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딴지는 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엉터리'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7월 15일)
요즈음 내가 늘 다니는 산책길에는 오늘 아침 사진처럼 예쁜 노란 꽃이 지천이다. 돼지감자 꽃이다. 돼지감자는 감자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못 생겼다. 그런데 꽃과 잎은 감자와 같이 생기지 않았는데, '뚱딴지'같이 감자 같은 뿌리가 달렸다고 '뚱딴지'라 한다. 그래 우리는 일상에서 생김새나 성품이 완고하고 우둔하며 무뚝뚝한 사람 또는 엉뚱한 사람을 일컬어 ‘뚱딴지 같다’고 비하하는 말로 쓴다. 요즘은 주로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뚱딴지는 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엉터리'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또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다'는 속담과도 의미가 비슷하다. ‘엉터리'는 '사물의 기초'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래서 ‘엉터리 없다’고 하면, '어떤 일의 기초나 근거가 없다', 곧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을 응용하여 허황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엉터리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엉터리없는 사람'을 그냥 ‘엉터리'라고 하는 것도 표준말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 알려진 말이 널리 쓰이게 되니까 할 수 없이 표준으로 삼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TV에 자주 나오는 이들이 엉터리 같다.
말이 나왔으니 좀 더 말해본다. ‘엉터리'와 비슷한 말 가운데 '‘터무니'가 있다. '터무니'는 '터를 잡은 자취'를 뜻하는 말로서, “수십 년 만에 고향에 갔더니 우리 가족이 살던 터무니가 사라졌다"고 쓸 수 있다. 이 말은 또, 정당한 근거나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도 널리 쓰여 왔다. “변명을 하더라도 터무니가 있어야 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정당한 근거나 이유가 없을 때, 우리는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다만 ‘엉터리 있다’는 말이 없는 것처럼, '터무니 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엉터리 없다’, ‘터무니 없다'는 말들처럼 ‘없다'가 붙어 쓰이는 말 가운데 ‘어처구니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또한 ‘어처구니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어처구니'는 ‘상상 밖에 엄청나게 큰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건설 장비 가운데, 큰 바위를 깨뜨리는 커다란 쇠망치를 '어처구니'라 한다. 이 말을 응용하여 '어처구니 없다’고 하면, '하도 기가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는 '맷돌의 나무 손잡이'를 '어처구니'라 한다, 둔중한 돌덩어리를 돌리며,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그 기능은 어처구니의 동력전달에서부터 온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론 적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메타포를 형성하는 기능은 조화의 시작이다. '어처구니 없는 세상'은 조화가 깨진 세상이다.
말이 나왔으니, ‘뜬금 없이'라는 말도 이야기 해본다. 이 때의 ‘뜬'은 ‘뜨다'의 관형형이고, ‘금'은 '돈'을 말한다. 곧 ‘떠 있는 돈'을 의미한다. 일상에 쓰이는 '뜬금'이란, '제자리에 묶여 있지 않고 제 마음대로 올랐다 내렸다 하는 물건값'을 말한다. 시세에 따라 달라지는 값이니, 굳이 한자 말로 바꾸자면 ‘변동 가(變動價)’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들쑥날쑥하거나 갑작스럽고도 엉뚱한 모양을 ‘뜬금 없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낱말 뜻대로라면 ‘뜬금으로’ 또는 ‘뜬금 처럼'으로 써야 앞뒤가 통하게 된다. 그런데도 ‘뜬금 없이'로 쓰고 있는 것은, 이때의 ‘없다'를 부정으로 쓴 게 아니라 강조하는 말로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용례는 가끔 눈에 뜨인다. ‘안절부절'이란 말은 몹시 불안하고 초조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모양을 표현하는 말인데, 그 동사형은 ‘안절부절 하다'가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다'이다. ‘뜬금 없이'에서처럼, 이때에도 ‘못하다'는 부정이 아니라, 강조의 구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견딜까 하다가, '삶은 고해(苦海)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스캇 펙(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 이야기는 오늘의 시를 공유한 다음으로 이어간다. 어제부터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샾62> 앞에 시를 한 편씩 게시한다. 그 첫 번째 시이다. 이유는 따뜻한 시이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배한봉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수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사실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사는 대전, 그리고 현 정부, 국민의 대표 국회위원 그리고 언론과 교육계 등 내 마음처럼 돌아가지 않아 속상하다. 특히 우리 대전의 미래는 매우 암담하다. 그래 삶이 즐겁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러다 스캇 펙(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삶은 응당 편안한 것이라는 믿음을 깨고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는 진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고통을 받아들이기만 하라고 하진 않는다. 저자는 '훈육'을 통해 괴로움을 감당하고 문제에 의한 고통을 건설적으로 겪게 한다. '훈육'이란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에 대한 헌신, 균형 잡기, 이렇게 네 가지를 말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했던 훈육은 내가 뿜어내는 기운과 우주의 기운이 조화를 이루려고 애를 썼다. 그 조화 속에서 내가 좋아하고, 나로 살 수 있도록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며,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그리고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렸다. 디테일이 없었다.
한 마디로 하면. '감인대(堪忍待)'였다. 세상은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곳이란 말이다. 힘든 일이 있으면 견뎌내야 하고, 화나는 일이 있는 참아야 하고, 절망 앞에서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살라는 말이다. 견디고, 참고, 기다린다. 인생 고해(苦海)를 건너는 게 우리의 삶이란 것을 받아들였다. 원효의 말, "일인(一忍)이 장락(長樂)"을 늘 기억했다. 한 번 꿀꺽 참는 게 오랜 즐거움이라는 거다. 그리고 조바심 낼 것 없다. 급하게 서두를 것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다 때가 있다. 이게 내 방식이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삶은 고통과 문제의 연속, 이게 현실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삶은 응당 편안한 것이라는 믿음을 깨고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라는 진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위에서 말한 네 가지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려는 의지로 '사랑'을 말한다. 불교와 만난다.
불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집착이 일으키는 고통("일체개고, 一切皆苦")을 벗어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른다는 진리, 사성제(四聖諦)를 깨달으라 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를 두 자로 요약하면, 깨달음과 사랑, 다르게 말하면 깨달아 지혜를 얻고(사실 가치), 자비를 베푸는(판단 가치)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지혜와 사랑이다.
내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놀란 부분이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장이었다. 저자는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며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희생도, 애착도, 느낌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영적 성장'을 일종의 더 나은 상태가 되는 것,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받아들이기 쉽다. 분명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고 또 상대방이 더 나은 상태가 되길 바랐으니 말이다.
저자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성과 관련된 욕망이며 일시적 경험일 뿐 참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참사랑에 도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좋은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실 환상일 뿐이지만 그로 인해 더 나아가 나와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에는 정신과 의사인 저자에게 심리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사례가 많이 등장하는데, 적절한 심리 치료는 정상적인 삶을 살거나 정신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거기에 의지하게끔 만드는 목발이 아닌, 우리 생활에 유용한 도구인 망치나 못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게 인문 운동가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목발이 아닌 망치나 못의 역할 말이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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