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회복 탄력성'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24. 17:46

331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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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회복 탄력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능력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은인자중(隱忍自重, 마음 속에 감추고 참고 견디면서 몸 가짐을  신중하게 행동함)하는 이들은 비 존재 취급을 받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장에선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극적이고 서슬 퍼런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다. 최소한의 품격이나 역사 의식조차 못 갖춘 이들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일이 다반사다. 품성이 모질지 못해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이들은 대중의 시선을 받지 못한다. 흉기가 된 말들이 세상을 떠돈다. 무심히 지나던 이들도 그 말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한다. 우리 가슴엔 그런 말들에 베인 자국이 무수히 많다. 상처의 기억이 누적될수록 마음의 여백과 정신의 회복탄력성은 점점 줄어든다. 조그마한 차이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견고한 힘보다 회복력(resilience)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태풍이 불면, 튼튼한 떡갈나무는 박살이 나지만, 나긋나긋 하고 회복력이 있는 갈대는 낮게 몸을 숙였다가 폭풍이 지나가면 다시 벌떡 일어난다. 떡갈나무는 실패에 저항하려 하다 오히려 확실히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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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대기업들은 '리스크보다는 안전'을, '풀 전략보다는 푸시 전략'을, '창발보다는 권위'를, '불복종보다는 순종'을, '나침반보다는 지도'를, '시스템보다는 대상'을 중시했지만, 인터넷 시대에 성장한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 투자 비용이 워낙 적어서 실패에서 배우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례가 유튜브(Youtube)이다. 우리도 흔히 견고함을 중시하도록 배워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주변 환경은 우리에게 회복력을 요구한다. 복잡한 현실에서 흔히 우리는 이기려 들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냥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그저 일들은 벌어지고, 우리는 그에 대한 반응을 선택할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회복력이다. 회복력이란 다음에 무엇이 올지 내가 예견할 수 없음을 예견하고 상황인식을 높이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받아 들이기'는 또 다른 종류의 ‘용기'이다. 승리나 권력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번창할 방법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짜야 할 사람에게는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때 회복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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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프레이(미래학자)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으로 다음과 같이 7가지를 지적한바 있다. 회복 탄력성, 창의성, 소통력, 비판적 사고, 협업 능력, 복합적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유연성이 요구되는 능력이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이 회복 탄력성이다. 거절 당하거나 좌절 당할 일이 있어도 자존심 상해 하지 않고, 다시 원점으로 회복하고 돌아봐 스스로를 성장 시킬 계기로 삼는 능력이 회복 탄력성이다. 그는 "내가 지나온 길 밑에 답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귀하게 여기라"고 한다. 지금 걷고 있는 길 밑에 보석이 있다, 그 발 밑을 파면 꿈의 폐활량을 넓힐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여기의 순간을 살라는 말 같다. 나는 순간이 영원이다. 왜냐하면 영원은 순간의 영원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내가 좋아하는 문정희 시인의 <순간>이다. 

순간/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 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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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체성은 몸(신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이다. 이 세 가지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이론적으로만 존재한다. '완벽한 나'는 완벽한 직선이나 원처럼,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이데아  세계의 추상(抽象)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를 뽑아낸 것이 추상이기 때문이다. 완벽이란 완벽에 대한 추구이지 완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이라고 말하면, 대개 '거의 완벽에 근접한' 것들이다. 완벽한 자신을 상상한다면, 그냥 현재의 자신보다 개선(改善)된 자신일 뿐이다.

이데아(idea)와 인간이 사는 현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공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데아는 현실의 개선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어떻게? 연습(演習)을 통해서 이다. 연습이란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우주의 원칙을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훈련이다. 연습은 완벽이 아니라, 완벽으로 가까이 접근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이다. 물론 완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을 추구할 때,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만일 수련 자가 자기 스스로 완벽하다고 자신하는 순간, 그는 불-완벽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 저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게 오만의 모습이다. 그래 나는 '회복 탄력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패 후에 회복하는 능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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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장은 공감, 경청, 배려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성장은 갈등, 불협화음, 실패를 이겨나가는 과정에서 더 잘 이뤄진다. 하지만 과잉 애정에 따른 정서적 비만은 작은 갈등조차 트라우마로 확대 해석해 절망하는 나쁜 심리적 습관으로 굳어질 수 있다. 과보호한 아이는 내면의 불편이나 작은 마찰도 견디지 못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집으로 가출한다”는 역설적 표현이 등장한 이유다. AI 시대, 아이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공감이 아닌 "적절한 좌절"일지 모르겠다. 실패에서 배우는 법,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경험,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배우는 것. AI가 몰고 올 ‘과도한 공감’ 시대에 가장 큰 경쟁력이 회복 탄력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챗GPT와 함께 '정서 비만증'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류한욱과 김경일의 공저인 <<적절한 좌절>>에서 ‘정서적 비만’이란 표현을 보았다. 조너선 하이트의 책 <<나쁜 교육>>의 “오프라인의 과보호”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했다. 이 말은 ‘온라인의 과소 보호’란 말과 비교할 때 더 강력해진다. 요즘은 아이에게 벌어지는 온갖 갈등과 장애물을 부모가 미리 제거하곤 하는데, 이런 행동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한다.

이 사진은 친구 방석준의 페북에서 허락없이 가져온 것이다. 행복은 1965년 사진이고, 2025년 사진은 아니라는 거다. 최근 AI 열풍을 보며 내가 가장 염려하는 건, 인간을 능가하는 발전 속도가 아니라 AI의 태도다. 인공지능 특유의 과도한 칭찬과 공감이 요철처럼 울퉁불퉁한 실제 인간관계를 오히려 두렵게 하는 역설적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AI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인터뷰한 방송이 나왔고, 샘 올트먼은 챗GPT 최신 버전의 ’아첨꾼 기질‘을 인정하고 이를 수정하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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