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12. 17:41

330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12일)

1
나는 언젠가부터 단순한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단순하게 사는 것이란 생각은 깊이 하되, 쓸데없는 생각들 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며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고,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 복잡함 속에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는 거다. 내 힘으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흘러가게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고,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싶다면 내일에 무게 중심을 두지 말고 오늘을 제대로 살면 된다. 오늘을 잘 사는 비결이 있다면 바로 '진심으로' 살아가는 거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삶을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안다는 듯 살아간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쥐지 않고 왔다가 저 자연이 부를 때 모든 걸 내려놓고 간다는 사실 뿐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 들수록 영적으로 성장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불필요한 소유를 덜어내고, '참나'를 찾는 것이 단순한 삶의 핵심이다. 그래야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어제 어느 단체 카톡에서 얻은 글이다. 이렇게 강물처럼 흘러가는 일상을 영위할 생각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흐르는 것을 흘러가게 놔둬라.
바람도 담아두면 나를 흔들 때가 있고,
햇살도 담아두면 마음을 새까맣게 태울 때가 있다.
아무리 영롱한 이슬도 마음에 담으면 눈물이 되고,
아무리 예쁜 사람도 지나가고 나면 상처가 되니 그냥 흘러가게 놔둬라.
마음에 가두지 마라.
출렁이는 것은 반짝이면서 흐르게 놔둬라.
물도 가두면 넘칠 때가 있고,
빗물도 가두면 소리 내며 넘칠 때가 있다.
아무리 즐거운 노래도 혼자서 부르면 눈물이 되고,
아무리 향기로운 꽃밭도 시들고 나면 아픔이 되니, 출렁이면 피게 놔둬라.

2
니체도 비슷한 말을 했다. "망각하는 자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이 행동 돌이켜 반성하고 이를 통해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니체도 다른 곳에서 실패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성공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망각의 복'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을 목격하곤 한다. 니체는 모둔 것을 반추하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닌, 때론 망각할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빨리 털어내야 할 것은 털어낼 수 있어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일상의 사소한 지점을 빠르게 망각하는 것은 어쩌면 삶의 중요한 행복이자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일 수 있다. 어떤 것은 마음에 담아주지 말고,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거다. 반성은 더 나은 길을 걷기 위한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으나 때론 자신이 스스로 쌓아 올린 인생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말고 망각하라. 어쩌면 그게 사소한 일을 흘려 보내는 지혜일 수 있다.언제나 장애물이 넘쳐났던 자신의 인생이 그때부터 조금 더 수월하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3
불교는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진여(眞如)나 여여(如如)의 경지를 강조한다. 불교는 극단적으로 두 가지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집착하는 마음’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이 극단적 두 마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산다.  ‘집착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불만족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다는 거다. <<대승신기론>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하나 뿐인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양태, 즉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이 있다.” 이 말은 집착하는 마음도 내 마음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도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진여문"을 '무관심한 마음 혹은 죽은 마음'과는 구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집착이란 자신이나 타인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외모만 보느라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망을 통해 존재하는 인연(因緣)의 존재일 뿐이다. "진여의 마음",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란 상대방도 의식하지 못한 그의 모든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예컨대, 외모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가진 나머지 훌륭한 가치들을 돌보지 않기 쉽고, 당연히 그것들은 무관심에 방치된 채 시들고, 마침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 "진여의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쓸데없는 갈등과 대립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편견을 가지고 어떤 것들을 미리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우리는 일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편견 같은 집착을 버려야 그 사람의 정체가 제대로 들어오게 된다. 나나 타인이나 모두 단순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우주에 가까운 수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수많은 특징들은 수많은 인연들과의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 즉 연기(緣起)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특징으로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이 집착의 마음, 즉 "생멸의 마음"이라면, 하나의 사물을 마치 완전한 하나의 우주인 것처럼 보는 것이 "진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종의 대표자 법장 스님이 <<화엄의해백문>>이란 책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티끌만 보아도 전체가 갑자기 나타나며, 이것과 저것은 서로 받아들이니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만 보아도 모든 사물이 함께 나타난다.”라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홀로 앉아 선정(禪定)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일에는 늘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 가는데 있어 우환(憂患 )을 똑똑이 알아, 무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화가 났을 때 화냄을 알아차리고, 생각하는 생각을 알아차리면, 이미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지혜로 더 나아가 깨달어야 한다. 무엇을? 세상은 공(空)이다. 그래 오늘부터 내 호중의 하나를 '지공(指空)'으로 정했다.  뜻은 '늘 이 세상은 공이라는 것을 소환하고 생각하자'는 거다. '공'은 '순아타'를 번역한 것으로,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을 말한다. 본래 없다가 단지 지금 있는 것("本無今有-본무금유=空卽是色-공즉시색)이고, 지금 있음이 지나면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旣有還無-기유환무=色卽是空-색즉시공)을 뜻한다.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상을 가리키는 불교 교리이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理法)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불교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공'은 부처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진리에 기원한다. 일체의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는 내용이다.

