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는 날,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夏至)였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22. 17:05

331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22일)

1
어제는 비가 오는데, 성당 산악회 팀들과 '우중 등산"을 했다. 세종시에 있는 <금강수목원>을 갔는데, 문을 닫아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점심을 먹은 후 세종 호수 공원을 산책했다. 오늘 아침 사진이 거기서 만난 거다. 빗방울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이 빗방울은 찰나이기에 아름답다.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의 아상(我相)도, 이 물방울처럼, 헛것이다. ‘나’를 우주의 중심으로 믿고 끌어안고 사는 것은 그림자놀이나 마찬가지다. ‘나’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낯설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 개체적 동일성으로 이루어진 ‘자아’는 헛것일 뿐만 아니라 실패의 궤적, 불우의 흔적, 소외의 리듬이다. 운명의 돛을 올리고 키를 잡고 방향을 가늠하며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은 ‘나’가 아니라 ‘나’를 구속하는 시간이다. ‘나’는 진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본디 그것이 헛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은 것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이다. 오늘도 시부터 읽는다. 사진이 만들어준 사유와 시이다.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더 좋다/박라연

가득 차서 벅차서 무거워서 땅이 되었다
새가 나무가
빗방울이 되었다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되었나?

진실한 사람에게 기대어
그를 베개 삼아 처음을 보냈다
진실한 사람? 사람이 어떻게 진실할 수 있나요?
그러해도 살아남을 수 있나요?

다음엔 낯선 얼굴들이 놀러 왔나요?
땅 좀 달라고 나무 좀
새나 빗방울 좀 달라고 말하던가요?

저리 가! 저리 가! 외치셨나요?
피가 다른데
함부로 얻어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말했나요?

당신은 혹시 아름다운 사람인가요? 뭐요?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요? 꽃처럼
수명이 짧다면 모르지만

2.
어제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다는 날,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夏至)였다. 그러니 비가 와서 해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는 24절기 중 열 번째 날로 망종(芒種)과 소서(小署) 사이에 있다. 이 날 지표면에 닿는 태양빛이 가장 많기 때문에 이날부터 점점 기온이 올라가, 삼복때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된다. 농촌에서는 단오를 전후하여 시작된 모심기가 하지 이전에 모두 끝난다. 그리고 햇감자를 캐어 쪄 먹거나 갈아서 감자전을 부쳐 먹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하짓날은 감자 캐 먹는 날이고 보리 환갑이다"이라는 말이 있다. 농촌에서는 이날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고 했다. 다행스럽게 올해는 하지 다음날인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 옛날에는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농촌에선 이맘때가 추수 때만큼 바쁘다. 메밀 파종, 누에치기, 감자 수확, 고추밭 매기, 마늘 수확 및 건조, 보리 수확 및 타작, 모내기, 그루갈이용 늦콩 심기, 대마 수확, 병충해 방제, 해도 해도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미끈유월'과 '어정 칠월'이라는 말이 있다. '미끈 유월'은 '농사 일로 바빠 한 달이 미끄러지듯이 쉽게 지나간다는 말이다. '어정칠월'은 칠월은 한가해 어정거린다는 말이다. 회두리에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나 농부다. 이제 땅의 소출이 경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잊으면 헛 사는 것이다. '떵떵'거리며 산다는 말도 기실 '땅'에서 왔다. 올해도 절반이 후딱 지나가고 있다.

3
하지는 감자의 환갑날이라 한다. 예로부터 하지가 지나면 감자알이 더 이상 꿁어지지 않고 줄기가 시들며 보리 또한 마른다 해서 선조들은 이를 두고 '감자 환갑', '보리 환갑'이라 불렀다.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을 지나는 셈이니 때를 넘기지 말고 수확해야 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환갑(環甲)은 사계절을 한 바퀴 돈 나이이다. 봄이 15세이고, 여름이 30세이고, 가을이 45세 그리고 겨울로 다시 돌아오면 60살이 되는 것으로 우리는 해석한다. 그리고 우리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1년을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12지간으로 구분한다. 간지(干支)는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한 것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라고도 한다. 십간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말하며, 십이지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말한다. 십간과 십이지를 조합하여 하나의 간지가 만들어지는데, 십간의 첫 번 째인 '갑'과 십이지의 첫 번째의 '자'를 조합하여 '갑자'가 만들어지며, 그 다음으로 십간의 두 번 째인 '을'과 십이지의 두 번 째인 '축'이 결합하여 '을축'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순서로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 , 계해의 순서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다시 '갑자'로 시작될 때를 우리는 '환갑'이라 한다.

하짓날 감자를 캐면 뭐라도 해 먹어야 풍작이 든다고 믿었기에 전을 부치거나 감자를 넣은 밥이라도 지어 먹었다. 사시사철 감자를 먹을 수 있는 시대지만 1년 중 가장 맛있는 것이 하지 감자이다. 뽀얗게 분이 나는 햇감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김시지 작가는 환갑을 맞은 보리 맥주도 권한다. 거기다 햇마늘과 양파도 곁들이면 일품이다.

