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의 <인문 일지>가 길다고 불만이다.

332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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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에 쓰는 나의 <인문 일지>는 김종건 작가의 <<새벽에 읽는 도덕경의 힘>>이라는 제목과 같다. 아침에 가장 먼저 "도(道)"를 깨우고, 그 다음 하루를 "덕(德)"으로 사는 거다. 나의 <인문 일지>는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이다. 새벽에 노자의 <<도덕경>>을 읽는 것은 우리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삶의 지혜를 얻는 데 도움을 준다. <<도덕경>>은 자연의 이치와 무위의 삶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노자에게서 나는 "무위자연"과 '역설의 가르침"을 받는다.
▪ 무위자연(無爲自然): 노자의 행복론은 무위자연이다. 인위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을 받아 들이고 따름이 '도'에 순응하는 것으로 자유와 행복의 길인 것이다. 그 길은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이다. 그러니까 '욕심을 버려 마음을 비우고, 맑고 고요한 상태를 굳세게 지키자'는 거다. 비움은 인간의 도이다. 비움은 집중이다. 생각을 비우면 현재에 더욱더 집중하게 된다. 인생은 '괜찮아'와 '고마워'로 살아간다. 비움은 자유이다. 생각을 비우면 어떤 사람의 말, 표현, 사상에도 걸림 없는 자유로운 삶이 가능해진다. 비움은 평화이다. 생각을 비우면 다툼과 괴로움이 없어져 고요함 즉 평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비움은 자비이다. 나와 너의 생각을 비우니 나와 너가 사라진 전체 즉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니 만물을 아끼고 사랑한다. 걱정하지 말고, 비우자.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 충만하게 일상을 꾸리는 거다. 오선지의 음표가 아름다운 선율이 되는 것은 중간 중간 비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아름다운 대화가 되는 것은 중간중간 경청하는 침묵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가 아름다운 일생이 되는 것은 중간중간 온 길을 살펴보는 멈춤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위(無爲)"는 '힘을 빼자는' 거다. "무위"는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게 두는 것이다.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다. 조용히 자기 흐름을 지키는 방식이다. 무리하지 않고, 억지로, 일부러 일상을 흐르게 하지 않는 거다.
▪ 역설의 가르침: 노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것이 된다. 모든 것은 그 반대편을 향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알라고 한다. 쉽고 어려움도 똑같다. 쉬움은 어려움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쉬운 것이 되고, 어려움도 쉬운 것과의 비교, 즉 관계 속에서 비로소 어려운 것이 된다.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은 것도 이런 식으로 이해애야 한다. 앞과 뒤도 그렇다. 어떤 위치가 본질적으로 앞이거나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뒤이겠는가? 두 위치의 비교 속에서 어떤 위치가 앞이 되기도 하고, 또 뒤가 되기도 한다. 물론 소리도 없이 성(聲)이 있을 수 없고, 높낮이가 없는 그냥 소리(音)는 있을 수 없다. 원문을 보면, 유(有, 있음)와 무(無, 없음), 난(難, 어려움)과 이(易, 쉬움), 장(長, 긺)과 단(短, 짧음), 고(高, 높음)와 하(下, 낮음), 음(音, 일정한 음정을 가지는 노트)과 성(聲, 음정이 무시되는 노이즈), 전(前, 앞)과 후(後, 뒤), 이러한 모든 상대적 가치가 '상생(相生)', '상성(相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생'과 '상성'은 오직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써 고착 시키지 않는 가치의 개방성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말한 첫 구절에서 이미 가치의 고정성은 무너졌던 것이다. 신념, 신앙, 이 따위 말들이 절대중의적 질곡에 빠지면 무서운 인간세의 재앙이 된다는 거다. '상도(常道)'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빙긍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 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 세계를 반대되는 것들이 꼬여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즉 이 세계는 위에서 말한 대립쌍들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우주의 존재 원칙이고 형식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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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의 <인문 일지>가 길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나의 <인문 일지>는 쓸모 없어 보이지만, 나에게는 찬란하다. 마침 내 생각과 같은 책을 만났다.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제나 히츠 지음, 박다솜 옮김)의 문장들이 내가 <인문 일지>를 쓰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나의 <인문 일지>는 지적인 삶을 위한 공부인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권력 다툼과 경솔한 평가에 의해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에게 공부는 부정당한 그의 가치를 회복시켜준다. 지적인 삶은 우리들의 존엄의 원천인 이유다. 나의 경우 대학 강의를 끊고, '진짜' 공부하며 내 일상이 지적인 삶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다음부터는 책의 내용 중 일부를 공유한다. 천천히 읽고 내 일상을 되돌아 본다.
