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과 고통은 다르다.

331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26일)
1
어떻게 하면 삶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까?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괴로움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더 많은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는 첫 걸음이다"고 했다. 즉 바라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데 이 사실만 기억해도 삶의 괴로움이 줄어든다.
괴로움과 고통은 다르다. 고통이란 '고(苦)'와 '통(痛)'을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고'란 마음으로 겪는 괴로움이며, '통'은 육신으로 겪는 괴로움이다. 우리는 어느 괴로움이 더 큰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은 다르다. '고통'은 어떤 경험이고, 괴로움은 어떤 경험들, 특히 고통에 의해 촉발되는 정신적 반작용이다. 예컨대 괴로움은 고통보다는 즐거운 느낌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괴로움의 본질은 실체의 거부이다. 다시 말하면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이다, 예컨대, 고통을 경험 할 때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쾌락을 경험할 때는 그 쾌락이 강해지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게 되진 않는다는 데서 괴로움이 시작된다. 유발 하라리는 "고통과 괴로움을 구별하라"고도 말했다.
괴로움을 승화시키려면,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고, 실체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괴로워 하지 않으려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거다. 계속해서 고통에서 달아나고, 더 많은 쾌락을 쫓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 인생은 균형잡기(밸런싱)라고 나는 믿는다. 고통과 쾌락에 대해 불필요한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고 둘 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하고, 제법무아(諸法無我), 나는 없고, 그러니 모든 것이 괴로움이다(一切皆苦, 일체개고).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지속적인 본질이란 없으며,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도 없다. 이 세 가지 기본 현실을 말했던 사람이 부처이다. 다시 말하면,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본질을 지닌 것,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킬 것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괴로움은 우리가 이 사실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상태(涅槃寂靜열반적덩),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다. 착각하지 말자. 행복은 즐거움이 아니다.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그 길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거다.
2
"고통은 개인의 온전함을 위협하는 사건들에 의해 괴로움을 경험하는 상태로 정의될 수 있다. 고통은 사회적 역할, 집단 정체성, 자기 자신과의 관계, 신체적 측면, 가족과의 관계, 또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관계와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다(Cassell, 1982)." 이 정의를 보면, 흥미롭게도 신체적 통증 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괴로움들을 아울러 고통으로 정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통증과 관련해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사실이라면 의학적, 객관적으로 심각한 부상 정도와 개인이 느끼는 통증의 강도, 통증으로 인해 느끼는 불행 사이에 생각보다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같은 부상을 입어도 어떤 사람은 아직 버틸만 하다고 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삶의 희망을 잃을 정도로 큰 영향을 받는다. 헨리 비처라는 의사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군인들과 각종 사고로 인해 비슷한 수준의 부상을 입은 민간인들을 비교했다. 그 결과 평균적으로 군인들의 부상이 더 심각했음에도 군인들은 민간인들에 비해 사고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덜 받은 듯 보였다고 한다. 그 이유로 군인들은 통증은 심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나왔고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큰 안도감과 행복을 느꼈다는 점을 지목했다. 반면 민간인들은 평온한 일상을 누리다가 갑자기 부상으로 인해 삶이 망가졌다고 느꼈다고 한다. 부상 전후 비교의 기준이 거대한 죽음의 소용돌이였던 사람들은 부상을 입은 고통보다 죽다가 '살아 났다'는 기쁨이 더 컸고 반대로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사람들은 부상을 갑작스럽게 닥쳐온 거대한 불운으로 바라보고 슬픔에 잠겼다는 것이다. 이런 관찰을 통해 비처는 "환자들이 종합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의 정도는 신체적 통증이 그들에게 있어 어떤 주관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따라 결정 된다"고 결론지었다.
3
다 사람의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천양희 시인의 시 중에도 <사람의 일>이라는 시가 있다. 공유한다.
사람의 일/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4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 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는가'라 했다. 고통이 유일한 실체이며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피하거나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No pain, no gain(고통없이는 성취도 없다)는 말에 조심해야 한다. 성취에 취해 고통을 당연시 하기보다는 고통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럼 고통의 문제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제안해 본다.
▪ 고통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은 누군가의 계획이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인간은 '이유 없는 우주'(션 캐롤 캘리포니아공과대학 물리학 교수) 속에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사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통은 그저 실패의 증상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이는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던 것처럼, 의미 없는 고통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그래, 시련은 그것의 의미-희생의 의미 같은-를 알게 되는 순간에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빅터 프랭클이 말한 바 있다. 나치 치하 홀로 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절대적인 절망 속에서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자신은 수용소 안에서도 이따금씩 하늘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었고 따라서 살아남았다고 이야기했다. 반면 무엇보다 마음이 텅 비어 있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어 나갔다고 언급했다. 고통은 어떤 형태로든 아무 때에나 우리 삶을 덮쳐오지만 마음에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의 마음만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거대한 고통 앞에서도 담담하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사람은 마음이 죽을 때 진짜로 죽는다는 점이다.
