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인 현충일(顯忠日)이다.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2025. 6. 11. 09:14

329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6월 6일)

1
오늘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을 기리는 날인 현충일(顯忠日)이다. 난 한문 '忠(충)'자를 좋아한다. 풀어 보면 이 거다. '中+心". 한 마음을 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마음을 먹으면, '환患', 즉 '걱정'이 된다. 6월 이쯤 되면 소환하고 싶은 시를 오늘 공유한다. 그 영혼들을 위해, 하얀 산수국 꽃을 바친다.


김치찌개 평화론/곽재구

김치찌개 하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 속에는
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
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
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아이에게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
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
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이 소박한 한국의 저녁 시간이 우리는 좋다
거기에는 부패와 좌절과
거짓 화해와 광란하는 십자가와 덥석몰이를 당한 이웃의 신음이 없다
38선도 DMZ도 사령관도 친일파도
염병할, 시래기 한 가닥만 못한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포성도 없다
식탁 위에 시든 김치 고추무릅 동치미 대접 하나
식구들은 눈과 가슴으로 오래 이야기하고
그러한 밤 십자가에 매달린
한 유대 사내의 웃는 얼굴이 점점 커지면서
끝내는 식구들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2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신체적 억압이 제거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이유가 되어 하는 언행은 거침이 없다. 그리고 자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데서 출발한다. 삶에서의 많은 문제들은 자신의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이 우선이다. 자기 인식은 자신을 알려는 마음가짐이고 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응시하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사제나 목사에게 달려가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는 실제 삶에서 쉽게 자유를 포기하고, 어떤 외부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 외부 권위는 명령하고 억압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일 때가 많다. 실제 우리 사회는 우연히 부여잡은 권위를 가지고 휘두르며 다른 이에게 명령하며 복종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세상의 변혁은 한 번도 이념, 정책, 교리, 리더의 카리스마를 통해 성취된 적은 없다.

자유를 위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두어, 자신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에 대한 관찰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과 관계에서, 그들이 반응하는 자신을 응시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수정하려는 수고를 하는 일이다.

3
내가 살고 세상은 내가 스스로 변혁할 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변혁은 외부의 권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변혁은 자기가 누군인지 알려는 수고의 부산물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자기 변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내가 오늘 마주치는 정보들과 사람들을,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나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편견을 가진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념과 이념처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일이 없다고 믿는다. 자기 인식을 통해 얻은 자유는 나에게 자연을 편견 없이 탐색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자유로워야 조급해 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을 공유한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조르바 식 자유는 붓다의 방식과는 다르다. 붓다는 욕망의 불꽃을 끈 자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을 아낌없이 태우는 자이다. 그는 욕망에 옭매이지 않는다. 그는 어떤 욕망이든 남김없이 태우며 산다. 매 순간 오감을 열어놓고 노래하며 산다. 한 점 미련 없이, 한 가닥 후회 없이 산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행복 철학에 동의한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자유의 개념에서 행복을 도출했다. 노예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므로 신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신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속박이 존재한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마음이 무엇에 속박되어 있다면 그를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정념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도 그것의 노예라는 게 에픽테토스의 주장이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주인으로서 자유를 누릴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인문학을 우리는 liberal arts, 자유를 얻는 기술이라 말하는 것이다.

4
공자가 말하길,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고 하니 증자가 말하길, “네!” 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하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논어>> <이인(里仁)>편 제15장에 나온다. 
子曰(자왈): 參乎! 吾道 一以貫之(삼호! 오도 일이관지)」
曾子曰(증자왈): 唯(유) 
子出(자출) 門人問曰(문인문왈): 何謂也(하위야」
曾子曰(증자왈): 夫子之道, 忠恕而已矣(부자지도, 충서이이의) 

'충(忠)'이란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 가운데'를 뜻한다. '서(恕)'는 같음을 뜻하는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과 같다는, 혹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마음의 중심을 잡을 때(忠), 타인의 마음 또한 충(忠)하다고 믿을 수 있다. 충(忠)하지 못하면 서(恕)하지 못한다. 마음이 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 또한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각박하고 옹졸해 진다. 그래 진정한 용서는 인내와 억누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나처럼 마음의 가운데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 태도에서 나온다. 

