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의 크기는 우리 모두의 행복의 크기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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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3일)
오늘 아침 화두는 친절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모든 비난을 해결하고 얽힌 것을 풀어 헤치며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들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절이다." (톨스토이) 친절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나도 늘 해왔다. 왜냐하면 친절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복의 출발이다. 이런 친절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다. 친절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부드러운 말씨를 쓰는 것이다. 친절의 크기는 우리 모두의 행복의 크기이다.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를 읽다가, 러시아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의 소설 <<삶과 운명>>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엄청나고 대단한 그 일과 상관없이, 매일의 삶에는 사람들의 친절이 존재한다. 길가에서 중노동 하는 죄인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눠 주는 노파의 친절, 부상을 입은 적에게 수통을 건네는 병사의 친절, 노인은 측은히 여기는 젊은이의 친절, 자신의 자유를 담보로 수감자의 편지를 그 아내와 어머니에게 전달해 주는 교도관들의 친절이다. 특정한 개인을 향하는 것이 아닌 이런 친절은 이념과 관계없는 소박하고 소소한, 의도가 없는 친절이다. 종교적 또는 사회적 가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친절이다."
영웅심 이라고는 없으며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는 소설 속 인물의 삶은 '선'이라는 대단한 관념이 아닌 사소한 친절에 바탕을 투고 있다. 소설 속 인물의 친절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으며, 언뜻 보기에는 무심하고 충동적이기까지 한 사소한 행위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의 친절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연대라는 개인적 실천에서 비롯된다. 그는 어떤 불변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로스만은 그의 친절을 "매일의 삶에 존재하는 친절"이라고 표현했는데, 흔한 친절 또는 사소한 친절로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친절은 결코 하찮지 않다.
그로스만은 우월감과 열등함을 구분하지 않으려 했다는 거다. 우리의 직업, 국적,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했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그가 주교인지, 러시아 인인지, 상점 주인인지, 노동자인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평등하다. 사람이 먼저다. 그가 누구이건 사람에 관심을 기울이자. 먼저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연민을 갖자.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것도 우리에게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역할과 지위에 상관없이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그로스만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역시 레비나스처럼 타인의 대한 판단을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와 그로스만은 성급한 판단을 삼가고, 타인의 고통과 개개인의 욕구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특히 레비나스는 무의식적인 반응을 삼가고 타인에게 자비심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거다.
- 우선 즉시 판단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각한다.
- 다음으로 우리는 거기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한다.
- 마지막으로 매우 인간적이지만 쉽게 해독할 수 없는 무언 가가 거기에 있음을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은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에서 기인하는 우리의 성급한 판단을 자제 시킨다. 레비나스는 인간 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말하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기보다는 관찰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공감적 상상력', 즉 '사람의 마음과 대상 자체의 현실을 꿰뚫는 시각'에서 시작되는 관대한 시선이라는 거다. "인간 내면의 형태와 구조"(새프츠베리)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해 감탄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우리에게 그런 감수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타자의 삶에 우리 자신을 투영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권위를 포기할 때만 효과를 발휘한다.
레비나스가 우리의 공감적 상상력을 일깨우고 북돋는 데 헌신한 이유는 그런 감수성이 없다면 우리가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 즉 우리 자신도 모르게 평범하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이들을 성급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였다. 우리가 타인의 특성을 평가하는 방식, 즉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훌륭하다 거나 보잘것없다 거나, 흥미롭다 거나 시시하다 거나, 재미있다 거나 지루하다 거나 하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그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고 그의 대이적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보다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성급한 판단을 자제하고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차가운 시선에 온기를 담아볼 것을 제안했다. 그의 말을 공유한다.
"날이 갈수록 이성이 득세하는 이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이 세상은 헐벗은 자들을 입히지 못하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지도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의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상품들이 가득 쌓인 황폐하고 차가운 창고와 같다. 또한 이 세상은 제작된 물건들이 추상적으로 여겨지고, 숫자로 전락해 실체 없는 경제 순환에 휩쓸린 진리가 참된 것으로 여겨지는 공장이나 상업 도시의 격납고처럼 비인격이다." (<<힘든 자유>>)
이 세상을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를 대할 때 비인격적인 수식어로 그 존재를 평가하는 우리의 태도라는 거다. 우리는 한 사람의 바탕이 되는 수많은 면면들을 관찰하기보다 '숫자로 된 진실'을 대강 훑어보고 선입견에 따라 쉽게 판단한다는 거다. 레비나스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타인과의 소통은 기적에 가까운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느리고 더딘 과정이라고 말했다. 제작되는 과정에 있는 사물을 관찰할 때처럼, 타인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은 판단을 유보하는 데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우리들의 삶은 돌연한 사건과 우연한 만남의 연속으로, 우리는 훗날 돌아볼 때 에야 비로소 그 모든 일들이 특별했음을 깨닫는 것을 보면 그렇다.
우리는 대개 타인의 가치를 속단하곤 한다. 이것을 피하려면, "지나치게 보잘것없는 사람도, 지나치게 추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독일 극작가 게오르그 뷔휘너의 말이라 한다. 누군가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해 시간을 할애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타인을 우리 삶의 일부로 여겨야 하는 윤리적 책임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추하고 하찮다고 성급히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그를 단편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벌레 먹은 나뭇잎/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타인을 성급하게 단정 짓는 태도를 버리는 것은 관용을 향한 첫걸음이다. 한때 한국에서 프랑스적인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톨레랑스’라는 개념이 많이 회자되었다. 홍세화의 책에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톨레랑스’는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관용’ 정도가 되겠으나, 동양적인 정서인 ‘너그러움’과는 다른 개념이다. ‘너그러움-관용’이 서로 간의 차이를 덮어두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화합’을 강조하는 태도라면, ‘톨레랑스’는 차이를 더 도드라지게 강조하되 서로를 인정하고 다른 의견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독재정권하에서 고도의 압축성장을 이룩하며 효율성과 획일성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다 보니 ‘다름’이 곧 ‘틀림’으로 간주되던 당시 한국사회에서, 톨레랑스 개념은 사람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깊게 이해하면, 프랑스인들이 신봉하는 가치는 ‘톨레랑스’보다는 다양성, 프랑스 말로 ‘디베르시테(diversite)’가 중요하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이기는 하지만, ‘톨레랑스’는 어디까지나 ‘디베시테’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톨레랑스’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다양한 배경과 사상과 아이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는(디베시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톨레랑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톨레랑스’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특정 사안들, 가령 나치 추종과 인종차별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앵톨레랑스’, 즉 불관용을 견지하는 것이 자연스레 설명된다. 즉 상위의 목표인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에는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다. 글이 길어져 이어지는 사유는 내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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