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정칠월(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는 말)이 온 것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7. 3. 10:31

332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1일)

1
요즈음 거리를 나서면, 백합 꽃들이 많다. 흰 백합은 유럽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시아로부터 들여온 꽃이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백합은 헤라 여신의 젖이다. 헤라의 젖이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가 되었고 땅에 떨어지면서 백합이 됐단다. 백합은 바로 신의 거룩한 씨앗을 의미한다. 그리고 백합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과 처녀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꽃이다.

2
오늘은 한 해의 반환점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런 가운데 우린 하루에 몇 번씩 갈림길에 놓인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고, 그 순간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믿어야 한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하나이다. 미래는 오늘 내 선택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그래 7월이 왔어도, 난 어제처럼 살리라.  

'미끈유월(농사 일로 바빠 한 달이 미끄러지듯이 쉽게 지나간다는 말)'이 가고, '어정칠월(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는 말)'이 온 것이다. 회두리에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나 농부다. 이제 땅의 소출이 경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잊으면 헛사는 것이다. '떵떵' 거리며 산다는 말도 기실 '땅'에서 왔다. 그런데 수십 만 평의 땅보다 한 뼘 남짓의 그 마음 농사가 더 중요하다. 


7월/목필균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 
돌아선 반환점에 
무리 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 
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 
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 
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3
어제 하지 못한 이야기를 우선 하나 한다. 윤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잡은 자에 명확한 메시지를 주었다. 진실한 비판을 외면하고, 듣기 좋은 말과 아부에 절고, 오만불손(傲慢不遜 )에 빠져들면 파멸이 이른다는 진실 말이다. 망상과 무지와 무식의 모습으로 방자하고 찰난 체하며 건방진 교만이 자신 뿐만 아니 타인도 망가트린다. 지금이라도 참회하고 특검의 조사를 잘 받고, 처 쪽 일가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이름으로 존재한다. 누구나 이름으로 기억되고 끝내 이름 하나를 남긴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노력한다.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수도승들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자신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스스로 지우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이름에 붙어 있는 '만(慢)'을 없애야 비로소 이름을 버릴 수 있다.

이 '만"가 들어가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이 4 개이다. 자만과 교만 그리고 거만과 오만, 이렇게 4 형제이다. 
▪ 자만(自慢)은 자기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고 익숙해지면서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자만은 겸손함을 잃고 자신만만함이 도를 넘어서는 순간 찾아온다.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과신한 나머지 중심을 잃은 상태이다. 주로 자만은 허영심에 나오는 과시욕망에 사로잡혀 생기는 불청객이다. 자만은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없애야 사라진다.
▪ 교만(驕慢)은 자만이 갖고 있는 자만심에 더하여 교태스러움까지 겸비해서 시건방짐의 진수를 보여준다. 자만이 더 극에 달하면 교만해 진다. 교만은 자신의 지위 높음을 자랑하여 뽐내고 건방지게 행동하는 뜻을 담고 있다. 자만은 자신감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겸손함을 잃은 상태이지만, 교만은 타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못 봐줄 정도로 뽐내면서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교태(驕態, 아양)는 외양이나 태도가 아양(귀염을 받으려고 알랑거리는 말)을 부리는 것이다.
▪ 거만(倨慢)은 교만의 형이다. 거만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 거들먹거린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다. 교만이 자만심에 교태 스러움을 겸비한 자세와 태도를 지칭한다면 거만은 교태 스럽지는 않지만 행동거지 표정이 상대의 기분을 건드릴 정도로 업신여기고 지나치게 거들먹거리는 경우를 지칭한다.
▪ 오만(傲慢)은 자만과 교만 그리고 거만을 넘으면 그렇게 된다. 오만은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져 겸손함을 잃고 불쾌감을 줄 정도로 시건방지게 행동하는 불치병에 가깝다. 오만은 불손(不遜, 말이나 행동 따위가 버릇없거나 겸손하지 못함)과 교만은 방자(放恣, 어려워하거나 삼가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짐)와 어울린다. 그래서 우리는 '오만불손'하고 '교만 방자'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 4 형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지위 높음에 자만하여 교만하기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행동거지의 거만함은 어른도 몰라보는 오만의 극치이다." "자신감이 자만으로 흐르기 전에 자기의 존재 이유를 파악하고 자존심에 상처받기 보다 자존감을 회복하여 자기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자기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참고로 자신감(自尊心, pride)과 자존감(自尊感, dignity)은 다르다.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고,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 하는 마음이다.