'서(恕)'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공감(sympathy)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충서'란 곧 ‘정성과 공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충'을 '서(恕)'와 짝을 지어 말하지 않고 '성(誠)'과 짝을 지어 '충성(忠誠, loyalty)'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충성'에서 '성(誠)'이란 본래 '충(忠)'의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충성'이 곧 '충'이다. 원래 '충'이라는 것은 타인, 혹은 외부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 선언하는 인간학적 다짐이다. '충'은 오히려 국가적 권위나 외부의 명령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확고한 믿음을 강조한다. 국가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때 과감히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충'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충성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충'이란 대상이 필요 없이 자기 홀로 실천하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이다. 스스로 마음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가능하고, 타인에 대한 정성도 가능하다. '충'의 결과를 '충'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고 타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처럼 대해야 한다는 실천 강령을 의미했던 '충서' 개념은 이후 주희(朱熹)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강화된다. 주희에 의하면, '충'은 단순히 실천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까지 보장받는 인간의 본성(性)이 된다. 증자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고 윤리적 측면에서 '충'을 강조했다면, 주희는 ‘모든 인간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은 하늘에 의해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충'을 규정함으로써 존재론적 측면에서 강조했다.

'충(忠)'하지 못한 사람을 윤리적으로 지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희는 그런 사람을 존재론적 층위에서 우주의 법칙에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배척해 버린다. 윤리적 비난에는 인간적 끈끈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배척에는 그러한 여지가 원천 봉쇄된다. 단죄는 엄하되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힘은 미약하다. 주희는 '충서'를 형이상학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각박하게 해석하여 오히려 충서(忠恕)스럽지 못한 결과를 빚고 있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우리 동네에 있는 '현충원(顯忠園)'이다.

5
최근에는 '충서'를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일로 이해하여 일원론적 해석을 하는 이가 더 많다. '충서'를 하나로 보는 것이 굳이 도치법을 써서, '일(一)'을 강조한 본래의 취지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충서'를 공자의 '도(道)'로 설명한 증자의 설명에도 들어 맞는다. '충서'란 '서' 개념에 충실한 것, 즉 '서'로 일이관지 하는 것을 말한다. '서'에 충실한 것이 공자의 '도'란 말이다. 여기서 충은 '하나의 개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충실을 기한다'는 뜻이지 '서'와 구분되는 또 다른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논어>>의 <위령공>편 제23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공이 물었다. "子貢問曰(자공문왈) 有一言可以從身行之者乎(유일언가이종신행지자호) 子曰(자왈) 其恕乎(기서호) 己所不欲(기소불욕) 勿施於人(물시어인). "한마디 말로 평생토록 지키고 행할 수 있는 말이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바로 서(恕)일 것이다.' '서(恕)'란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자 철학의 '일이관지'하는 핵심 원리는 '서'이다. 위에서 이미 말했던 것 처럼,  '충', '속마음을  다하는 것(中心), '서'를 '같은 마음(如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같은 마음'이란 '공감, 교감'을 뜻한다. 공자는 '서'의 뜻을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서양에서 말하는 '황금률(Golden Rule)'과 같은 의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공자 철학의 도를 '인(仁)'으로 본다. 여기서 '인'은 '사람 사랑'이다. 그러면 '서'는 '인'의 실천을 만드는 근거가 된다. '서'가 공자의 '일이관지'하는 개념이라면, '인'은 실천원리이다. '서'와 '인'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서'가 공감적 감정 작용으로써 아직 '인'이 아니며, 그냥 감정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수신(修身)'을 통해 '인'의 덕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에 항상 '인'이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고, '서'의 감정을 갈고 닦아 습관화한 덕성이 곧 '인'이다. 반면 '인'에는 '서'가 항상 따라다닌다. '인'을 행할 때는 '서'의 감정작용이 받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인'은 맹자에게 가면 더 적극적이 된다. 맹자의 '四端之心(사단지심)' 중에 하나인 '인'은 남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보다 더 힘들어 하는 것을 넘어,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보다 더 즐거워하는 공감능력과 그 공감능력이 함양되는 정도에 따라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천하를 포괄할 수도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적극적인 형태의 '거룩한 인', 즉 숭고한 도덕원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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