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세계를 초월하자.

338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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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무더운 날씨인데, 부여의 <궁남지>에 다녀왔다. 연꽃들을 실컷 즐겼다. 난 연꽃에서 진흙을 읽는다. 진흙을 뚫고 올라와 연꽃이 핀다. 이를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 한다.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더러움(진흙)과 깨끗함(연꽃)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세속은 이분법적으로 쪼개진 세계의 공기를 마신다. 선이 있어야 악이 있으니, 선하게 살 일도 아니다. 붓다가 말하는 해탈의 세계는 선과 악의 대립이 없다. 성경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느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 선악을 가르는 화살이 녹은 자리에 핀 꽃이 연꽃이다.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은 '해탈'이기도 한다. 해탈의 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왜? 더 이상 진흙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더운 날씨인다. 연꽃을 만났다.
연꽃 밭에서/이건청
진흙 밭에 빠진 날, 힘들고 지친 날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그만 자리에 눕고 싶은 날
연꽃 보러 가자, 연꽃 밭의 연꽃들이
진흙 속에서 밀어 올린 꽃 보러 가자
흐린 세상에 퍼지는 연꽃 향기 만나러 가자
연꽃 밭으로 가자, 연꽃 보러 가자
어두운 세상 밝혀 올리는 연꽃 되러 가자
연 잎 위를 구르는 이슬 만나러 가자
세상 진심만 쌓고 쌓아 이슬 되러 가자
이슬 되러 가자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자리에 눕고만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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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 세계를 초월하자. 지난 20세기는 이분법이 지배한 시대이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등으로 이분법이 지배한 세기이다. 그리고 인생은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트라이앵글만 잘 지키면 된다고 여긴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디지털 혁명과 함께 낯설고 기이한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 세상이다. 다시 말하면,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기술과 자본이 혁명을 주도하며,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4차산업혁명이 진행중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식의 힘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힘이 고양되려면, 생명력인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에로스의 충동에 로고스의 비전을 부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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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호이나키(lee Hoinacki)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오늘날 권력과 부와 상상력과 지성과 문화생활을 조직하고 독점하려는 기관들은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분리 혹은 고립을 만들어 낸다고 지적했다. 사람을 그 육체, 즉 몸과 장소와 시(詩)로부터 떼어 놓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되돌아 보면,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 육체의 연장(延長)이라 할 수 있는 도구 생활자인 우리는 몸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근대적 지각과 운동 양식에 갇혀 있을수록 직접적 감각 체험으로 부터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 우리 몸이 머무는 일상의 자리, 곧 장소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장소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소외라는 말은 장소와 소통하거나 서로 교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일상을 벗어나곤 한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그 장소가 갖는 이야기와 기억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풍요로움 속에서도 내면이 빈곤한 것은 그 때문이다. 골목이 사라졌다. 누추하지만 각박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얼굴 빛 환하고, 삶이 고달파도 어울릴 줄 알았던 그 세계가 사라졌다.
▪ 세번 째로, 근대적 삶은 우리에게서 시를 빼앗아 갔다. 우리가 정신적 어둠 속을 방황하는 것은 시인들이 언어의 올가미로 낚아챈 영원의 순간에 우리 일상을 비춰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사회의 청춘(靑春)들이 무기력해 졌다. 청춘에는 봄 춘(春)자 들어간다. 봄은 얼어붙은 땅을 뚫고, 온갖 초목들이 막 솟아 오르는 스프링(spring)이다. 변화를 바라는 봄의 생명력을 우리는 '에로스'라고 한다. 이 에로스가 동력(動力)이다. 그런데 이 사회의 청년들은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이 아닐까?
▪ 제도, 즉 규제가 너무 많다. 청춘들을 과도하게 어린이 취급한다.
▪ 서비스와 케어가 또 지나치다. 너무 많은 것을 즐기라고 부추긴다. 돈만 가지고 가면, 어디나 그냥 막 흥청망청 쓰라고 요구한다. 소비를 창피하지 않게 한다.