4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각자의 특성과 역량의 결합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엄격한 심판자가 아닌 결과보다 과정에 더 큰 관심을 갖는 행동학자를 필요로 한다. 이런 스피노자의 윤리학으로 행동학으로 읽은 질 들뢰즈는 우리 모두는 관계와 역량, 변용과 변화의 산물로,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긍정적으로 반응한다고 주장했다. 들뢰즈는 영속성보다 연관성과 반응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체와 그가 처한 환경이 맺는 관계와 그 둘의 지난한 상호작용을 관찰하면서 일반화의 위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런 전방위적 관찰이 바로 그가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이었다.

거미나 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변화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빨라 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이런 요인들을 관찰하는 편이 더 좋은 것이다. 이 상호적 관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바라볼 때, 성급한 확신은 불확실함으로 바뀌고 한 사람에게 이런저런 꼬리표를 붙이고 싶은 마음을 자제할 수 있다. 이를 나는 '판단중지'라 부른다. 이해인 수녀님이 언젠가 말씀하신 "판단 보류의 영성"이라는 말도 소환된다. ”인간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사랑은 빨리 하라“고 했다. "판단 보류"라는 말은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이다. 보류하는 마음이 없으면 자꾸 실수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사람이 다 비슷비슷하다. "참 너도 노력하는데 뜻대로 잘 안되지"라며 연민의 정을 갖는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 낫냐"며 당당해 한다. 그리고 판단 중지하고 진심으로 들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온전하게 집중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그건 진심으로 듣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괄호로 묶는 훈련이기도 하다. 나는 '판단 중지'라 말한다.

망치로 무쇠를 두드리는 것은 가치판단이 필요 없는 노동 행위일 뿐이지만, 망치로 누군가의 머리를 때리는 것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모든 존재는 여러 원인과 조건(인연, 因緣)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세계에 있으며, 이 세계는 만들지 않으면 본래 없는 것이라는 공(空)의 세계이다. 불교의 사실판단이다. 여기에 가치판단을 하려면, 세상의 법칙이 이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사실 판단이며, 자비(慈悲)는 가치 판단이다. 깨달음은 지혜이고, 가치의 판단은 자비(사랑)이다. 그러니까 모든 길은 사랑으로 통하고 사랑으로 만난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과 생명에게 편견과 차별을 거두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끌어안고 같이 기뻐하거나 아파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에게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고 말한다. 내 자아는 계속 변한다. 우리의 자아는 불변하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오온(五蘊-색, 수, 상, 행, 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강도에 따라 요동치는 것일 뿐이다. 인연은 '인(因)'이라는 원인과 조건이라는 '연(緣)'들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간접적인 조건이다. 그러니까 원인도 중요하지만, 그 '인'을 좋은 조건의  '연'으로 만들어가는 매일매일의 노력도 그만큼 중요하다. 말장난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시 한 편 공유한다.


