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즈음 어른의 품격을 고민하고 있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8일)
'품격(品格)'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또는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品位)이다. 품격을 뜻하는 영어 단어 dignity의 라틴어 어원은 dignitas이다. "높은 정치적·사회적 지위 및 그에 따른 도적적 품성의 소유를 가리킨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인인 키케로는 동물과 인간을 구별할 때 이 dignitas라는 말을 적용했다. 즉, 참다운 사람됨 이야말로 품격의 기본이다. '격(格)'이란 한자에서 온 단어다.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모양'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로 ‘바로 잡고 고쳐진 상태’의 뜻을 지닌다.
'격'을 생가하니,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격물치지)"라는 말이 소환된다. '격물치지'는 동양 고전 <대학>의 8조,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속한다. 사물의 본말과 시종을 파악하여 지혜를 이룬다. 중심(중요한 것)과 주변(사소한 것), 시작과 끝을 잘 알고 일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 물건에는 본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 그리고 중요한 것부터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물건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사리를 통하여 그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면, 도(道, 머리를 밝혀가는 중에 만나는 그 길, 지혜)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중심과 부분, 근본과 말단, 일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아는 것이 격물(格物)이고, 이러한 격물을 통하여, 먼저 할 것(先)과 뒤에 할 것(後)을 정확히 아는 것이 '치지(致知)'이다. 이게 그 어려운 '격물치지'란 말이다. 여기에 '격'자가 나온다. 품격.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고민하며, 격물치지를 이루며 일을 할때 '격'이 나온다. 이게 지혜이고, 순 우리말 슬기이다.
다시 오늘의 화두인 '품격'이야기로 돌아온다. '품격'은 '품성'과 '인격'의 준말로 사물이나 사람의 기본적으로 타고난 성품이나 품위를 의미한다. '인격'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말하고, 국격은 국가의 품위를 말한다. 격이란 물질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요즘 품격이란 말이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지켜온 신념과 말 한마디, 표정과 몸짓 하나로 지켜내는 인간의 품격. 굳이 내가 가진 것을 떠벌리지 않아도, 난 이만큼 가진 사람이라고 알아주길 강요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은은하게 빛나는 사람. 비싼 명품 제품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른 탁월함으로, 진정 ‘자기다움’ 넘치는 사람으로 스스로가 명품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품격이다.
진정한 품격은 확고한 자신만의 신념과 말 한마디, 그리고 상황에 맞는 표정과 우아한 몸짓 하나로 자신을 지켜내는 힘이 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을 주고 산 품격을 온몸에 휘감아도 “나는 특별하며, 어디서든 빛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항변을 해도 소용없다. 때와 장소에 걸맞는 옷차림을 하고 상황에 맞는 태도와 행동으로 자신을 빛나게 하는 사람. 타인을 향한 고운 눈빛에 타인을 배려하는 손짓과 몸짓, 더 나아가 상대를 배려하는 듯한 말에서 뿜어져 나오는 품격과 품위의 아우라가 있는 사람에겐 그 어느 누구도 당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품격 있는 삶이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소중한 자신을 케어할 줄 아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충만한 자기 삶을 사는 것, 더 나아가 타인의 삶도 함께 존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자존과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품격이 동반된 진정한 승리이며 비로소 개개인이 품격으로 추구하는 브랜드까지도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어른의 품격을 고민하고 있다. 어른의 품격은 인생 경험과 연륜을 쌓고 그 풍부한 자산을 통해 각성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어른은 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기생하는 존재이다. 어른 자기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가족 부양의 책임도 기꺼이 져야 한다. 어른이란 제 삶의 의미와 무게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이다. 사는 데 필요한 교양과 지식을 쌓고, 어른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 자신의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며, 시민 의식을 갖고 건강한 방식의 삶을 꾸리는 이가 바로 어른이다.
