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중용은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26. 17:08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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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6월 26일)

지진이니 전쟁이니 화제이니 아침 뉴스가 제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더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또는 다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기어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녹록치 않다. 이때 필요한 것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말했던 '황금의 중용'이다. 여기서 중용은 모든 극단을 경계하고, 균형과 절도의 정신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강조한다.

당시 중용은 하찮은 성과나 답보 상태를 합리화 하는 구실이 아니었다. 평범함이 정말로 '황금'같이 여겨졌다. 특히 황금의 중용은 무척 신중한 자들이 성공과 자기애(또는 자기 도취)로 인해 삶의 균형이 깨지려 할 때 극단을 멀리하기 위해 선택한 미덕이었다. 그들은 우주의 원리는 균형(均衡)이라고 보았다. 올라간 것은 내려오고, 내려간 것은 퉁겨져 올라오기 마련이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아레떼(德)'는 인간이 추구해야만 할 것이다. 그건 극단을 피하고 그 중심을 잡는 일이라고 했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의 중간 어디이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가운데이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Eloge des vertus miniscules)>>에서 저자 마리나 반 주일렌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스피노자까지의 많은 철학자들과 조지 엘리엇부터 에마뉘엘 보브까지 많은 작가들은 평범함을 '그만하면 괜찮다'는 미덕으로 바꾸면서 평범함에 덧씌워진 오면 벗겨 주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이 평범함이 중용이라는 거다. 황금의 중용은 언제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과 사, 평범함과 화려함을 분간하려는 이의 눈 앞에서만 반짝거리며 빛을 낸다.

중용의 존재를 배운 적도 없고, 중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 왜 유혹에 빠지냐 하면, 자신의 보 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속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와 우 같은 명칭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나부터 한 진영에서 나올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해서, 그것은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다. 단지 51% 대 49%일 수도 있다. 또는 B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수 있다.

중용을 잘못 이해하면 A와 B의 가운데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중용이 아니라 중간이다. 중간과 중용은 다르다. 중용은 살아있는 영역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회색주의나 중간주의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평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또 상황을 읽어내고,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유연성의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중용은 중간이 아닌 역동적인 평형'이다. "중(中)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 있지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것의 이름이다."(주자) 여기서 용(庸)은 '평상시, '언제나'란 뜻이다.  중용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 '관계의 중용', '행동의 중용', '판단의 중용' 등 인간은 중용을 통해 완벽한 삶을 구현할 수 있다.

중용은 세 가지 원칙이 있다.
▪ '평형성'이다. 완벽한 자기 평형을 갖는다는 뜻이다. 흔히 '황금비율(Golden mean)'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서양 사람들이 중용을 'Golden mean'이라고 번역을 하였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솔루션을 찾는 것, 그 것이 중용이라는 것이다.
▪  '역동성'이다. 중용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늘 생생하게, 다이내믹하게 살아 있는 것이 중용이다.
▪  '지속성'이다. 즉 평형이 있고, 그 평형은 살아있어야 하면, 살아있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 지속성의 중용이다. 인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 원칙은 굉장히 중요하고 기억할 만한 원칙이다.