우리 청춘들은 두 원인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힘들어 한다. 학교에선 스트레스가 엄청 쌓이고 인터넷이나 TV를 보면 상품들이 엄청 유혹한다. 예를 들어, 몇 개월 알바로 돈을 모았다가 한 방에 지르는 변태에서, 돈이 떨어지면 삶을 지루해 하는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이런 상황으로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능동적으로 사는 일이다. 수동적이지 않고, 자율적이여야 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에로스의 충동과 로고스의 비전을 결합하여, 소유와 집착에서 로고스의 네트워크로 건너가야 한다. 여기서 에로스라는 말은 그냥 연애, 성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동력이다. 타자를 향해서 맹렬하게 돌진하는 힘이다. 그 힘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驚異, 놀랍게 신기하게 여김)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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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에로스라는 말은 그냥 연애, 성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동력이다. 타자를 향해서 맹렬하게 돌진하는 힘이다. 그 힘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경이(驚異, 놀랍게 신기하게 여김)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서 당당하게 신체의 능동적 에너지로 사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니 에로스가 억압을 겪고, 신체에 엄청난 소외가 일어난다. 소외는 소통의 반대로 교감이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런 소외는 늘 결핍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결핍은 또 청춘의 상징인 에로스의 에너지가 억압되고 봉쇄된다. 즉 흐르지 못하고 막힌다. 그러니까 에너지가 흐르게 하려면 화폐와 소비가 제공하는 기준들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젊은 청춘들이 예뻐지려고 자기를 꾸미고 타인의 시선에 갇혀 있으면 어린애 취급을 당한다. 그런 현상은 봄이 왔는데 새로운 게 생성이 안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예컨대 화초가 되는 거다. 화초(花草)는 누군가가 계속 길러 줘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에로스적 충동에는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타자를 향해 돌진하는 에로스로 일어나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에로스적인 충동이 막 솟구치면 그냥 세상을 모험하는 거다. 원가 계산하고 목표를 먼저 설정하지 않는 거다. 목표를 정해 놓으면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불안하다. 그러면 모험심이 줄어든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어떤 관계, 활동, 자신의 삶의 비전이 아니라, 그 목표가 화폐의 양과 권력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화폐의 양이나 자신이 누리는 권력이 우리들에게 평정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냥 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타자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도 하고, 더 나아가 우정도 맺고, 우정의 가장 최고 경지인 사제 관계도 만드는 거다. 어제가 그런 자리였다. 문제는 에로스가 '카오스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그래 이 카오스를 향해 달려갈 때 거기에 리듬과 비전을 부여하는 것을 로고스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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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우주는 우아한 코스모스(cosmos, 질서)가 아니라, 좌충우돌, 천방지축의 카오스(chaos, 혼돈, 무질서)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끊임 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방향도, 목적도 없다. 변화 자체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태양계의 중심 별인 태양은 지금도 계속 폭발 중이라고 한다.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으로 현재 50 억 살쯤 된다. 50억 년쯤 뒤에는 완전히 폭발해 은하계로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당연히 태양계에 속한 지구 역시 그럴 것이다. 거기다 23,5도 기울어져 갸우뚱한 상태로 자전과 공전을 하느라 바쁘다. 계절은 끊임없이 돌아오지만 단 하루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한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흐름에 차서(次序)와 리듬을 부여한 것이 역법이다. 차서와 리듬, 새롭게 다가오는 단어이다. 그 역법은 1년, 4계절, 360일, 황도, 24절기, 72 절후 등등이다. 이런 척도가 없다면 어떻게 매일, 매년, 일생이라는 주기가 탄생하겠는가? 시간과 공간의 원리이다.에로스의 충동은 카오스적인 힘이다. 그래 이 카오스를 향해 달려갈 때 거기에 리듬과 비전을 부여하는 것을 로고스이다. 에로스의 충동과 로고스의 네트워크의 결합을 위해서는, '에로스의 충동적인 힘에 차서(次序)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차서'의 다른 말이 목차인데, 좀 엄밀하게 말하면, 차례(次例)와 질서(秩序)가 합쳐진 말이다. 순서 있게 벌여 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서 돌아오는 기회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개념이다.
로고스는 지성, 지혜,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원동력이 로고스이다. 그래 우리 청춘들은 에로스적인 충동으로 로고스적인 비전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 로고스를 키우기 위해서 지성이 필요하다. 지성은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가치를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소유와 집착에서 로고스의 네트워크로 건너가야 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신체 안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데, 이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온갖 것을 실험해 봐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소유하지 않아도 사랑이 흘러 넘치게 해야 한다. 사랑은 두 사람의 에로스가 융합되어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내 삶을 선물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존재를 무한 긍정하게 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인 나 자신이 참으로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때부터 자기 인생을 잘 돌보고 자신이 뭔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또한 해야 된다. 이게 로고스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상대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다. 그리고 그러려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런 로고스의 비전을 친구에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 시켜 나가다 보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비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가도, 우리는 인생, 생로병사 전체를 살아갈 수 있는 아주 든든한 정신적 기둥을 얻게 되는 거다, 그게 로고스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두 죽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질문과 해석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음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질문을 하면, 그것과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지 않고, 우리가 두려움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만약 두려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한 번은 마주해야 한다. 도망가거나 숨거나 덮어서 해결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어떤 비밀도 비밀 자신이 스스로를 폭로하게 되어 있다. "세상은 불공평해도 세월은 공평하다." (주철환 PD) 세상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월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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