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은 말이 어긋나는 경우도 각자 살아온 이력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

338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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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은 우화다. 숫사자와 암소는 뜨거운 사랑에 빠졌고 둘은 한 가정을 이루었다. 숫사자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매일 사냥을 해서 신선한 고기를 대접했다. 암소는 싫었지만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고기를 먹었다. 암소는 날마다 남편을 위해 신선한 건초를 준비해 대접했다. 숫사자는 건초를 먹는 게 고역이었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참을성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서로 헤어지기로 했다. 그때 그들이 서로에게 한 말은 “나는 최선을 다했어”였다.
이때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최선'이 '어리석은 최선'이었다는 사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사랑은 ‘지식’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지식은 특정한 정보를 뜻하지 않는다. 사랑에 내포된 지식은 자기 욕구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그의 고통, 슬픔, 기쁨, 불안, 내밀한 상처를 알아채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말이다.
장자의 <바닷새> 이야기가 소환된다. <<장자>> <지락>편에 나오는 이야기 이다.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에 날아들었다. 노나라 왕은 이 바닷새를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왔다. 술을 권하고, 제례악 음악을 연주해주고, 제사 음식인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부양하는 방법으로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기른 게 아니다.
다음은 공지영 소설의 <<봉순이 언니>>에 나오는 이야기 이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 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는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할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는 다리까지 절게 되었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정말 몰랐어요. 제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애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 지를 아는 것이란다."
2
나이가 들어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버겁다. "최선을 다했어"라고 하지만,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긋나는 말들이 세상을 횡행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어야 하는 언어가 오히려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여 모두가 동일한 현실이나 사태를 떠올리지 않는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을 반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에는 우리 삶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에 언어는 언제나 오해 혹은 오독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소통이 원활할 때 우리는 ‘말이 잘 통한다’며 기꺼워하고, 소통이 막힐 때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며 상대를 탓한다. 문제는 늘 타자에게 있다고 느낀다. 다른 이들의 말을 사정없이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서 세상이 시끄럽다.
예를 들어 본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이해하지 못한 단어들’ 장은 연인인 프란츠와 사비나가 사용하는 말의 어긋남을 몇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프란츠에게 삶의 핵심 가치는 ‘충실’이다. 그는 우리 삶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충실이라고 여긴다. 사비나에게 충실은 일종의 억압이다. 사비나를 들뜨게 하는 단어는 배반이다.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해 미지를 향해 떠나는 모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란츠에게 음악은 해방이다. 고독과 한적함과 책먼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음악으로 위장된 소음에 시달렸던 기억 때문이다. 확성기를 통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노래는 소음에 불과하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살아온 내력이다. 프란츠는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았고, 사비나는 전체주의적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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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선을 다했어’라는 진술은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게으른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 최선(最善)이라는 말이 쉽지 않다. '최선'이란 나의 실존적 존재, 내 환경들에서 나오는 최적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환경에 매몰되어 오만해 지지 않는 일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수많은 세계의 일부라고 여겨야 한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한 경험을 유일한 세계로 주장하기 쉽다. 여기서 오만이 나온다. 그 세계가 매력적이고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해도, 그것은 편견이며 무지일 수밖에 없다. 내 입장을 너머 다른 이의 입장이 되기를 수련해야 한다. 우리가 <햄릿>을 읽는 것도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를 읊조리려는 것이 아니라, 16세가 영국 사람의 시선을 보고 싶은 것이다.
자연은 그 순간에 최선을 소진한다. 자연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을 위한 최선의 전략이란 가장 좋은 하루가 되도록 새로운 판을 짜자는 것이다. 전술이 아니라, 전략이다. 전술은 그 판 안에서 노는 것이라면, 전략은 판까지도 바꾸는 일이다. 전술에서 일등을 추구하지만, 전략에서는 최고를 일류라고 한다. 일등이 고만고만한 데서 이기는 거라면, 일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뚝 서는 거다. 일류는 판을 새로 짤 줄 아는 것이다. 그건 도전과 모험에서 나온다. 그냥 낙오하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하는 것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류는 지식을 생산하고, 일등은 지식을 수입하고 이식할 뿐 생산하지 못한다. 지식 생산이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사회의 문제를 파악해 이를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윤리적 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의 타락은 결국 지식 생산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류는 어떤 방면에서 첫째가는 지위나 부류이고, 일등은 으뜸가는 등급일 뿐이다. 다시 '최선'이라는 말로 돌아온다. 최선을 말하려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를 흥분시키는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만일 나에게 감동이 없다면, 내가 그걸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침체이다.
