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4. 21:45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4일)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그저 자신과 다르다 거나 자신에게 쓸모 없다는 이유로 타인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버릴 방법을 제시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의 단면 만을 보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생명이 없는 일종의 추상적 관념을 치부한다는 거다.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타인을 외면하는 상황과 반대되는 상황에 놓였다고 생각해 보는 거다. 우리가 유명인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감동을 주고 싶은 사람,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특별한' 사람을 우리가 평범한 사람이라 치부했던 추상적 존재와는 완전히 다르게 대할 것이다. 우리는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기술에 있어서 만큼은 전문가이다. 레비나스는 어리석음과 지혜, 약점과 강함을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어쩌면 그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의 다음 구절에서 큰 감명을 받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23)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코린토 제1장 27-28) 크게 지혜로운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어 보인다는 고전적 명제는 '보잘것없는 것'과 '뛰어난 것' 사이의 역전된 가치를 강조한다.

노자가 <<도덕경>> 제52장에서 말한 "수유왈강(守柔曰强)"이란 말이 소환된다. 이 말은 '부드러움(柔)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거다.' 부드러운 물이 강하고, 센 바위를 이기듯이, 부드러운 풀이 강한 바람에 견디듯이, 부드러움은 위대한 강자의 정신이라는 거다. 부드러움은 이 자연계가 운행하는 모습이다(弱者道之用, 약자도지용), 또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린다.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 제43장)"이라 말할 수도 있다.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지극히 견고한 것을 뚫고 들어간다'는 거다. "치빙(馳騁)"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내달리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뚫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보기도 하고, 완벽하게 제어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말을 달리게 하는 것은 말을 제어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부린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지유(至柔)가 지견(至堅)을 제어한다고 읽을 수 있다. 마치 여자가 남자를 제어하고, 물이 불을 제어하는 것과 같다.

"지유치빙지견(至柔馳騁至堅)"은 제36장에 나왔던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견고한 것을 이긴다)과 같은 뜻을 갖는다. 강한 다이아몬드를 뚫고 지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한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둘 다 부서지고 만다. 물과 같은 가장 부드러운 물질이라야 다이아몬드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것으로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는 거다. 중국 한나라의 명장 이광이 어느 날 산속을 가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쏘아 정통으로 맞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바위였다. 그런데 바위라는 것을 알고 다시 쏘니 화살이 계속 튕겨져 나왔다. 마음속에 바위가 없는 상태, 즉 무(無)의 상태에서는 바위를 뚫을 수 있었지만 바위를 채운 상태, 즉 유(有)의 상태에서는 그것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를 뚫을 수 있는 것은 '무'밖에 없다. 왕필은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형체가 없는 것은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에 대해 "기(氣)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없고, 물은 스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기무소불입, 수무소불경(氣無所不入, 水無所不經)"고 주를 달았다.

이런 논리적 모순은 어떤 대상에 차이를 두고 구별하는 행위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가장 보잘것없다고 구분된 사람들은 존재해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로, 그들은 이런 구별 짓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이 처해 있는 영역을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타인의 내면을 완벽하게 번역해주는 도구가 없다면,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채로 있는 것이 우리의 섣부른 판단과 절대적 확신을 멈출 최선의 방법이다. 최소한 우리는 타인에게 숨겨진 무한한 가능성의 아주 작은 단편만 볼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나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나라는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움츠러들게 한다. 그런 타인의 시선을 우리를 소외시키고 좌절하게 한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그를 소외시키는 순간, 그는 아마도 그 모욕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다름을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름다음을 만끽하는 것이다.

오늘은 시 대신, 친구가 카톡으로 보낸 메시지를 공유한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라는 말이 깊은 통찰을 준다. 나만 옳은 건 아니다. 나와 단지 다를 뿐이다.

반전의 사고(反轉의 思考)

마음이 편하면 초가집도 아늑하고,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지혜를 짜내려 애쓰기 보다는 먼저 성실하자. 우리의 지혜가 부족해서 일에 실패하는 일은 적다.
사람에게 늘 부족한 것은 성실이다. 성실하면 지혜가 생기지만 성실치 못하면 있는 지혜도 흐려지고 실패하는 법이다.
관심(關心)을 없애면 다툼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다툼이 없으니 남남이 되고 말았다.
간섭을 없애면 편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외로움이 뒤쫓아 왔다.
바라는 게 없으면 자족할 줄 알았다. 그러나 삶에 활력을 주는 열정도 사라지고 말았다.
불행을 없애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나를 불편하게 하던 것들이 실은 내게 필요한 것들이다.
얼마나 오래 살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보람 있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결국 행복도 선택이고, 불행도 나의 선택이다.

사람들에게 " + " 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
수학자는 '덧셈' 이라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 이라고 하고,
목사는 '십자가' 라고 하고,
교통경찰은 '사거리' 라고 하고,
간호사는 '적십자' 라고 하고,
약사는 '녹십자' 라고 대답합니다.

모두가 다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입니다.
'틀림' 이 아니고 '다름' 의 관점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날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노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것이 된다. 모든 것은 그 반대편을 향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을 알라고 한다. 쉽고 어려움도 똑같다. 쉬움은 어려움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쉬운 것이 되고, 어려움도 쉬운 것과의 비교, 즉 관계 속에서 비로소 어려운 것이 된다.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은 것도 이런 식으로 이해애야 한다. 앞과 뒤도 그렇다. 어떤 위치가 본질적으로 앞이거나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뒤이겠는가? 두 위치의 비교 속에서 어떤 위치가 앞이 되기도 하고, 또 뒤가 되기도 한다. 물론 소리도 없이 성(聲)이 있을 수 없고, 높낮이가 없는 그냥 소리(音)는 있을 수 없다. 원문을 보면, 유(有, 있음)와 무(無, 없음), 난(難, 어려움)과 이(易, 쉬움), 장(長, 긺)과 단(短, 짧음), 고(高, 높음)와 하(下, 낮음), 음(音, 일정한 음정을 가지는 노트)과 성(聲, 음정이 무시되는 노이즈), 전(前, 앞)과 후(後, 뒤), 이러한 모든 상대적 가치가 '상생(相生)', '상성(相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생'과 '상성'은 오직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써 고착 시키지 않는 가치의 개방성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말한 첫 구절에서 이미 가치의 고정성은 무너졌던 것이다. 신념, 신앙, 이 따위 말들이 절대중의적 질곡에 빠지면 무서운 인간세의 재앙이 된다는 거다.

'상도(常道)'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나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들이 서로 다를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빙긍빙글 돌아 고정된 성질로 파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벗고 양쪽을 동시에 생각하는 변증법적 사고 방식, 양쪽으로 대립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양극의 조화', '반대의 일치'를 터득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이 세계를 반대되는 것들이 꼬여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즉 이 세계는 위에서 말한 대립쌍들이 서로 꼬여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우주의 존재 원칙이고 형식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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