 보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어린아이일 때 모든 아이의 타고난 선물인 '기쁨의 날개를 단 에너지'를 타고 그 '어두운 심연'을 넘어 갈 수 있다. 이 에너지는, 시인 루미의 말에 따르면, "여기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한" 순수한 영혼에서 나온다. 아이들이 커다란 곤경에 맞닥뜨려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건 이 순수한 영혼 덕분이다. 그런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성공을 거두는 데 몰두하면서 영혼과 접촉을 끊고 역할 속으로 사라진다. 즉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은 어른이 된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속 모습이 과연 같을까 하고 자문한다. 그 대답이 "예"라면 우리는 자신을 맡겨도 될 만큼 그 관계가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긴장을 푼다. 그러나 대답이 "아니오"라면 우리는 극도로 경계한다. 더 나아가 속과 겉의 불일치는 서로 의욕과 능력을 억압하여 관계가 계속 훼손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 게 안전하고 건전한 방식은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 그리하여 영혼의 진실이 우리의 역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건전해지고, 안전해 질 것이다.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아이를 찾아야 한다. 서울 광화문 교보 빌딩에 소개된 적 있던 시구가 소환된다.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시집에서 발췌한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아니면 사라졌을까?" 말이다. 오늘 아침 그 시의 전문을 공유한다. <<질문의 책>> 제 44번에 실린 거다.
질문의 책/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역)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쫓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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