의미란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중요성), 쓸모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유용성),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체성과 연관된 것이라고 최인철 교수는 <<굿 라이프>>에서 말한 바 있다. 고통의 의미는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해석하는 것이다. 고통 역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의미가 덧입혀질 수 있다. 과거의 고통이 지금 생각하니 축복이었다고 감사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겐 지금 순간을 경험하는 자기와 훗날 그 경험을 기억하며 재해석하고 기억하는 자기가 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기 힘들 땐 훗날 이 고통을 어떻게 기억할지, 혹은 기억하고 싶은 지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경험들을 떠올려 보면 몸이 힘든 것 보다도 마음이 지옥일 때였다.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 내밀어진 손을 잡지 못하고 내가 나의 존엄성을 의심하고 내 삶이 가치 없다고 느낄 때면 살아있는 것이 너무 큰 짐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다른 이유보다 스스로가 자신을 하찮고 쓸모 없고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길 때 그 괴로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죽음이라는 탈출구를 선택한다는 견해들이 있다. 우리는 다 연약하고 휩쓸리기 쉬운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서 아주 작은 일에도 위태롭게 흔들릴 수 있는 미약한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고통이라는 표현이 꽤 정확하다고 느껴진다. 언제라도 마음이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가여운 존재들이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 고통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거나 극복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긍정심리학(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미래를 낙관하는 것)으로 모든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 한계가 있다. 예컨대, 프랭클에 따르면, 나치 수용소에서 1944년 크리스마스부터 이듬해 새해까지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던 사람들이 기대가 깨지자 삶의 의지가 꺾인 탓이다. 고통은 그저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다. 인생의 고통은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것이다. 고통은 의미를 모를 때 만큼이나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다. 프랭클은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미가 뭐냐고 던지는 질문이, 실은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며, 우리는 삶에 '책임을 짊으로써'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통은 삶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고, 나는 삶을 책임감 있게 살아 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할 뿐이다. 그렇게 고통을 지나다 보면 고통이 가라앉을 때가 오고,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뿐이다. 기대를 버릴 때 행복해진다. '기대'를 거꾸로 말하면 '대기'이다. 실망을 대기하는 것이 기대이다. 기대가 많을수록 실망이 커지고, 실망이 커질 때 사랑의 감정도 줄어든다.
▪ 고통을 사랑한다.
<<스포츠를 위한 강인한 정신 훈련>>인 책을 낸 짐 로허의 말이다. 이 말을 소개한 팀 페리스는 이런 말도 소개했다. 고통을 사랑하면, 어지간한 고통에 우리는 의연(毅然)할 수 있다. '의연'이란 '의지가 굳세어 당당함'을 말한다. 고통 앞에 당당하고, 초조해 하지 많으면, 다른 기회를 엿볼 수 있다. 의연함은 장자가 말하는 "양생주(養生主)"이기도 하다. 즉 중도를 따를 기회를 찾는다. 장자는 "착하다는 일 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 하더라도 벌받을 정도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착하다고 하는 일을 하더라도 이름을 염두에 두고 하지 말고, 세상에서 나쁘다고 하는 일-자신에게는 전혀 나쁜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을 하다가 벌받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말라는 말이다. 장자에게 근본적인 것은 착한 일을 한다, 나쁜 일을 피한다, 하는 등 의식적 가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표피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이 아니라, 이길 수 없는 적을 다루는 유일한 방법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게 이길 수 없는 적을 다루는 삶의 지혜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 인생의 실세는 아무 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이다.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담긴 이야기를 어떻게 경청할 것인지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 이 말이 멋지다. 내가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수준이 곧 나의 현재 모습이다.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을 사랑하라는 말이 자신에게 가하는 채찍질이 아니다. 모든 성장에는 불편이 따른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메시지일 뿐이다. 그러니 고통을 이길 수 없다면, 고통을 사랑하는 편이 낫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에서 출발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들어 보자. "고통은 필연적이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당신은 달리면서 '너무 아파. 더 이상 못 달리겠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아픈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더 견딜지는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다."
5
그러니까 고통과 괴로움은, 오늘 사진처럼, 오히려 일상의 기쁨의 한 부분일 수 있다. 금붕어는 자연 상태에서는 일평생 약 1만여 개의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항 속의 금붕어는 아무런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이며, 항상 적당한 온도와 먹이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알을 낳을 것 같지만, 어항 속의 금붕어는 고작 3천여 개의 알 밖에 낳지 못한다고 한다. 고통과 시련이 없기 때문에 어항 속의 금붕어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채워지고 만족스럽기 때문에 굳이 종족을 번성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열대어는 어항 속에서 자기들끼리 두면 비실비실 죽어 버리지만, 천적과 같이 두면 힘차게 잘 살아 간다. 호두와 밤은 서로 부딪쳐야 풍성한 열매를 맺고, 보리는 겨울을 지나지 않으면 잎만 무성할 뿐 알곡이 들어차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야 바다에 영양분이 풍부하고,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져야 대기가 깨끗해 진다. 평탄하고 기름진 땅보다 절벽이나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꽃이 더 향기롭고, 늘 따뜻한 곳에서 자란 나무보다 모진 추위를 견딘 나무가 더 푸르다.
우리는 종종 ‘고통과 시련이 내게는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고통과 시련이 없어질 때, 내 삶의 의미도 없어질 수 있다. 그러한 자극을 통해 우리들은 한걸음 더 앞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분명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통은 기쁨의 앞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고통은 곧 희망이다. 현재의 고통은 미래의 행복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진부하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