길 가의 꽃들은, 자연의 순환에 맞춰, 한 순간 피었다가 아랑곳하지 않고 시들어 버렸다. 잘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자연은 그 순간에 최선을 소진한다. 내 동네 탄동천의 물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자신이 가야 할 곳, 바다를 향해 묵묵히 인내하고 흘러간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오늘 하루도 어제와 같은 일상을 꾸준히 실천하며, 하루를 또 다시 최선으로 보내려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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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닻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사고 지평을 제한하는 덫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평소 내 생각은 '확신은 정치인과 선동가의 언어지 지성인의 언어가 아니다. 확신은 쉽게 부패한다'는 거다.
나심 탈레브의 책 <<블랙 스완>>을 소환한다. 그 책에는 칠면조 우화가 나온다. 아침이면 먹이를 받아먹는 칠면조가 있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상이었다. 아침에 모이를 준다는 칠면조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농장에서 1000일을 보낸 칠면조에게 1001일 되던 추수감사절 전날이 찾아왔다. 그날 농장주의 손에는 모이가 없었다. 대신 그는 칠면조의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칠면조의 운명을 결정한 건 평온했던 1000일이 아니라, 1001일이 되던 그 하루였다.
소설가 백영옥의 칼럼을 읽고 적어두었던 것이다. "[폴란드 시인] 심보르스카는 자신의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문인 <시인과 세계>에서 중요한 건 '나는 모르겠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재자, 광신자, 정치가의 특징이 당신이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확신은 정치인과 선동가의 언어지 지성인의 언어가 아니다. 확신은 쉽게 부패한다. 우리가 기존 신념을 깨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끝없이 의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와 시인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음의 일화를 소개했다. "문학 포럼에서 음식이 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습하고 더운 장소를 떠올리는데 시인의 입에서 냉장고라는 답이 바로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상한 음식을 가장 많이 꺼낸 곳이 냉장고라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난다. 시인의 진짜 질문은 다음이었다. 왜 냉장고가 답이겠냐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냉장고 안에선 음식이 썩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이 안전할 거란 확신, 그것이 냉장고가 음식이 상하기 가장 쉬운 장소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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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김기석 목사의 <어긋나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칼럼을 읽고 사유하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정상적’이라는 말은 다름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될 때가 많다.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이들은 일쑤 ‘비정상'으로 낙인찍힌다. 미셸 푸코는 정상성이란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규율하기 위해 권력이 만들어낸 기준이라고 말한다. 정상성이라는 담론 자체가 억압의 도구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어긋남도 사회가 부여한 질서와의 마찰에서 비롯된 언어의 운명일까?
내가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은 말이 어긋나는 경우도 각자 살아온 이력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 이런 경우에 대한 김기석 목사의 제안이 마음에 든다. 일상에서 실천해 볼 생각이다. "어긋남은 어쩔 수 없는 언어의 한계인가? 그렇지 않다. 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한 후에 등을 돌리고 마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게으른 태도이다. 각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배후에 있는 삶의 결, 감정의 무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의 자리에 서 보려는 노력이 야말로 인간다운 태도이다."
정진규 시인은 옹알이하는 아기를 바라보며 옹알이는 ‘의미도 무의미도 다 통한다'고 노래했다. 명료한 언어로 분절되지 않은 옹알이가 다 통할 수 있는 것은 아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사랑의 자발성 때문이다. 말의 어긋남을 관계 단절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는 여백이 필요하다.
옹알이/정진규
아기 천사께서 옹알이를 시작하신 아침 나와 모든 것들의 사이가 한결 좋아졌다 無事通過(무사통과)다 옹알이는 의미도 무의미도 다 통한다 하느님은 그것만 가르쳐 보내셨다 나의 말씀들을 잠시 반납했다
※ 우리 집엔 지금 天使 한 분이 와 계신다. 딸이 아기를 낳았다(20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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