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예능 대신 예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10. 17:30

338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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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가 늘 다니는 산책길에는 오늘 아침 사진처럼 예쁜 노란 꽃이 지천이다. 돼지감자 꽃이다. 돼지감자는 감자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못 생겼다. 그런데 꽃과 잎은 감자와 같이 생기지 않았는데, '뚱딴지'같이 감자 같은 뿌리가 달렸다고 '뚱딴지'라 한다. 그래 우리는 일상에서 생김새나 성품이 완고하고 우둔하며 무뚝뚝한 사람 또는 엉뚱한 사람을 일컬어 ‘뚱딴지 같다’고 비하하는 말로 쓴다. 요즘은 주로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뚱딴지는 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엉터리'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또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다'는 속담과도 의미가 비슷하다. ‘엉터리'는 '사물의 기초'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래서 ‘엉터리 없다’고 하면, '어떤 일의 기초나 근거가 없다', 곧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을 응용하여 허황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엉터리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엉터리없는 사람'을 그냥 ‘엉터리'라고 하는 것도 표준말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 알려진 말이 널리 쓰이게 되니까 할 수 없이 표준으로 삼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TV에 자주 나오는 이들이 엉터리 같다.

말이 나왔으니 좀 더 말해본다. ‘엉터리'와 비슷한 말 가운데 '‘터무니'가 있다. '터무니'는 '터를 잡은 자취'를 뜻하는 말로서, “수십 년 만에 고향에 갔더니 우리 가족이 살던 터무니가 사라졌다"고 쓸 수 있다. 이 말은 또, 정당한 근거나 이유를 나타내는 말로도 널리 쓰여 왔다. “변명을 하더라도 터무니가 있어야  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정당한 근거나 이유가 없을 때, 우리는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다만 ‘엉터리 있다’는 말이 없는 것처럼, '터무니 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엉터리 없다’, ‘터무니 없다'는 말들처럼 ‘없다'가 붙어 쓰이는 말 가운데 ‘어처구니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 또한 ‘어처구니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어처구니'는 ‘상상 밖에 엄청나게 큰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건설 장비 가운데, 큰 바위를 깨뜨리는 커다란 쇠망치를 '어처구니'라 한다. 이 말을 응용하여 '어처구니 없다’고 하면, '하도 기가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른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는 '맷돌의 나무 손잡이'를 '어처구니'라 한다, 둔중한 돌덩어리를 돌리며,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그 기능은 어처구니의 동력전달에서부터 온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론 적으로 역할이 분담되어 메타포를 형성하는 기능은 조화의 시작이다. '어처구니 없는 세상'은 조화가 깨진 세상이다.