▪ 자유로운 성인으로서 독서하고 탐구하는 일은 곧 자신의 변화를 허락하는 근사한 책임을 지는 일이다. 이때 일어나는 변화가 틀림없이 긍정적인 것이라면 무릇 독서와 사유에는 어떠한 위험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사유의 자유가 지니는 의미도 지금처럼 묵직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로워졌다. 배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최악의 자아를 탈출하여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것, 충분하지 않은 것과 마주쳤을 때 더 나은 것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 어떠한 좋은 것, 무언가보다 더 나은 것에 집중할 때 우리는 우리 개인의 존엄을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가 '교감'이라고 하는 깊은 인간적 연결이 이루어질 기틀을 쌓는다. 정치적 사회적 생활은 인간을 사회적 기대에 의해 한계 지어지는 존재로 폄훼하며 그 잣대는 주로 유용성이다. 그러나 지적인 삶은 유용성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을 열어준다. 지적인 삶에서는 공통된 목표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새로운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지성(知性)이나 영성(靈性)이 바탕이 된 관계가 지속적이 된다. 다음이 내 지론이다.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할 때 그걸 연결해 주는 건 지성밖에 없다. 사업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교환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지성을 통해 누군가와 진해지면 그 공간이 바로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 온다. 그 일상 속에서 소유보다는 사람 즉 존재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서로의 생각이 접속을 한다. 이런 접속을 통해 가지가 생성된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이지, 유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유통기한이 아주 짧다. 돈 놓고 돈 먹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효율적이지만 그건 순식간에 다 거덜나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무에서 유가 나와야 가지가 되는 거다. 원래 보이지 않는 지혜에서 물질이 나온다. 예를 들면 디지털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정보가 온갖 더 한다. 이 무형의 자산 없이는 물질만 갖고 돌려 막기를 할 수 없다. 정신적인 자산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설령 망해도 그 다음에 이 실패에서 원가 배우고 도약할 수 있는 베이스를 갖게 된다. 그런 사람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 인문학적 배움에는 보통의 공동 작업이나 목표에서 우러난 교감에서 한 걸음 나아가 특별하고 희귀한 인간적 교감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렇게 피어난 유대감은 사회 계급과 인종 집단, 남녀노소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뜨린다.
▪ 지적인 삶에는 어떤 소용이 있을까? 지적인 삶은 고통으로부터 도피처가 되어주고, 개인의 존엄을 상기시키며, 통찰과 이해의 원천이자 인간의 열망이 자라나는 정원이다. 지적인 삶은 벽의 움푹 파인 공간과 같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눈앞의 논쟁에서 잠시나마 한 발짝 물러나 시야를 넓히고, 자신이 상속받은 보편 인류의 유산을 기억해낼 수 있다.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배움은 인간의 유일한 미덕은 아니더라도 핵심 미덕인 것이 분명하다. 배움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건 인간이 본질적으로 알려는 사람이거나 사랑 하려는 사람이거나, 혹은 둘 다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삶은 금욕주의의 한 형태이자 자신을 일구는 일이라서, 식물을 기를 때 햇빛과 토양과 씨앗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일부를 뿌리째 뽑아내고 말리는 작업이 반드시 수반된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한낱 사회적 역할로 위축될 때, 성취의 기계 속 톱니바퀴로 전락할 때, 억압당하고 교도소에 갇혔을 때, 이기적 허위가 만연한 사회생활을 해 나갈 때, 비로소 공부하는 삶의 진가가 드러난다. 이러한 삶은 단지 경제와 사회와 정치에 대한 기여로 환원될 수 없는 한 사람의 인간을 들춰내 보여준다. 야심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이기적이라 서가 아니라 피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을 때의 전율, 호의를 받을 때의 즐거움, 누구보다 돋보이는 기쁨. 이런 전율은 우리를 표면에 붙들어두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미덕에 가 닿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 공부가 본질적으로 표면을 넘어서 더 깊이 뻗어 나가는 것, 겉으로 드러난 외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것, 뻔해 보이는 것 이상을 갈망하는 것이라면, 공부는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하는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보아도 좋다. 오늘날 이른바 '지식'이란 단순히 올바른 의견을 흡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면서 버티는 것도 실력이다. 나는 하루 하루 버티는 마음으로 살 때가 많다. 그냥 맹목적이지는 않다. 그래도 그 일상 속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찾으려 애쓰며 버틴다.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는 “우리는 과감히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안 된다/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냥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내가 준비한 '기쁨'이다.
인생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 우려면 기쁨을 일상에서 선택하고 잘 배치하여야 한다. 인생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낙(樂)보다는 "희(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는 기쁨이고, '락'은 즐거움이다. 둘 다 '쾌(快)'의 감정이지만, '락(樂)'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희'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희'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이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쾌'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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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것도 실력이다. 결과는 안 나와도 매일 꾸준히 일어나서 움직인다면 이미 이긴 거다. 흔들려도 멈추지 않으면 도착한다. 하루 더 버텨낸 사람이 결국 길을 만든다. 꾸준함이 중요하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박노해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별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그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꽃도 별도 사람도 세력도
하루아침에 떠오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나빠지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좋아질 뿐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세상도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조금씩
변함없이 변해간다
5
인간은 초월할 수 있다. 초월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원해야 한다. 인간의 수준이 아니라, 신 아니 자연 순리의 힘을 믿으면, 우리 인간은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오늘 내가 깨달은 것은 나 스스로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나를 믿어주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그 다음은 스스로 높은 이상을 품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보다 더 큰 이상을 품어야 한다. 그를 위해 나 혼자는 할 수 없다. 우린 누군가 만나 연대하여 공동체를 이루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혼자 다 하려 하지 말고, 우린 만나야 초월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초월의 욕구가 있다.
초월을 사전은 두 개로 설명한다. 하나는 "어떤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는 것"으로, 또 하나는 철학적인 용어로 "인식과 경험의 범위 밖에 존재함", "가능적 경험의 영역 밖에 있음", "의식 내용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일"로 풀이한다. 최진석 교수에 의하면, 초월은
▪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것,
▪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지는 것,
▪ 더 확장되는 것,
▪ 더 넓어지는 것,
▪ 더 높아지는 것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