인연/조선윤

세상에 태어나서
가는 길은 다르지만
만나고 헤어지는 만남 속에
스치는 인연도 있고
마음에 담아두는 인연도 있고
잊지 못할 인연도 있다

언제 어느 때 다시 만난다 해도
다시 반기는 인연 되어
서로가 아픔으로 외면하지 않기를
인생길 가는 길에
아름다운 일만 기억 되어
사랑하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꽃으로 사는 시간은 짧다. ‘꽃’이 진 후, ‘잎’으로 사는 시간이 진짜 인생이다. 아침에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을 때 떠올리는 말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시절인연(時節因緣)에다 덧붙여 집착즉고(執着卽苦-놓지 못할 수록 더 아프다)와 인연즉연(因緣卽緣- 될 인연은 애쓰지 않아도 된다)라는 불교에서 말하였던 것을 기억했다. 결국 인연은 때에 맡기고, 집착은 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진짜 인연은 붙잡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오고, 머물 자리에 조용히 머문다. 가짜 인연은 붙잡아도 멀어지고 애쓸수록 내 마음만 지친다. 사람 사이의 만남과 이별은 시절인연의 흐름 속에서 머물다 지나간다. 지금 관계가 버겁다면 이작 때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애쓰지 말고, 흐르게 두어라. 삶의 중심이 내가 될 때, 진짜 인연은 자연스레 곁에 남는다. <<초역 부처의 말>>에서 말한다. "시절인연에 연연하지 마라. 먼저 너의 인생을 살어라."

나는 박찬욱 감독이 가훈으로 생각한다는 말, "아니면 말고!"를 시절인연이 떠난 사람에게 한다. ‘아니면 말고’에는 인간사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 숨어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손절이든 지속이든 힘써 보고 아니면 내려놔야 한다. 관계를 유지하며 계속 싸우기보다 보지 않는 쪽이 더 현명할 때도 있다. 관점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처럼 오랜 친구와 겪는 갈등이 오히려 어느 쪽이 진짜 내 편인지 가늠해주기도 한다. 또 종종 상처를 남기고 떠난 우정 덕분에 새롭게 다가오는 우정을 만나기도 한다.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당연히 우정에도 시절 인연이 있다. 관계에서 힘들어 하지 말자.

5
<<장자>> 외편 제19편 <달생> 제4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 "예전에 귀신 같은 솜씨로 배를 모는 사공이 있길래 제가 물었습니다. '저도 배 모는 법을 배울 수 있나요? 그러니까 사공이 말하길 '헤엄칠 줄 알면 다 할 수 있습니다. 물에 뜨면 배를 보지 않고, 배를 보지 않으면 배를 저을 수 있지요'라고 하는데, 저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공자는 대답했다. "네가 배를 보지 않는다는 건, 네가 물에 있다는 걸 잊는 것이다. 배가 물이 아니라 언덕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뜻이다. 활 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싸구려 기와를 걸고 쏘면 최대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황금을 걸고 내기 활을 쏘면 하나도 맞지 않는다. 기술은 같은데 놓치면 아깝다고 생각하는 집착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외물(外物)을 중시하여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무릇 외물(外物)을 중시하는 경우에는 내면의 마음이 소홀하게 된다." 사람들이 배를 모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건, 거센 물살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저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지면 나와서 다시 하면 된다'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배 모는 법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실제 '잘못하면 어때. 다시 하면 되지.'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는 것이다. 연습할 때는 실전처럼 최선을 다하지만, 정작 실전에서는 연습한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일해야 한다. '이번에 뭔가 보여주겠 어'라고 마음먹고 하는 일 치고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빌헬름 텔(Wilhelm Tell)이 아들의 머리 위에 있는 사과를 활로 쏜 일이 전설이 된 건, 멀리서 조그만 목표물을 맞춘 게 신내림의 기술이어서 가 아니라, 자칫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다는 중압감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매우 강한 양궁 경기에서 과녁 정중앙의, 카메라를 숨겨 놓은 중심점 엑스텐(X-10)을 심상치 않게 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실력으로는 백발을 쏘면 백발 다 텐(10)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에 맞추지 못 한다면'이라는 중압감이다. 그 중압감을 누가 이겨내느냐가 늘 승부를 좌우한다. 그래서 양궁 선수들의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인드 컨트롤이다. 단 한 발에 승부가 갈리는 긴장 속에서 마음을 비우는 훈련, 마음 비우기 이다. 이렇게 긴장을 풀고, 마치 남의 일 보듯 심드렁해 지는 그 순간, 문제의 해결이 보인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엉뚱한 순간에 멋진 답이 뛰어 나온다. 훈수꾼들이 늘 장기판을 더 잘 보는 이유도 같다. 내 일이 아니고 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장기판에 붙어 앉지 않고 약간 떨어져 앉아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거리 두기, 또는 마음 비우기 효과이다. 오늘 아침 <인문 일지>는 집착을 비우고, 모든 게 '공'이라는 것을 믿고 인연에 따라 단순하게 살아가자는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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