그 반대가 '어른아이'이다. 신체는 다 자랐지만 미성숙한 자아로 아이처럼 행동하는 이들은 내면의 안정감이 떨어지고, 매사에 무책임하다. 이들은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불화하고 자기 고집이 세다. 어른으로 살기 위한 적절한 배움과 수련을 건너뛰고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요즈음 주변을 보면, 어른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더러 리더 노릇을 하면서 음흉한 꾀를 내며 사익 추구에 몰입하는 행태들은 불쾌하고 역겹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병패들, 즉 탐욕과 이기주의, 과잉 히스테리, 갈등과 긴장들의 원인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탓이다. 미숙한 인격체들이 만드는 사악함은 부의 양극화, 약자에 대한 자별, 공정성과 정의의 실종, 동물 학대와 생명 경시, 살인과 폭력으로 드러나고,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를 각자도생의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쩨쩨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남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관심이 없고, 매사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어른 품격이 없다. 어른이란 소란과 허장성세로 갈팡지팡 하거나 말초 감각에 휘둘리고, 욕구와 충동에 따라서는 안 된다. '어른 다움'이란 절제와 포용, 관대함, 높은 자존감과 윤리 의식을 두루 갖춘 인격과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타인을 향한 사리와 분별이 깊고, 앎과 행동이 하나이며, 연륜과 나이에 맞는 교양과 예의로 품격을 드러내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미래 세대에게 삶의 푯대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결국 어른의 품격이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닌 주변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중한 자신을 케어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 타인을 배려하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 이러한 품격은 곧 진정한 ‘자기다움’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체면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말 그대로 하면, 체면(體面)은 '남을 대하는 관계에서, 자기의 입장이나 지위로 보아 지켜야 한다고 생각되는 위신. 체모. 면목. 모양새', 또는 ‘남을 대하는 도리’를 말한다. 이 사전적인 뜻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체면이 깎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등 부정적인 용례가 대부분이다. “체면이 서다”는 말도 겨우 낭패를 면했다는 수세적인 긍정에 불과하다. 체면이 서도록 일부러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체면치레’ 역시 기분 좋게 쓰는 말은 아니다. 실속도 없이 체면만 차리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악습으로 지목돼 왔다. 나의 내면을 성찰하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므로 체면에 매여 행동하는 게 바람직할 리 없다. 주로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속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다. 다만 대개 그렇듯 급격한 변화는 부작용을 낳기 쉽다. 체면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인식이 팽배하고 명분보다 실리를 좇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이름’을 중시하는 삶이 지니는 가치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되고 있다. 요즈음 보이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모습에서 그것들을 본다.
체면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던 시대, 사대부로서 궁형의 치욕을 안고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이 죽음을 피하고 궁형을 택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름’ 때문이었다. 사마천으로서는 죽음 자체보다 더 두려운 것이 명분 없는 죽음이었다. 투항한 장수를 위해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죽는다면, 절의를 위한 죽음으로 인정되기는커녕 그저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없어지듯 아무런 이름도 없이 허망하게 죽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명한 시간을 사마천은 이름을 남기는 일에 바쳤다.
백이 숙제처럼 훌륭한 이들은 비참하게 죽어가고 도척(도둑의 우두머리)같은 천하의 악인은 승승장구 천수를 누리는 부조리를 해결하는 길 역시 이름에 있었다.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음으로써 안연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렇게 잊히고 말 이름들에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겠다는 다짐이 <<사기>>의 완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본인의 이름도 지금까지 남았다. 나의 이름이 어떻게 남을까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삶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체면을 넘어 ‘이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어제는 대서(大暑)보다 더 덥다는 무더운 폭염의 소서(小暑, 작은 더위)였다. 소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와, 염소의 쁠도 녹을 정도로 더운 대서(大暑) 사이에 드는 절기이다. 소서가 지나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여름 장마철로 장마전선이 한반도 중부 지방을 가로질러 장기간 머무르기 때문에 습도도 높고 비가 많이 내린다. 차라리 습도가 없이 뙤약볕이 내리쬐면 좋겠다. 그런 바람으로 반기룡 시인의 것을 공유한다.
7월/반기룡
푸른색 산하를 물들이고
녹음이 폭격기처럼 뚝뚝 떨어진다
길가 개똥 참외 쫑긋 귀 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토란 잎사귀에 있던 물방울
또르르르 몸을 굴리더니
타원형으로 자유 낙하한다
텃밭 이랑마다
속 알 탱탱해지는 연습을 하고
나뭇가지 끝에는
더 이상 뻗을 여백 없이
오동통한 햇살로 푸르름을 노래한다
옥수숫대는 제철을 만난 듯
긴 수염 늘어뜨린 채
방방곡곡 알통을 자랑하고
계절의 절반을 넘어서는 문지방은
말매미 울음소리 들을 채비에 분주하다
우리는 제 멋에 사는 거다. 남들의 눈으로 자신의 멋을 판단할 필요 없다. "어째서 사람들은 저마다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면서도 자신에 관해서는 남들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덜 평가하는 지 의아하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남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자신의 길을 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발자국은 신발이 될 수 없다. 흉내는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이다. 남들이 하라는 일만 하고, 남들이 하는 일 따라 해서는 신발 가는 대로만 흔적을 남기는, 제 스스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발자국 신세이다. 세네카는 "집에서 가장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자신감을 갖는 일이다. 길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헤매는 자들과 바로 그 길에서 헤매고 있는 자들의 수많은 발자국에 오도되지 않고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신발이 된다. 신발이 되면 남들이 따라오는 발자국을 남긴다. 내 신발로 내 발자국을 남기면 그걸로 만족이다. 내 길을 내 신발로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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