4
하지 무렵 우리가 자주 나누는 말 중 하나는 "아직도 환하네!"라는 말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들도 대체로 환하다. 긴긴 낮은 선물이다. 여름의 매력은 역시 저녁에 만나도 낮술 기분이 난다는 데 있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건 행복한 일을 하고 있을 때이다. 그건 하지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다. 하지가 지나면 낮의 길이는 매일 1분 남짓 짧아지기 시작한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딱 1분씩만 더 즐겁게 보내는 거다. 겨울의 긴긴밤에 모여 앉아 나눌 추억을 위해. 여름의 긴긴 낮에 추억을 만들어 놓는 거다. 그러니까 하지엔 역시 노는 게 남는 거다. 

<<주역>>에 나오는 군자의 4덕으로 "원형이정(元亨利貞)" 중 "형"이 여름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주역>> 유튜브 강의에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해석에서 "亨"을 "그대는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제사를 지내 만인, 만물과 형통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려라"는 말로 풀이를 했다. 그래서 "亨'은 '나눔'이라는 거다. 그런 나눔으로 우리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것이 아닐까? <문언>에서는 "형"을 "사물을 생성하는 과정의 형통함"으로 풀이했다. "사물이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계절로 말하면 여름이요, 사람으로 말하자면 예(禮)가 되니, 이것은 모든 아름다움이 모여 회통(會通) 하는 것이다." <<주역>> 제1장 <중천 건> 괘의  <문언전>에 나오는 "원형이정"이 군자(君子)의 네 가지 덕(四德)이라 본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혼란스러울 때는, 이 표를 보고, 일상의 삶을 점검해볼 수 있다. 때에 따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원(元) 체인(體仁) 선지장(善之長) 장인(長人)
형(亨) 가회(嘉會) 가지회(嘉之會) 합례(合禮)
이(利) 리물(利物) 의지화(義之和) 화의(和義)
정(貞) 정고(貞固) 사지간(事之幹) 간사(幹事)

여름에 해당하는 '형'의 시기에는 "가회(嘉會)"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자는 "합례(合禮)"하는 거다. 사람들을 만나면 예의를 지키고, 즐겁게 만나라는 거다. 그걸 "가회(嘉會)"라 했다. 에티켓과 매너를 갖추는 거다. 매너는 에티켓과, 엄밀하게 말하면 그 뜻이 다르다. 에티켓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사회적인 불문율로써 하나의 규범'이라면, 매너는 실제 생활 현장 속에서 그 '에티켓을 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다음의 예를 보면, 우리는 금방 이해 할 수 있다. 우리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규범으로서 에티켓이고, ‘노크를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하는 방법은 매너에 속한다. 따라서 에티켓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없다. 에티켓에 맞는 행동이라 해도 매너가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행동은 예의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로 서의 매너의 기본원칙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진정한 매너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배려심이다. 그 배려심은 자신이 불편을 자초(自招)해야 한다. 난 '자초'란 말을 좋아한다.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기 때문이다.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정도(正道)'와 '권도(權道)'로 나눈다. '권도'의 사전적 정의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때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도'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권도'의 '권(權)'은 마치 저울이 어떤 물건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잘 측정하여 평형을 유지하듯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서로 다른 관점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고르게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5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제철에 있다면 계절마다 '아는 행복'을 다시 느끼는 거다. 봄에는 봄에 해야 좋은 일을 하고, 여름에는 여름이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이다. 제철을 즐기는 거다. 제철 과일이 있고 제철 음식이 있는 것처럼 제철 풍경도 있고 제철에 해야 좋은 일들이 많다. 제철은 '알맞은 시''이란 말이다. 장마가 지나면 수박은 싱거워진다. 때를 지나 너무 익은 과일은 무르기 시작한다. 다 제철이 있다. 알맞은 시절을 산다는 것은 계절의 변화를 촘촘히 느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금 챙겨야 할 기쁨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 보는 일이다. 비 오는 날과 눈 내리는 날 어디에 있고 싶은 지 생각하며 사는 것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거다. 김신지 작가의 <<제철 행복>>을 읽고 한 생각이다.  

하지(夏至)를 말 그대로 하면, '여름에 이른다'는 거다. 1년 중 낫이 가장 긴 날이다. 동지부터 점차 길어지기 시작한 해가 마침내 정점에 이르러 낮 시간이 자그마치 14 시간 35분 되는 날이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해와 함께 하는 셈이다. 북극권에 속한 나라에서는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낮이 길고 해가 높이 뜬 만큼 북반구의 땅이 가장 많은 태양열로 기온이 올라가고 몹시 더워진다.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것이다. 요즈음은 지구 온난화로 그 더위가 일찍부터 시작된다. 오늘은 아침부터 덥다.

그러나 더위를 탓하며 투덜대는 것은 세상을 반만 보는 일이다. 감자와 양파 같은 채소들은 하지 무렵의 땅 아래서 단단히 여물어간다. 곧 나올 색색의 여름철 과일도, 가을까지 햇볕을 제 안에 차곡차곡 저장하며 익어가는 벼와 사과와 배도 모두 더위가 키워내는 것들이다. 이렇게 연결된 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더위가 나를 살리고 있다고 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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