말이 나왔으니, ‘뜬금 없이'라는 말도 이야기 해본다. 이 때의 ‘뜬'은 ‘뜨다'의 관형형이고, ‘금'은 '돈'을 말한다. 곧 ‘떠 있는 돈'을 의미한다. 일상에 쓰이는 '뜬금'이란, '제자리에 묶여 있지 않고 제 마음대로 올랐다 내렸다 하는 물건값'을 말한다. 시세에 따라 달라지는 값이니, 굳이 한자 말로 바꾸자면 ‘변동 가(變動價)’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들쑥날쑥하거나 갑작스럽고도 엉뚱한 모양을 ‘뜬금 없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낱말 뜻대로라면 ‘뜬금으로’ 또는 ‘뜬금 처럼'으로 써야 앞뒤가 통하게 된다. 그런데도 ‘뜬금 없이'로 쓰고 있는 것은, 이때의 ‘없다'를 부정으로 쓴 게 아니라 강조하는 말로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용례는 가끔 눈에 뜨인다. ‘안절부절'이란 말은 몹시 불안하고 초조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모양을 표현하는 말인데, 그 동사형은 ‘안절부절 하다'가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다'이다. ‘뜬금 없이'에서처럼, 이때에도 ‘못하다'는 부정이 아니라, 강조의 구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오늘도 어제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몇일 전 우연히 sns에서 만난 서울대 도서관에 붙어 있다는 8개의 문장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 글을 읽었다. 이런 문장들이 학생들을 정글 속으로 집어 넣고 경쟁시키는 거다. 그런 학교 문법이 젊은이들의 사유 능력을 떨어트리고, '극우'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인문 운동가로서, 대체할 수 있는 인문 정신 이야기를 어제 하였고, 못다한 것들을 오늘도 이어간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서울대 도서관에 붙어 있는 다음과 같은  8가지 문장을 명언이라 한다. 이건 낡은 학교 문법이다. 시대가 바뀌면 의식을 바꿔야 한다. 우연히 카톡에서 만난 거다. 
▪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 내가 포기한 그 순간, 누군가는 간절히 버티고 있다
▪ 남들이 나를 믿어 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나를 먼저 믿어야 한다
▪ 게으름은 잠깐의 달콤함 이고, 후회는 평생 간다
▪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나의 10년 후를 만든다
▪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 공부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투자다
▪ 네가 흘린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네가 흘린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 재미 있으면 절대로 힘들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다. 의미 있는 곳에 시간을 투자하라. 예술가나 작가들이 보내는 시간은 더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으로부터 배운 나의 삶의 철학이다. 생명은 근원적으로 '활동'과 '네트워크를 좋아한다. '관계'와 '활동'이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소유와 성공 곧 돈과 물질에 관련된 것만 매달리면 꼭 막히게 되고, 끝에서는 허무할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던 다음 말을 자주  소환한다. "파렴치(破廉恥)함이란 모든 것의 가격만 알고, 가치는 조금도 모르는 것이다." 살맛이 나려면 어떤 활동을 하고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 계속 어딘가로 누군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길 위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 때 그걸 연결해 주는 건 지성밖에 없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거다.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가와 진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치가 생성된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지,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주 짧다.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건 순식간에 다 거덜나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무에서 유가 나와야 가지가 되는 거다. 원래 보이지 않는 지혜에서 물질이 나온다. 예를 들면 디지털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정보가 온갖 더 한다. 이 무형의 자산 없이는 물질만 갖고 돌려 막기를 할 수 없다. 정신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설령 망해도 그 다음에 이 실패에서 원가 배우고 도약할 수 있는 베이스를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면서도 우리는 일상에서 활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접속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과 접속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이만 만들어 낸다.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고 의미가 된다. 반대로 감각만이 늘어나는 게 중독이다. 이를 피하고, 하루가 재미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생활의 규칙을 만들어 보는 거다. 고미숙의 주장이지만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 목적론이 해제되어야 한다. 일상이 리듬을 타야 한다. 리듬을 잃는 이유는 목적에 도달한 다음에 살겠다는 목적론이 문제이다. 매일의  일상은 리듬을 타야 한다. 일상이 그 목적에 종속이 되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의 무상함 앞에서 그냥 주저 앉게 된다. 매일 매일을 하는 과정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자유, 행복을 오늘의 조건 안에서 어떻게든 구현해 내는 거다. 아프면 아픈 대로 아픈 상태에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지유와 행복을 위한 액션을 취하는 거다. 
▪ 그리고 시간에 리듬을 탄다. 이 기술은 노년에 더욱 필요하다. 메 순간을 나 스스로 과정으로써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죽음도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다. 
▪ 그리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산다. 그러는 가운데 인간 자연 그리고 내가 늘 만나는 사물들과 우정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상품 소비 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작고 있는 물건을 7개끗하게 하고 변형시켜 나에게 맞는 물건을 고저 사용하면 신상품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를 프랑스에서 '브리콜라쥐'라 한다. 그러면 물건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이게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는 거다. 
▪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친구를 만난다. 그렇게 진구들을 만나 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는 웃는다. 그리고 웃어야 한다. 왜냐하면 웃음은 생명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활동으로써 웃음과 이야기를 연마하고, 내면에서는 어제 몰랐던 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게 지성이다. 그 지성으로 내적인 충실함과 외적인 활동이 리듬을 타야 한다. 고미숙은 이런 일상을 줄여 서 이렇게 말한다. "명랑하고 지혜로워라!" 

3
고 이어령 교수는 평생을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재미나게 살아 오셨다 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자기 다움'은 실제로 나만의 물음표와 느낌표를 이어주는 여정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물음은 하나의 기쁨을 낳고, 또 하나의 기쁨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이렇게 순환한다. 이 교수에 의하면, 깨달을 때의 환희를 '타우마제인'이라 했다. 그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을 향해 썼고, 자신이 발견한 '타우마제인'이 벅차서 쓴 거라 했다. 여기서 '타우마제인'이란 그리스어로 '경이로움', '놀라움'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대한 관찰과 숙고와 함께, 우리가 인간의 지성을 통해 무엇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매일 아침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를 쓰게 하는 나의 동력이기도 하다. 독자가 같이 읽고 공감해주면 신이 난다. 우리는 '타우마제인'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 매일 글을 쓰며 발산하고, 그 발산한 만큼 수렴을 하고 싶게 만들어, 또 책을 읽고, 주변을 관찰하게 된다. 발산과 수렴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거다. 그래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앵거스 플레처에 의하면, 그리스 극작가들은 경이, 즉 '타우마제인'의 더 큰 가능성을 전달하고 어떤 발명품을 고안했는데, 그게 '플롯 반전(plot twist)'이라는 거다. '플롯 반전'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뒤틀리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을 연결하는 마지막 고리이다. 그 마지막 고리가 너무나 충격적이라 방향이 확 꺾인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결국 이야기의 흐름이 뒤집어져 우리를 뜻밖의 장소로 인도한다. 이때 우리는 '타우마이젠'을 선물 받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플롯 반전'의 밑바닥에 "확장(stretch)"이라는 문학 발명품이 하나 더 있다. '스트레치'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단어의 뜻은 '가지개를 켜며 몸을 뻗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 정신과 감각도 스트레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어쨌든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 곧 ‘깨달음’이다. 깨져야(깨다) 시작할 수 있었고, 알 수 있다(알음). 그 다음 ‘세상을 바꾸는 것’ 이다.