다음은 중용적 삶을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물음이다.
▪  나는 지금 가장 합당한 나의 중심을 잡고 있는가?
▪  그 중심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는가?
▪ 나는 그런 균형 잡힌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용>>은 누가 썼을까?, 공자의 손자로 알려진 '자사자(子思子)'란 사람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공자의 <<논어>>, 맹자의 <<맹자>>, 자사자의 <<중용>>, 증자의 <<대학>>을 합쳐 '사서(四書)'라고 하고, 공자, 증자, 자사자, 맹자, 거기에 공자의 수제자로 일찍 세상을 뜬 안회까지 더불어서 '오성(五聖)'이라고 일컫는다. 중용은 책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주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방식이다. "중용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 인간이 우주가 부여한 자율 조절 장치를 통해 자신의 삶에 중심을 잡고 균형을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매 순간 벌어지는 일상사에 자신의 감정을 조화롭게 표출하는 '중화(中和)의 중용', 그 때 그 때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며 사는 '시중(時中)의 중용',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영혼에 충실한 '신독(愼獨)의 중용' 등등 인간의 삶에 벌어지는 많은 상황 속에서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 답은 쉽지 않다.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용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꿰뚫는 원리이다.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은 자기중심과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중용의 인생은 우주적 존재방식을 그대로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황금의 중용'을 추구한다는 것이 현상 유자에 만족한다는 뜻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려 다가 너무 멀리 왔다. 마을 활동가의 일을 잠시 멈추었지만,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을 비우려고 애쓰다가, 좋은 시를 한 편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 사진은 오전 산책길에서 찍은 주변에 흔한 흰색 제라늄이다. 관심을 작고 구부리고 가까이서 찍으니 너무 예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류시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뭇잎의 집합이 나뭇잎들이 아니라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
꽃의 집합이 꽃들이 아니라
봄이라는 걸 아는 사람
물방울의 집합이 파도이고
파도의 집합이 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길의 집합이 길들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걸 발견한 사람
절망의 집합이 절망들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슬픔의 집합이 슬픔들이 아니라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벽의 집합이 벽들이 아니라
감옥임을 깨달은 사람
하지만 문은 벽에 산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
날개의 집합이 날개들이 아니라
비상임을 믿는 사람
그리움의 집합이 사랑임을 아는 사람

다시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함의 찬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야망과 절제가 양극단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세포적이라는 거다. 두 개념은 연속선상에 있지만, 양극단을 바라보다 보면 중간 지대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거다. 그러면서 우리는 중용을 기피하게 된다는 거다.

평범함을 뜻하는 프랑스어 'mediocrité(메디오크리테)'는 'medius(중간)'와 'ocris(산)'이라는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는 글자 그대로 가파른 산 중턱 외딴 구석에 갇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상적으로는 진부함을 말하기도 한다. ‘진부함’이란 산의 정상에 오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친 나머지 산 중턱에서 머뭇거리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시대에는 중용이 설 자리가 거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을 막아주는 신중한 거리 두기로 여겼던 중용을 우리는 과단성의 결여나 비겁한 무관심으로 바라본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것이 나약함과 용기 부족의 동의어로 여긴다. 우리 대부분은 무대 뒤편에 있기를, 조연 맡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함을 재 발견하려면, 우리는 위 주변을 돌아보고, 소소한 일상을 관찰하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고, 그들이 어떤 사건에 어떻게 대하는지, 왜 책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경험에 열중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의 경우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이며, 나를 흥분 시키는 것이 무엇인가?' '나의 게으름을 쫓아내 버리고 나의 열정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등 같은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 사람들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현재를 음미할 줄 안다. 다음이 나의 행복론이다.

"아 지금 참 좋다!" 이 잦은 멈춤과 음미의 총합이 그날 하루 능동적으로 찾아낸 행복의 양이다. 그렇게 매일 하루치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국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를 음미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그 분야에서 탁월함이 있어야 한다. 그냥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어떤 성취가 중요하지는 않다. 성취 지향적일수록 행복지수는 낮다. 행복을 큰 성취에서 찾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이 크고 높게 설정되어 있으면, 평범한 일상은 초라함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그 무엇에 매진할 때 행복하다.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잠재성을 일깨워, 그 잠재성과 어울려 춤을 출 때, 행복하다. 진정한 행복이란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영적인 자신을 만족시킬 때, 일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욕구를 알고, 그것을 매일 갈고 닦는 수련을 지속하여 탁월함에 이르면, 자연히 남들이 모두 최고선이라고 추구하는 부나 명예보다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삶의 고유한 임무에 몰입하게 된다. 그럴 때만이. 잠자고 있던 잠재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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