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대답에만 빠지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17. 08:48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사람들은 고급 정보보다는 값싼 자극적인 정보에 속는다. 그 마저도 끝까지 안 읽고, 제목만 보고 판단한다. 오늘의 핫 이슈이다. "네이버, 다음 '뉴스 편집' 완전히 손 뗀다"는 제목만 보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나? 앞으로는 이용자가 포털에서 구독을 선택한 언론사의 뉴스만 제공받는 식이다. 그 외, KBS-EBS 등 공영방송 임원진 국민 추천, 언론보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등이 미디어 환경 개선 방안이다.

지난 6월 1일 <인문 일기>에 다음의 글을 공유했었다. 오늘 다시 소환한다. 권력 화된 포털로부터 독립되어야 언론이 산다. 언론사들은 포털 때문에 선정적인 기사를 내놓아야 한다. 포털의 보상이 클릭 수에 따라 돈을 매기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취재를 안 하고, 그냥 기사를 써야만 하는 처지이다. 왜냐하면 인터넷용 기사를 시간마다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래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는 건 엄두를 내기도 어렵다. 그 이유는 네이버가 클릭 수에 따라 대가를 지급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이 본 기사가 좋은 기사이고, 많은 기사를 생산하는 곳이 좋은 언론사이다. 그러니 어떻게 든 선정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내보내는 무한경쟁의 아수라장이다.

기자들 탓 할 수 없다. '경악'이나 '충격'이니, '헉'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가 '단독'이라는 문패를 달고 밑도 끝도 없이 쏟아지며 전 사회에 악취를 퍼트린다. 속상하다. 팩트가 맞지 않는 기사를 쓰든, 남의 기사를 그대로 베껴 쓰든, 이치에 닿지 않는 기사를 쓰든,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든 무관하다. 클릭 한 번에 돈 한 푼이다. 실제 포털의 뉴스를 지배하는 것은 '클릭을 받은 만큼 돈을 준다'는 악마의 알고리즘이다. 거기에는 진리도, 정의도, 정론도 설 자리가 없다. 포털이 뉴스를 공급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뉴스라는 '미끼 상품'으로 트래픽을 올려 쇼핑 등에서 더 많은 부가가치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뉴스의 가치는 처음부터 고려대상이 아니다. 더 많은 클릭이 포털의 제1가치인 것이다.

이래서 문제는 포탈이다. 잘 알아야 한다. (1) 포털은 극소수인 CP 제휴사들만 자격을 얻는다. 다양성과 공공성을 처음부터 제약하는 구조이다. 생태계를 척박하게 하는 요소를 여럿 갖추고 있는 셈이다. (2) 네이버가 언론사가 주는 돈은 1년에 3천억쯤이라고 한다. 한국 정부가 한 해 쓰는 예산이 본예산만 530조가 넘는다. 1년 예산의 0.05%으로 이런 악마의 시스템을 고칠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시도이다. 기사를 작성하느라 취재를 할 시간이 없는 언론은 말이 안 된다.

정치 이야기를 가급적 안 하려고 했는데, 어제 저녁 너무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멀쩡한' 사람으로부터 말이다. 그는 아직도 종북 빨갱이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답답해서 오늘 <인문 일기>를 필링 인문학으로 하였다. 많은 부분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언론 생태계 문제라고 나는 본다. 이걸 빨리 바꿔야, 보다 투명하고, 상식적인 사회가 될 것 같다. 어제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쓸쓸하고 더딘 저녁>이었다.

쓸쓸하고 더딘 저녁/황동규

이제 컴퓨터 쓰레기통 비우듯
추억 통 비울 때가 되었지만,
추억 어느 길목에서고
나보다 더 아끼는 사람 만나면 퍼뜩 정신 들곤 하던
슈베르트나 고흐
그들의 젊은 이마를
죽음의 탈 쓴 사자使者가 와서 어루만질 때
(저 빠개진 입 가득 붉은 웃음)
그들은 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밀밭이 타오르고
밀밭 한가운데로 달려오는 마차가 타오르고
사람들의 성대聲帶가 타오를 때
그들은 왜 몸을 헤픈 웃음에 허술히 내주거나
몸을 피스톨 과녁으로 썼을까?
'왜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재빨리
빠져나가고 싶어했는가?
시장 인심이 사납던가,
악보나 캔버스가 너무 비좁던가?
아니면 쓸쓸하고 더딘
지척 빗소리가 먼 땅 끝 비처럼 들리는 저녁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던가?'

힐링 인문학이 아니다. 오늘 아침은 필링 인문학이다. 필링의 인문학은 생각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 구조, 자본주의의 관계를 문제 삼아 내가 진짜 생각하는 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필링의 인문학은 실존적 나가 생각 당하는 나인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성찰하는 나'가 '필링하는 나'라고 주장한다. 필링의 인문학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각하는 나인가, 생각 당하는 나인가, 이 질문을 하면서 내 생각의 제작자를 찾아내 맞서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언젠가 홍세화의 강의를 듣고 받아 적어 둔 것을 오늘 또 공유한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은 가정과 학교에서 구축됐다. 문제는 두 곳 모두 ‘생각 하다’라는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 부모와 한국 부모를 비교하면 더욱 명확하다. 유대인들은 부모가 자녀에게 묻는다. “네 생각이 뭐니?” 자녀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정반대다. 부모가 자녀에게 생각하기를 이끌기는 커녕 자녀의 “왜”라는 질문에 대답도 잘 안 해준다. 그러니 이런 에피소드가 연출된다,

“제가 파리에서 살다가 귀국해서 생긴 일화를 말씀드릴게요. 서울에서 택시를 타면 귀국 초기에는 참 감개무량했어요. 제가 택시기사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면 분위기 괜찮아요. 그러다가 ‘지금은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한겨레신문사 다닙니다’는 답을 하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썰렁해져요. 제가 감을 잡은 뒤에는 물어봤어요. ‘한겨레신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생각을 물은 거죠.”

홍 대표는 그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이 듣고 싶었던 대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상 가능한 대답은 세 가지 정도다. 첫 번째는 ‘괜찮은 신문이죠’라는 긍정적인 평가. 두 번째는 ‘한겨레신문을 읽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정답이지만 이마저도 듣기 힘들다. 대부분 반응은 ‘친북신문이다. 빨갱이 신문이다. 불평만 늘어놓는 신문이다. 전라도 신문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신문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내 문으로는 지금 한겨레신문도 예전 같지 않다.

본 적 없는 신문에 부정적 견해를 갖는 것은 특정 직업군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사회 구성원이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을 형성한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는 우리가 생각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홍세화는 말하였다.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생각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조국의 시간>도 그런 식이다.

아니면, 적어도 지적으로 부지런해야 한다. 생각이 비뚤어지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 모과나무처럼, 심사가 뒤틀렸으면, 모과 꽃 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한다. 아니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확대하면서 자기 삶을 꾸리는 사람은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지적 '부지런함'이란 단독자로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따라 하기'의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계속 파고 들어가 가능해지도록 '틈'을 벌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대답에만 빠지지 말고, 질문하는 사람이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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