4
예능 대신 예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능은 당장의 시각적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예술은 추상적이지만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전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만화만, TV 드라에만 관심을 두면, 예술을 알 수 없다. 세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 예능과 예술은 다르다. 예술의 핵심은 미학적 정서와 철학적 사유이다. 즉 정서적 미학과 철학적 가치라고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감동과 변화이다. 가짜와 진짜는 여기서 판가름 난다.

예능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예능에만 빠진다는 것이다. 예능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생각하며 즐겨야 즐거움이 온다. 그리고 깊은 생각을 하며 예능을 보면 재미가 없다. 예능을 즐기는 이유는 생각하는 수고를 하기 싫어서 이다. 생각하는 데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능에만 빠진다면, 그는 분명히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수고를 많이 하다 보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예능은 그럴 때 즐겨도 충분하다. 큰 폭과 높은 높이가 없이 '소확행'에만 빠지면 사람이 작아져 버리듯이, 예술 없이 예능에만 빠져도 사람은 쉽게 작아진다.

인간의 몰입은 대단히 희소한 자원이다. 정치인들과 기업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려 한다.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주의 집중을 분산시킨다. 대가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뉴스의 질이 낮다는 것을 그리고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또한 그 때 그 뉴스를 '공짜로' 무언가를 얻는 경우, 우리 자신은 상품이 된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비자가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되, 소비자의 주의를 악용하지 않는 고품질의 정보나 문화이다. 공짜라는 이유로 자신의 주의를 포기하는 대신 낮은 품질의 정보를 얻는 것은 정신나간 짓이다. 문화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그래 자꾸 우리는 예술보다 예능에 더 잘 빠진다.

지금 세상이 거짓말처럼 트로트 열풍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이 열풍은 어딘가 수상하다. 좋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와 생긴 본질적 흐름이 아니라 ‘음악의 예능화'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빨리 휘발될 이 열풍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괴롭다. 가사는 너무 뻔하고 퇴행적이어서, 어떤 건 듣기에도 민망하다. 멜로디엔 미학적 수고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편곡은 열 곡이 한 곡인 듯 기계적 패턴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교태 섞인 꺾기를 가창의 표준으로 삼아, 무대에서 품위를 밀어내 왔다. 그 결과 점잖은 주류 음악에서 밀려나 행사용 음악으로 전락했다. 어느 음악학자는 트로트의 미덕이 솔직함이라 했다. 솔직함은 삶을 대면하는 솔직한 태도여야 하지, 감정을 여과없이 쏟아내는 미학적 방기여선 안될 것이다. 이주엽이라는 작사가의 주장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금의 성인 가요들은 그 책임을 방치한 채, 민망한 직설을 솔직함으로 포장하고 있다. 노래가 격조를 잃으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대중의 것이 된다. 좋은 노래 한 구절이 가슴에 오래 머물 때, 수용자 내면의 태도가 바뀌고 삶이 고양된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5
오늘 공유하는 시를 소개한 곽재구 시인에 의하면, 학교에 가지 않고도 새들은 노래하고, 공부를 하지 않고도 강물은 흐른다는 거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별 보며 시를 읽고, 어려운 이를 도울 마음 지닌다면 꼭 학교에 갈 이유 없다는 거다. 머리 좋고 가문 좋은 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공부가 인간 세상을 힘들게 할 때 참 많기 때문이라 했다.

공부/유안진

풀밭에 떼 지어 핀 꽃다지들
꽃다지는 꽃다지라서 충분하듯이
나도 나라는 까닭만으로 가장 멋지고 싶네

시간이 자라 세월이 되는 동안
산수는 자라 미적분이 되고
학교의 수재는 사회의 둔재로 자라고
돼지 저금통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자랐네

일상은 생활로, 생활도 삶으로 자라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도 오랜 공부가 필요했네

배우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미적분을 몰라도 잘 사는 이들
잘 살아서 뭣에다 쓰게
쓸 데가 없어야 잘 산다는 듯이
꽃다지들 저들끼리 멋지게 피어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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