성철 스님은 "실제로 재물병과 여자병은 결심만 단단히 하면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을 날리면 이름병에 걸리고) 이름병에 걸리면 남들이 다 칭찬해주니, 그럴수록 이름병은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 책을 좀 보아서 말주변이 늘고 또 참선이라도 좀 해서 법문이라도 하게 되면 그만 거기에 빠져버리는데, 이것도 일종의 명예 병이다”라 했다. 이름은 태어나 줄곧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크고 작은 이름을 얻으면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 죽어서도 이름은 남는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름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셈이다. 이름은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남이 불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 내 이름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이름 감옥’을 벗어나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나는 ‘아무개'라고 제법 목에 힘을 주던 사람도/ 가을 잎 지듯 그렇게 죽고 나면/ 그 이름만이 뒤에 남아 홀로 떠 돌 것이다.”(숫타니파타)

4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7월에 할 일들이다. 생경한 시선으로 일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일상을 '낯설게 하기' 이다. 우리는 늘 반복되는 일상을 뒤로한 여행지에서 내면에 잠들었던 감각이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낯선 풍경과 언어, 사람들과 그 지역 고유의 빛을 마주하며 평소라면 스쳐 지나쳤을 장면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감흥에 젖는다. 일과 몇 분을 할애하여 눈앞의 세상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다.

우리를 설레게 할 가슴 벅찬 그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위해, 우리는 사유(思惟)를 해야 한다. 여기서 '사유'는 머리에 드는 생각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을 하면 늘 '설렘'이 있다. 반면 그릇된 강한 신념을 가진 존재는 폭력일 때가 있다. 폭력은 싫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기획하는 일은 감동적이다. 그래서 오늘도 꿈을 같이 꿔 본다. 그 꿈은 자신으로부터 낯설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한 사회 속에서만 살았던 사람은 자기를 비추어 볼 거울이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그동안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우칠 기회가 없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사는 사회는 일상이 영위되는 공간, 존재가 귀속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성숙한 사람들은 그래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을 낯설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민 낯을 그대로 비춰주고,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낯설게 보여주는, 그런 '불편한 거울'이 있으면 나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창의적 사고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창의적 사고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단계부터 다르다. 창의적 사고는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낯설게 하기"(시클롭스키)라 한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예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재미<창의=낯설게 하기<예술=art+alcool-은 반복되는 일상을 뒤흔든다.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매일 반복되면서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5
내가 좋아하는 나로 사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평범했던 일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상력'을 키우는 일이다. 대한민국은 SNS 공화국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제기되는 선정적인 의혹만이 사실이다. 그 의혹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외로움을 달래 주고 부러움을 경감해주면 굳건하게 진리가 된다. 이게 IT 공화국의 역설이다. 그 사실의 진위와는 상관 없이,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정의이고 진실이다. 그런 일에 휘말린 당사자는 자신이 그런 의혹에 비춰진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번거롭게'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좀처럼, 자신이 경험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들이 제기한 소문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판단보다는, 대중이 떠드는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우리는  좀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숙고하지도 않고, 숙고를 통해 자신만의 의견을 도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정신적인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 다른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 관한 소문을 말하지만, 베드로는 자신만의 확신을 말한다. 베드로만 예수라는 육체에 숨겨져 있는 신성을 발견했다.

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었다. 산전수전은 동물과 같은 인간을 비로소 신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스승이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항상 오해와 질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순간 같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타인들에게 아름다움이 되게 하면서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오해의 대상이다. 이때 남들보다 앞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타인은 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앞선 자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외롭다. 세상은 오해 받는 사람들이 진보 시킨다. 오해 받는 인간이 자신의 원대한 꿈과 열정을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면, 그것이 수용되던지 혹은 수용되지 않던지 상관 없다. 그것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이 없다면, 그 진실은 통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곤경에 빠지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그때 누군가 호의로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 나도 누군가 도움을 원하면 호의로 도와 줄 테다. 감정적일 때,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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